그라운드의 ‘로맨티시스트’, 해외 축구 역대 원클럽맨 BEST 11

역대 원클럽맨 베스트 11
'원클럽맨'의 칭호는 선수 개인에게는 굉장한 영광이다. 잉글랜드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원클럽맨'을 보유하고 있다. ⓒ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ㅣ남윤성 기자] ‘원클럽맨’은 축구에서 가장 낭만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커리어 전부를 특정 구단에서 보낸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구단의 상징과도 같은 ‘원클럽맨’이 되기 위해선 어린 나이 때부터 경쟁력을 드러내야하며 은퇴 직전까지 최고의 기량을 유지해야한다. 경험을 쌓기 위해 임대를 떠나는 순간 바로 탈락이다. 소속팀이 빅클럽 일수록 이는 더욱 어려운 일이 되는데, 델 피에로, 스티븐 제라드, 존 테리, 필립 람도 결국 실패했다. 소수의 선택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표현인 ‘원클럽맨’으로는 과연 누가 있을까. 포지션별로 뽑은 ‘역대 원클럽맨 BEST 11’ 지금 확인해보자.

골 넣는 골키퍼, 호제리우 세니 (Rogério Ceni)

국적: 브라질
포지션: 골키퍼
생년월일: 1973년 01월 22일
소속팀: 상파울루
통산기록: 1237경기, 131골

상파울루 세니
‘골 넣는 골키퍼’ 호제리우 세니는 세 개 부문 기네스북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 상파울루 공식 홈페이지

골키퍼의 커리어 통산 득점기록이 131골이라면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 1993년 프로에 데뷔, 2015년 은퇴한 호제리우 세니는 상파울루의 진정한 레전드였다. 그가 23년 동안 경기에 출장한 횟수만 해도 1,237회에 이르며 이는 한 시즌 평균 50회 이상 꾸준히 출장해야 달성 가능한 대기록이다. 메이저 대회에서 총 17차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세니는 골 넣는 골키퍼의 원조였다. 그는 상파울루의 프리킥과 페널티킥 전담 키커로 나서 총 131골을 기록했는데, 이중 62골을 프리킥으로 기록했다. 세니의 정확하고 날카롭게 휘어져 들어가는 프리킥에 상대 골키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세니는 발밑기술도 훌륭했다. 이따금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드리블의 시도에 망설임이 없었으며 경기 중에도 수차례 공격적인 패스를 선보였다. 비록 골 넣는 골키퍼의 인식이 강했지만 선방능력도 매우 훌륭했다. 유연한 상체와 긴 팔, 동물적인 반사 신경으로 소위 못 막을 공도 막아냈다. 현대 축구에서 골키퍼에게 요구되는 능력을 일찌감치 갖추고 있었던 세니는 2014년 보타포구와의 홈경기를 통해 ➀골키퍼 최다 득점 ➁단일클럽 개인 최다 출장 ➂주장으로 최다 출장 등 세 가지 항목에서 세계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2015년을 끝으로 골키퍼 장갑을 벗은 세니는 올시즌을 앞두고 친정팀 상파울루에 감독으로 돌아왔다. 금의환향한 세니의 제2의 축구인생은 이제 시작이다.

수비의 정석, ‘황제’ 프랑코 바레시 (Franco Baresi)

국적: 이탈리아
포지션: 중앙수비수
생년월일: 1960년 05월 08일
소속팀: AC밀란
통산기록: 719경기, 33골

바레시 AC밀란
프랑코 바레시는 로쏘네리 역사상 첫 영구결번의 주인공이다. ⓒ AC밀란 공식 홈페이지

인터밀란이 저지른 역사상 가장 큰 실수는 입단테스트에서 프랑코 바레시를 탈락시킨 것이었다. 프랑코는 15세 때 이미 유스팀에서 활약하고 있던 친형 주세페 바레시를 따라 인터밀란 입단테스트를 봤지만 탈락하는 아픔을 맛봐야했다. 결국 또 한 번의 입단테스트를 거쳐 AC밀란 유니폼을 입은 프랑코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977년 세리에A에 데뷔하며 위대한 전설의 서막을 알렸다. 이후 바레시는 AC밀란과 이탈리아의 빗장수비를 이끌며 세리에A 6회, UEFA 챔피언스리그 3회, UEFA 슈퍼컵 2회, 인터컨티넨탈컵 2회 우승과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우승,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3위, 1994년 미국 월드컵 준우승을 달성했다.

중앙수비수로는 단신(176cm)에 속했지만 바레시는 이를 훌륭한 위치선정 능력과 점프력으로 극복했다. 공만 빼내는 정교한 태클과 뛰어난 판단력으로 쉽게 파울을 저지르지 않았고 특히 대인방어에서 최고의 능력을 자랑했다. 게다가 달리기도 빨랐으니 공격수 입장에서 그를 뚫어내기란 마치 지옥과도 같은 일이었다. 바레시는 그야말로 수비의 정석이었으며 수비수를 꿈꾸는 어린 선수들에겐 최고의 롤모델이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에서는 한때 중앙수비수 열풍이 일기도 했을 만큼 바레시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다. 바레시는 1997년을 끝으로 로쏘네리의 유니폼을 벗었다. 이에 AC밀란은 그의 등번호 6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며 떠나는 황제의 마지막을 기렸다.

미스터 아스날, 토니 아담스 (Tony Adams)

국적: 잉글랜드
포지션: 중앙수비수
생년월일: 1966년 10월 10일
소속팀: 아스날
통산기록: 669경기, 48골

토니 아담스
아르센 벵거 감독은 토니 아담스를 향해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 아스날 공식 홈페이지

토니 아담스는 1980년 유소년 아카데미에 입단해 2002년 은퇴하기까지 평생을 아스날에서 뛰었다. 17살 어린 나이에 프리미어리그에 데뷔, 21살부터는 주장완장을 차고 경기에 나섰다. 아담스의 주장 선임은 당시에도 상당히 파격적이어서 대부분의 팬들은 어린 선수가 주장의 부담감을 극복하고 팀을 이끌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주변의 우려와 달리 아담스는 나이에 걸맞지 않는 리더십과 통솔력을 발휘했고 강한 신체를 활용한 터프한 수비와 리딩 능력으로 수비라인을 이끌었다. 당시 아담스와 리 딕슨, 스티브 보울드, 나이젤 윈터번으로 구성된 수비라인은 ‘철의 포백’이라 불리며 1992년 프리미어리그 출범 전까지 아스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아스날과 잉글랜드의 위대한 주장이었던 아담스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전설적인 명장 허버트 채프먼, ‘킹’ 티에리 앙리와 함께 홈구장인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앞에 동상으로 세워지는 영예를 누렸다. 비록 커리어 말미에 지독한 알코올 중독과 도박에 빠지면서 급격하게 폼이 하락했지만 라커룸과 훈련장에서 영향력을 발휘, 아스날에 프리미어리그와 FA컵 우승 트로피를 안겨주며 선수생활을 멋지게 마무리했다. 아담스는 지난 4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그라나다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지도자로서 제2의 축구인생을 살고 있다.

축구사 최고의 풀백, 파올로 말디니 (Paolo Maldini)

국적: 이탈리아
포지션: 좌측면 & 중앙수비수
생년월일: 1968년 06월 26일
소속팀: AC밀란
통산기록: 902경기, 33골

파올로 말디니
축구사에서 가장 위대한 수비수인 파올로 말디니는 아름다운 수비란 무엇인지 몸소 증명해보였다. ⓒ AC밀란 공식 홈페이지

파올로 말디니는 축구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비수다. 축구계 전설들이 뽑는 역대 베스트11에서도 그의 이름은 항상 거론된다. 더욱 놀라운 점은 말디니가 좌측면과 중앙에서 고른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다. 두 포지션에서 역대급 활약을 펼쳤던 말디니는 1978년 유소년 아카데미에 입단해 41세의 나이로 은퇴한 2009년까지 꼬박 32년을 AC밀란에서 뛰었다. 이기간 세리에A 7회, UEFA 챔피언스리그 5회(전신 유러피언컵 2회)를 포함해 메이저 대회에서 26차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클럽의 또 다른 레전드 프랑코 바레시와 함께 뛴 196경기에서는 단 23실점만을 허용하며 ‘통곡의 벽’으로 불렸다.

말디니는 피지컬적이고 터프한 수비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수비수였음에도 커리어를 통틀어 퇴장횟수가 단 두 차례에 그쳤다는 것은 이를 증명하는 대목이었다. 대신 아름다운 수비란 무엇인지 경기장에서 몸소 증명해보였다. 상대를 향해 시도하는 정확한 태클은 품격이 넘쳤으며 마치 한 마리 백조와 같이 우아했다. 말디니는 기술적으로도 월드클래스였다. 왼발과 오른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했고 화려한 드리블 기술 없이도 탄탄한 기본기를 활용해 쉽게 상대를 제쳐내고 전진했다. 말디니는 프랑코 바레시에 이어 AC밀란 역사상 두 번째 영구결번의 주인공이다. 말디니 가문은 축구계에서는 가장 유명한 가문이다. 아버지 체사레도 AC밀란의 전설적인 수비수로 활약했고 그 바통을 파올로가 이어받았다. 이들 가문에게만 허용된 등번호 3번은 이제 다음 세대인 다니엘이 이어받을 가능성이 크다.

리버풀의 경이로운 주장, 제이미 캐러거 (Jamie Carragher)

국적: 잉글랜드
포지션: 우측면 & 중앙수비수
생년월일: 1978년 01월 28일
소속팀: 리버풀
통산기록: 737경기, 5골

캐러거 리버풀
제이미 캐러거는 경기장에서 가장 말이 많은 선수였다.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온몸을 던져 수비했다. ⓒ 리버풀 공식 홈페이지

제이미 캐러거를 지도했던 유소년 코치는 “제이미는 라커룸과 필드에서 끊임없이 소리지치며 항상 동료들을 동기부여 시켰다. 경기를 읽는 눈도 탁월했다. 어려서부터 지도자의 자질이 있었다”고 말할 만큼 캐러거는 유소년 때부터 축구에 대한 독특한 생각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이클 오언과 함께 유스FA컵 우승을 이끈 뒤 1997년 리버풀 1군에 합류한 캐러거는 커리어 초반 수비형 미드필더와 좌우 풀백, 중앙수비수를 가리지 않고 소화하며 팀의 살림꾼으로 활약했다.

라파엘 베니테즈가 리버풀의 지휘봉을 잡은 이후 중앙수비수로 자리 잡은 캐러거는 이후 사미 히피아와 함께 훌륭한 호흡을 자랑하며 리버풀의 UEFA 챔피언스리그와 UEFA 슈퍼컵, FA컵 우승을 이끌었다. 캐러거는 전형적인 파이터형 수비수였다. 공을 잘 차진 않았지만 경기의 흐름을 잘 파악하며 영리하게 수비했고 집중력도 뛰어났다. 몸싸움을 피하지 않았으며 거친 플레이로 상대 공격수를 위축시켰다. 강한 열정과 의지로 웬만한 부상은 다 참고 뛰었다. 때로는 전사와 같이 때로는 헌신적인 수비로 팀 동료들의 사기를 높였다. 프리미어리그와 잉글랜드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최고의 수비수였던 캐러거는 현재 영국의 스포츠 전문매체 스카이스포츠에서 축구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괴물, 레들리 킹 (Ladley King)

국적: 잉글랜드
포지션: 중앙수비수 & 수비형 미드필더
생년월일: 1980년 10월 12일
소속팀: 토트넘
통산기록: 323경기, 15골

래들리 킹
래들리 킹이 부상에 시달리지만 않았더라면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비수가 됐을지도 모른다. ⓒ 토트넘 공식 홈페이지

1999년 더비카운티와의 리그경기에서 감격적인 1군 데뷔전을 치른 레들리 킹은 경기 후 왼쪽 무릎에서 뼈를 깎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결국 데뷔전에서 입은 무릎 부상은 킹의 커리어를 망쳐놓았다. 11/12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킹은 이후 자서전을 통해 무릎 상태에 대해 공개했다. “평생을 무릎부상으로 시달리던 나는 결국 2007년 미세골절술을 받았다. 하지만 그 수술이후 내 무릎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다. 뻣뻣함이 느껴졌고 반대쪽과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마치 로봇의 무릎을 갖고 뛰는 기분이었다”

무릎의 연골은 닳아서 거의 없었고 각도는 100도 이상 나오지 않았다. 팀 훈련조차 정상적으로 소화할 수 없어 특별 매뉴얼로 훈련하며 몸 상태만 겨우 유지시켰다. 전술 훈련이나 동료들과의 호흡을 맞추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지만 킹은 경기에 나설 때마다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뛰어난 예측력으로 패스길목을 사전에 차단했고 파울을 범하지 않고도 상대의 공을 뺏어냈다. 시도하는 태클은 대단히 깔끔하고 정교해서 태클을 당한 상대도 심판에게 항의하지 않을 정도였다. 킹이 무릎 부상으로 시달리지만 않았어도 존 테리나 리오 퍼디난드 둘 중 한명의 잉글랜드 대표팀 경력은 반토막 났을지도 모른다. 킹의 뛰어난 실력은 그를 향한 축구계 유명 인사들의 극찬을 통해 충분히 확인가능하다.

티에리 앙리: “그는 내 셔츠를 잡지 않고도 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비수였다”

해리 레드냅: “훈련을 할 수 없었음에도 리그 내 최고의 수비수였다. 그는 완벽한 괴물”

파비오 카펠로: “의심할 여지없이 킹은 잉글랜드 최고의 중앙수비수”

지니어스, 폴 스콜스 (Paul Scholes)

국적: 잉글랜드
포지션: 중앙미드필더
생년월일: 1974년 11월 16일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통산기록: 718경기, 155골

폴 스콜스
데이비드 베컴이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한 날, 선수들은 베컴을 둘러싸고 “최고의 마에스트로랑 뛰는 기분은 어땠어?”라고 물었다. ⓒ 프리미어리그 공식 홈페이지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 이 선수를 소개할 때면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다. 확실히 그랬다. 세계적인 선수들은 모두 입을 모아 폴 스콜스의 플레이를 극찬했다. 바르셀로나의 전설 사비 에르난데스는 은퇴 후 자신의 커리어에서 스콜스와 함께 뛰어보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운 일이었다고 밝혔으며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이 데이비드 베컴에게 다가와 스콜스 같은 선수와 함께 뛰는 기분은 어땠는지 물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데뷔 초 스콜스는 주로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공간을 찾아 들어가는 움직임이 좋아 작은 신장으로도 자주 헤딩골을 터뜨렸고 좁은 공간에서의 드리블, 강력한 슈팅 등 개인 능력도 훌륭했다. 02/03시즌에는 리그 14골을 포함해 모든 대회에서 20골을 터뜨리기도 했었다.

스콜스는 로이 킨이 십자인대 파열로 팀을 이탈한 97/98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컴퓨터같이 정확한 롱패스, 훌륭한 축구 센스와 조율 능력 그리고 강력한 중거리 슈팅까지, 유소년시절 이후 뛰어본 적 없었지만 오히려 포지션을 옮긴 뒤부터 월드클래스 자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비록 태클기술은 끔찍했지만 말이다. 2006년 스콜스는 시력에 문제가 생기면서 선수생활에 큰 위기를 맞기도 했었다. 이듬해 복귀했지만 완전히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실력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플레이의 완성도가 더욱 높아졌다. 복귀시즌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팀과 FIFA 월드베스트11에 이름을 올렸다. 2012년엔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간청으로 은퇴를 번복하고 팀에 복귀, 이후 한 시즌을 더 소화한 뒤에야 정들었던 맨유 유니폼을 벗으며 20년의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왼발의 마법사, 라이언 긱스 (Ryan Giggs)

국적: 웨일스
포지션: 측면미드필더 & 중앙미드필더
생년월일: 1973년 11월 29일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통산기록: 963경기, 168골

라이언 긱스
잉글리쉬 프리미어리그 역사의 궤를 함께한 라이언 긱스. ⓒ 프리미어리그 공식 홈페이지

맨유는 하마터면 라이언 긱스를 라이벌 맨시티에 빼앗길 뻔했었다. 웨일스 지역팀 Deans FC에서 뛰던 긱스는 팀의 코치 겸 맨시티 스카우터인 데니스 스코필드의 눈에 띄면서 맨시티 입단을 제안 받았다. 하지만 긱스의 집안은 대대로 맨유의 오랜 팬이었다. 특히 긱스의 할머니는 조지 베스트의 광팬이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Deans FC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던 긱스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당시 유소년 정식계약은 14세부터나 가능했다. 결국 퍼거슨은 긱스의 14번째 생일 아침에 계약서를 들고 그의 집을 가장 먼저 찾아간 끝에 그를 맨유로 데려올 수 있었다. 그렇게 1987년 맨유와 정식으로 유소년 계약을 채결한 긱스는 이후 2014년 은퇴하기까지 27년을 맨유를 위해 뛰었다. 이기간 프리미어리그 13회, FA컵 4회, UEFA 챔피언스리그 2회, FIFA 클럽월드컵 1회를 포함 메이저대회 트로피를 34번이나 들어 올렸다. 또한 긱스는 프리미어리그 최초로 올해의 영 플레이어상을 2회 연속 수상했다.

커리어의 하이라이트는 98/99시즌 아스날과 맞붙은 FA컵 4강전이었다. 당시 맨유는 프리미어리그 최초로 트레블을 노리고 있었다. 로이 킨의 퇴장으로 수적 열세에 빠졌던 맨유를 구원해낸 것은 긱스였다. 연장후반 5분, 센터서클에서 파트릭 비에이라의 패스를 가로챈 긱스는 질주를 시작했다. 40야드 이상을 전진하며 4명의 수비수들을 차례로 제쳐낸 뒤 데이비드 시먼 골키퍼의 머리위로 강력한 왼발 슈팅을 꽂아 넣으면서 맨유의 2-1승리를 이끌었다. 긱스는 이를 계기로 ‘왼발의 마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커리어 말미 기동성을 잃으며 잠시 위기설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옮겨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다. 신체적으로는 정상에 있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훌륭한 테크닉과 패스 센스, 빼어난 조율 능력으로 과도기의 맨유를 이끌었다. 은퇴 후 루이스 반할 사단에서 수석코치로 활동하다 무리뉴가 부임하며 맨유를 떠난 긱스는 최근 미들즈브러 차기 감독 후보에 오르는 등 지도자로의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최고의 테크니션, 매튜 르 티시에 (Matthew Le Tissier)

국적: 잉글랜드
포지션: 측면미드필더 & 공격형 미드필더
생년월일: 1968년 10월 14일
소속팀: 사우샘프턴
통산기록: 540경기, 209골

르 티시에
르 티시에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았다면 반드시 유튜브에서 그의 플레이 영상을 찾아보길 권한다. ⓒ 사우샘프턴 공식 홈페이지

1968년 영국 해협의 작은 섬 건지에서 태어난 매튜 르 티시에는 어릴 적부터 심하게 향수병을 앓았다. 처음에는 고향을 떠나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느꼈지만 영국 본토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축구리그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은 결국 그를 사우샘프턴으로 이끌었다. 1985년 사우샘프턴 유소년팀에 합류한 르 티시에는 곧바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듬해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그는 데뷔와 동시에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며 영국 축구계에 큰 충격을 선사했다. 양발을 똑같이 사용하는 드리블 기술은 화려하다 못해 눈부실 지경이었고 무엇보다 킥의 기술이 환상적이었다. 아웃사이드, 인프런트, 인스텝 슈팅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왼발도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르 티시에는 ‘그라운드 위의 모차르트’라는 별명을 얻었고 사우샘프턴 팬들 사이에서는 ‘르 갓’이라 불렸다. 말도 안 되는 골을 수시로 터뜨려 ‘원더골 장인’으로도 불렸다. 실제로 르 티시에는 이달의 골 3회와 올해의 골 1회를 수상하기도 했다.

르 티시에는 사우샘프턴에서의 경력은 누구보다 화려했지만 대표팀과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 대표팀만 가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잉글랜드 B팀에 속했던 르 티시에는 러시아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월드컵 출전을 기대했다. 하지만 결국 최종명단에 들지 못했는데, 르 티시에는 당시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했던 폴 게스코인의 존재를 자신이 스쿼드에 들지 못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폴 게스코인마저 최종명단에 들지 못한 것을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아야했다. 이후에도 사우샘프턴과 고락을 함께하던 르 티시에는 2002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 현재는 스카이스포츠에서 패널로 일하고 있다. 르 티시에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2011년 고향인 건지 섬 Guernsey FC의 명예회장으로 임명됐는데, 12/13시즌 팀의 일정에 문제가 생겨 경기에 나설 선수가 부족해지자 4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즉시 선수로 등록해 경기를 뛰었다. 르 티시에는 2015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빌바오가 만든 ‘원클럽맨 어워드’를 수상하며 진정한 원클럽맨으로 인정받았다.

로마의 황제, 프란체스코 토티 (Francesco Totti)

국적: 이탈리아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 세컨드 스트라이커
생년월일: 1976년 09월 27일
소속팀: AS로마
통산기록: 784경기, 307골

프란체스코 토티 AS로마
로마의 황제가 떠난다. 지난 3일 AS로마는 프란체스코 토티의 현역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 AS 로마 공식 홈페이지

로마의 한 10살 소년은 요한 바오로 교황과의 첫 만남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황님, 저는 커서 꼭 로마를 대표하는 훌륭한 축구선수가 될 거에요!” 그로부터 7년 뒤인 1993년, 그 소년은 AS로마의 유니폼을 입고 스타디오 올림피코에 발걸음을 내딛는다. 로마에서 교황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인물이며 로마가 가장 사랑하는 축구선수, ‘로마의 황제’ 프란체스코 토티의 이야기이다. 1989년 AS로마 유스팀에 입단한 토티는 3년 뒤 16살의 나이로 세리에A에 데뷔했다. 21살에는 팀의 상징인 10번 유니폼을 입었으며 이듬해 주장완장을 달았다. 토티는 발은 빠르지 않았지만 천재적인 축구센스와 놀라운 패스기술로 관중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특히 침투하는 동료를 향하는 정확하고 날카로운 원터치 패스와 골키퍼의 키를 넘기는 칩샷은 그의 전매특허 기술이었다.

레알 마드리드 회장은 그의 영입을 위해 매해 크리스마스마다 레알의 10번 유니폼과 친필 편지를 보냈지만 토티의 선택은 언제나 로마였다. 토티는 현대축구의 전술사에서도 한 부분을 차지한다. 몇 년 전 유행했던 ‘펄스나인’ 전술의 시초는 바로 토티였다. 2006년 당시 로마의 지휘봉을 잡았던 루치아노 스팔레티 감독은 공격수들이 줄부상을 당하자 토티를 ‘펄스나인’으로 활용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토티는 때로는 미드필더 자리로 내려와 침투하는 동료들에게 패스를 제공했고 때로는 스트라이커로 뛰며 직접 득점을 올렸다. 그해에만 리그 26골을 포함 모든 대회에서 32골을 기록했다. 그가 25년간 로마에서 뛰며 기록한 리그 통산 250골은 역대 세리에A 최다득점 두 번째에 해당한다. 지난 3일 로마의 단장은 구단을 통해 토티의 현역은퇴를 발표했다. 오직 로마만을 위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내걸었던 토티는 그라운드 위의 진정한 로맨티시스트다.

원조 카이저, 프릿츠 발터 (Fritz Walter)

국적: 독일(서독)
포지션: 스트라이커
생년월일: 1920년 10월 31일
소속팀: 카이저슬라우테른
통산기록: 411경기, 380골

프릿츠 발터
위대한 발터형제. 프릿츠(우)는 동생 오트마르(좌)와 함께 독일축구의 첫 황금기를 이끌었다. ⓒ 카이저슬라우테른 공식 홈페이지

클럽의 식당에서 근무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카이저슬라우테른 유스팀에 입단한 프릿츠 발터는 17살이던 1937년 1군에 데뷔했다. 당시 축구의 형태는 기술적으로나 전술적으로 덜 발달된 상태였음에도 발터는 발군의 기량을 뽐냈다. 창의적인 플레이로 상대를 유린했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팀을 이끌었다. 그는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와 스트라이커 포지션을 오가며 3년간 리그 41경기에서 무려 85골을 기록, 단기간에 카이저슬라우테른과 독일의 슈퍼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의 큰 소용돌이에 그의 축구인생은 위기에 처한다. 1942년 전선에 투입된 발터는 특출한 신체조건 때문에 공수부대로 차출됐다. 동부전선 투입 작전을 수행하던 도중 소련군을 만나 동료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후유증으로 발터는 평생을 비행공포증에 시달렸다.

발터는 1945년 종전이후 카이저슬라우테른으로 복귀했지만 동·서독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했다. 더군다나 FIFA의 징계로 독일은 4년간 국제무대에 참가할 수 없었다. 1950년 종전이후 처음으로 구성된 서독대표팀에서 주장을 맡은 프릿츠는 친동생 오트마르 발터, 제프 헤어베르거, 헬무트 란 등과함께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헸다. 그리고 결승에서 페렌츠 푸스카스, 산드로 코치시로 구성된 당대 최강의 팀 ‘매직 마자르’ 헝가리를 만나 3-2로 승리하며 독일에 역사상 첫 월드컵 우승을 안겼다. 이로 인해 발터는 독일 축구협회가 선정하는 ‘대표팀 명예의 주장’을 수상했다. 현재까지 이 명예는 단 5명만이 누렸다. 또한 유럽축구연맹(UEFA)은 2003년 설립 50주년을 맞아 각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를 한명씩 선정했는데 발터는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우베 젤러 등을 제치고 독일의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의 이름을 따 각 연령별 유망주들에게 주어지는 ‘프릿츠 발터상’은 현재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개인상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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