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울산전 중계를 기다렸던 이들은 이런 문자 중계로 경기 상황을 접해야 했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오늘 고민이 많았다. 최악의 미세먼지가 몰려오는 날 경기장에 가야하는지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방송 중계 편성표를 보고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 오늘 하루는 집에서 편하게 중계로 보자.’ 그리고 수원삼성과 울산현대의 KEB하나은행 2017 K리그 클래식 경기가 예정된 오후 2시에 를 틀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미국 프로야구가 방송 중이었고 이 경기는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7회가 진행 중이었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한 시간이 더 흘러도 경기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편성표를 잘못 봤나 싶어 다시 인터넷에 들어가 봤지만 편성표에는 분명히 오후 2시에 수원과 울산의 K리그 경기를 중계하기로 돼 있었다.

알고 봤더니 이 방송사에서 미국 프로야구 경기가 다 끝날 때까지 중계를 끊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황당한 건 이 경기에는 그 어떤 한국 선수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류현진이 나오는 경기도 아니었고 추신수가 출장한 경기도 아니었다. 방송 화면 위쪽의 자막을 보고는 더 기가 찼다. ‘마에다 선발 출전 경기’ 누군지 잘 몰라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한국계 일본인 정도 되려나 싶었다. 그런데 그냥 일본 야구선수였다. 일본 야구선수가 선발로 나서는 경기를 친절하게 자막까지 깔아주며 중계하는 것도 웃긴데 뭐 이거야 그들 사정이니 넘어간다고 치자. 왜 우리나라 선수가 뛰지도 않는 미국 프로야구의 일본인 선수 경기를 약속 시간 이후에도 계속 트는 건지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남의 나라 경기에 이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싶다. 그리고 더 황당한 건 2시 35분, 그러니까 수원과 울산의 K리그 경기가 시작되고도 35분 동안 이 방송사에서는 어떠한 안내 자막이나 설명도 없이 약속된 K리그 중계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처럼 미세먼지 때문에 경기장으로 찾아가는 걸 포기하고 중계를 기다린 이들에 대한 예의가 눈꼽 만큼도 없다. K리그와 미국 프로야구를 떠나 이 편성표는 시청자와의 약속이다. 그런데 이 편성표를 자기들 마음대로 어겨버리고 여기에 대한 어떤 양해나 공지도 없었다는 점은 시청자를 철저히 무시하는 행위다. 이 방송사는 K리그 경기 시작 35분 만에 ‘이 경기 종료 후 수원-울산전 중계가 이어진다’고 안내했다. 35분 동안 이 방송사는 중계를 기다린 시청자를 농락한 셈이다.

우리나라에 마에다 팬이 몇 번이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도 존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 프로야구를 적대시할 생각도 없다. 돈이 되니 중계하는 거라는 지긋지긋한 논리와는 무관한 이야기다. 단순히 시청자와 방송사의 약속이 깨졌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거다. 이미 약속된 수원과 울산의 K리그 중계를 보기 위해 이 시간에 약속을 마치고 일찌감치 집으로 향한 이들도 있을 것이고 일부러 약속을 늦춘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전날 술을 많이 마시고도 달콤한 숙취해소용 낮잠을 포기하고 텔레비전 앞에 앉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에 약속된 방송대신 남의 나라 경기를 중계한다? 이건 K리그와 미국 프로야구를 떠나 시청자를 우습게 아는 행동이다.

이 방송사는 2010년에도 일방적으로 K리그 중계 취소를 통보해 논란을 일으켰다.

나는 결국 전반 내내 포털사이트 문자 중계를 보고 있었다. 요새 축구게임 ‘FM’도 그래픽이 좋아 실제 경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2017년에 우리나라에서 실시간으로 열리는 경기를 ‘텍스트’로 보고 있다는 건 기가 찰 일이다. 한 팬은 경기장에서 인터넷 중계를 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안정환이 페루자에 갔을 때 문자 중계를 보며 밤을 지새우던 일이 생각났다. 2017년에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다.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남의 나라 야구를 틀어놓고 빨리 저 경기가 끝나 K리그가 중계되길 바라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이건 여자친구와 약속을 잡았는데 그 시간에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혼자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미드’를 보고 있는 꼴이다. 여자친구가 “나 라페스타에 와 있는데 너 왜 안와?”라는 메시지가 오면 처럼 이렇게 답해보자. “응. 나 이 ‘미드’ 좀 다 보고 나갈게. 넌 거기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어.”

더 화가 나는 건 이 다음이었다. 이 방송사는 어쩐 일인지 미국 프로야구 경기 중계라는 임무완수(?)를 포기하고 급하게 수원과 울산의 K리그 경기장으로 화면을 넘겼다. 그런데 이 순간 양 팀 선수들은 전반전을 마치고 라커로 들어가고 있었다. 도무지 미국 프로야구 중계를 끊고 K리그 경기장으로 화면을 넘길 시점이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중계가 미뤄졌고 어차피 후반전이 시작되려면 15분이 넘는 시간이 걸릴 텐데 방송사가 무슨 생각으로 미국 프로야구 중계를 부랴부랴 마무리한 뒤 K리그를 중계하는지 의아했다. 그런데 그들의 속내를 보고는 더 화가 났다. 곧바로 한 여자 리포터가 나와 해설진과 시답지 않은 스피드 퀴즈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반전을 통째로 날려 놓고 하프타임을 이용한 여자 리포터의 오락시간(?)을 아주 친절하게 방송하기 시작했다.

이게 가장 화가 나는 대목이다. 이 방송사는 여자 리포터와 해설진의 시답지 않은 아이돌 퀴즈가 가장 우선이고 그 다음이 남의 나라 야구 경기, 그리고 그 다음이 약속된 중계인 모양이다. 왜 시청자가 이런 저질스러운 콘텐츠를 봐야 하는가. 시청자인 내가 보고 싶은 건 울산이 전반전에 어떻게 두 골을 넣어 수원을 앞섰느냐는 분석이지 이런 술자리에서나 할 법한 아이돌 퀴즈가 아니다. 그런데 또 일부 단순한 팬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 방송사를 욕하다가 ‘갓’이니 뭐니 하며 여자 리포터에게 찬사를 보낸다. 방송사의 잘못이 ‘99’는 되지만 이렇게 시청자를 가지고 노는 방송사의 행동에 들고 일어나다가도 당장의 눈요깃거리에 또 다시 환호를 보내는 시청자도 ‘1’의 잘못은 있다. 이 방송사는 경기가 끝난 뒤에는 여자 리포터가 율동하는 모습을 리플레이까지 걸어 다리부터 훑었다. 이게 도대체 스포츠 전문 채널인가 무슨 여자 리포터 장기자랑 채널인가. 적당히 하자.

이 방송사의 K리그 중계 능력은 다른 방송사를 압도한다. K리그 스토리를 정확히 알고 때론 해외축구 못지 않은 중계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점은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이런 중계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시청자 알기를 우습게 알면서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깨버리고 그에 따른 안내 자막 한 줄 내보내지 않는 곳에서 질 좋은 K리그 중계 콘텐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도대체 일본인 야구선수가 나오는 남의 나라 야구가 뭔데 시청자와의 약속까지도 이렇게 무시하는 건가. 화가 난다. 더 얄미운 건 반쪽 짜리 후반전 중계 이후 경기가 끝날 때 나오는 그들의 아주 친절한 자막이다. ‘K리그가 좋다. 네가 좋다.’ 난 이렇게 약속 따위도 무시하는 이 방송사를 좋아해 본 적이 없다. 2010년에도 경기 이틀 전날 밤 돌연 일방적으로 K리그 중계 취소를 통보해 흥미로운 마지막 라운드에 찬물을 뿌렸던 이 방송사의 근본은 어디 안 간다.

footballavenue@sports-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