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방송 축구 해설 당시 김덕준 해설위원(왼쪽)과 전영우 캐스터(오른쪽)의 모습.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들을 위한 날이다. 그런데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이날 나는 과거의 한 인물을 소개하려고 한다. 어린이들을 위해 한 평생 희생하고 헌신하면서도 그 열정에 비해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있는 한 훌륭한 축구인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유소년 축구의 효시라고도 할 수 있는 김덕준 선생에 관한 이야기다. 어린이날을 맞아 한국 축구와 어린이, 이 둘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김덕준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이런 훌륭한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어린이날이 더 빛나는 것 아닐까. 지금부터 김덕준 선생의 유소년 축구에 관한 감동적이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소개하려 한다.

국제심판에서 어린이 축구 대부로 변신한 남자

1918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김덕준은 6살 때 캐나다 선교사 덕분에 처음 축구를 접하게 됐다. 함흥 영생중에 진학해 함흥 대표로 선정되기도 했고 이후 연희전문에 진학해서는 조선대표팀이라고 할 수 있는 전경성축구단에 뽑히기도 했다. 꽤 유명한 선수였던 그는 1945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고 이후 심판 공부를 시작했다. 1946년 심판으로 데뷔한 그는 1951년 김화집, 배종호, 김성간, 이유형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국제 심판이 돼 그 꿈을 이뤘다. 심판 시절 그는 대쪽 같은 판정으로도 유명했고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심판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 때는 멕시코와 헝가리 경기의 주심을 봤다.

무려 20년 동안 심판으로 1천여 경기나 치른 그는 1966년 가을 심판복을 벗었다. 50세의 문턱에 그가 심판을 그만두자 아내와 아이들은 남편과 아버지가 돌아왔다고 반겼다. 국가대표까지 지내고 실업팀 코치를 하면서 국제심판으로 아시아인 최초 공로상 수상자가 됐으니 축구인으로서 이룰 건 다 이룬 그가 남은 생은 편히 보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때부터가 바로 그의 인생 하이라이트였다. 그는 심판으로 재직하며 1965년 서독으로 유학을 갔던 시절 서독의 유소년 축구 현장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국 축구의 백년대계는 어린이 축구에 있다. 심판을 그만두면 꼭 어린이를 위해 무언가 해보자.’ 심판을 그만둔 그는 곧바로 어린이를 위한 축구교실 설립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곧바로 지인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덕준 선생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축구인은 없었다. 그렇게 심판직에서 은퇴하고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협회를 비롯한 다른 축구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김덕준 선생의 손을 잡아주는 이는 없었다. 결국 1969년 4월 김덕준 선생은 ‘어떻게든 한 번 운영해보자’는 심정으로 혼자 축구교실을 열었다. 그나마 서울 종로에 있는 효제국민학교 박재규 교장이 도와줘 축구를 할 수 있는 공간만 마련한 것이었다. 당시 박재규 교장은 김덕준 선생의 딱한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학교 유리창이 다 깨져도 좋으니 아이들과 마음껏 운동장을 쓰세요.” 김덕준 선생은 그렇게 혼자의 힘으로 어린이를 위한 축구교실을 마련했다. 일요일마다 여는 이 축구교실의 이름은 ‘일요축구교실’이라고 지었다. 아이들에게 단 한 푼의 회비도 받지 않고 사정이 딱한 어린이도 함께 축구를 즐기자는 취지였다.

자비를 털어 연 어린이 축구교실

“축구 묘목을 기르는 심정으로 축구 한국의 내일을 어린이들에게 걸자.” 김덕준 선생의 철학이었다. 하지만 걱정이 많았다. ‘한 30명 정도만 와도 대성공이다.’ 일요일에 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축구교실을 찾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 수업 날인 1969년 4월 20일 아침 9시 효제국민학교 운동장에 도착한 김덕준 선생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려 70여 명의 어린이들이 김덕준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성황이었다. 김덕준 선생은 신나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감당할 수가 없어 중앙고 선수 세 명과 아들 두 명도 함께 나와 학년별로 어린이들을 지도했다. 결국 네 번째 일요일, 그러니까 일요축구교실이 열린지 한 달 만에 축구를 배우겠다는 어린이들이 무려 200명까지 늘어나 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일찌감치 접수를 마감해야 했다.

물론 김덕준 선생은 어린이 회원이 늘어난다고 해 돈을 버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출만 늘어났다. 김덕준 선생은 자비를 털어 축구공을 사고 코치로 일하는 대학 선수들에게도 자비로 레슨비를 댔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가난한 어린이들에게는 손수 20원씩의 차비까지 쥐어줬다. 이렇게 매 회 수업을 할 때마다 무려 4천 원의 돈이 들었다. 지금 물가로 치면 한 번 수업에 100만 원은 족히 든 셈이다. 한 번은 폭우가 쏟아지는데 무려 70여 명의 어린이가 축구 수업을 하겠다고 몰린 적도 있다. 결국 축구교실을 열지는 못했지만 김덕준 선생은 이날 70여 명의 어린이에게 자비를 털어 빵 한 개씩을 나눠주고 돌려보냈다. 김덕준 선생은 이렇게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1970년 7월에는 청각장애 어린이와 시각장애 어린이를 위한 수업도 따로 열기 시작했다.

혼자 국민학교 앞으로 가 선수들을 모집하기도 했다. “이번 주 일요일에 약속 없지? 효제국민학교로 아침 9시 반까지 나와. 축구 가르쳐 줄게.” 1970년 일요축구교실은 서울 시내 국민학교 60개교에서 300여 명이 참여할 정도로 커졌다. 어린이들과 더 오래 축구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돈이 필요해 좋아하던 술과 담배까지도 끊었다. 겨울이 되면 가난한 아이들은 변변한 내복이나 신발도 없이 축구교실로 달려왔는데 그럴 때면 김덕준 선생이 연습이 끝나는대로 동대문 시장에 가 장갑과 양말, 귀마개 등을 사 나눠주기도 했다. 김덕준 선생의 수입은 그가 매주 한 번씩 진행하는 서울외국인학교 코치 레슨비와 동아방송 축구해설료가 전부였다. 20년 간 한 호텔에서 잡일을 한 아내의 많지 않은 수입으로 가정을 꾸리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는 일요축구교실을 포기하지 않았다.

김덕준 선생이 축구 기본기를 알리기 위해 쓴 책

선생이 어린이 축구교실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심판 제의가 오기도 했고 미국 대학에서도 코치로 오길 바랐지만 김덕준 선생은 어린이 축구를 위해 이를 거절했다. 가세가 기울어 축구교실 창단 6년 만인 1975년에는 창신동 집을 팔고 더 작은 사당동 집으로 이사를 가야했지만 그는 어린이 축구교실을 포기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와 맞물린 연말이 되면 6학년생의 수료식을 열었는데 최우수상과 우수상 등 다양한 상을 만들어 대부분의 어린이들에게 자비로 트로피와 축구화, 축구공을 선물했다. 축구를 잘했다고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상을 받고 뿌듯해 할 아이들을 위한 배려였다. 또한 시합 도중 다친 아이들을 위해 침술까지 배울 정도였고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필요한 축구공도 하루에 200여개에 달하자 각 실업 팀을 돌아다니며 헌 공을 모으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 때면 혹시나 하고 복권을 살 정도였다.

김덕준 선생의 일요축구교실은 각 학년별로 독특한 팀명이 있었다. 홍길동 팀, 아폴로 팀, 마린보이 팀, 요괴 팀 등이 어린이들이 뛰는 팀의 이름이었다. 어린이들의 실력도 일취월장해 초등학교 1학년 팀인 마린보이 팀이 어머니 팀을 이기기도 했고 초등학교 6학년 요괴 팀도 아버지 팀과 무승부를 거둘 정도로 실력도 늘었다. 김덕준 선생은 이 어린이들의 소속감을 심어주기 위해 유니폼을 맞춰 선물하기도 했는데 연습경기가 열리면 국제 심판 출신답게 심판 역할까지도 수행했다. 그러다가 한 팀이 약한 경기력에 그치면 그 팀의 코치 겸 심판이 되는 재미있는 상황도 연출됐다. 하지만 성인 대표팀이 실망스러운 경기를 하면 축구교실에 나오는 어린이가 확 줄었다. 아이들이 ‘아무리 축구를 열심히 해도 우리는 잘 할 수 없다’고 낙담한 것이다. 그러면 김덕준 선생은 국민학교를 돌며 사과했다. “우리 축구가 잘못한 건 내가 잘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린이들을 다시 운동장으로 불렀다.

김덕준 선생이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어린이들과 함께 한 이유는 유소년 육성이 한국 축구의 희망이라는 거창한 목표 외에도 아이들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한 여름에 한 아이가 사이다와 아이스크림을 건네며 김덕준 선생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꼭 선생님이 기대하시는 훌륭한 선수가 될게요.” 그리고 이 아이는 버스비가 없어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이 모습을 본 김덕준 선생은 아이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중랑교 근처에서 효제국민학교까지 축구를 하기 위해 걸어오는 어린이도 있었고 행상일을 하는 홀어머니를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 “어떻게 해서라도 꼭 국가대표가 되겠다”고 눈물을 글썽이는 어린이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김덕준 선생은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른 사람, 공부하는 사람이 된 후에 스포츠를 하자.” 그는 늘 일요일마다 가장 먼저 운동장에 나와 어린이들을 위해 돌을 고르고 손수 경기장 라인을 그렸다.

김덕준 선생이 축구 기본기를 알리기 위해 쓴 책

김덕준 선생, 소파상을 받다

김덕준 선생에게 간간이 지원금이 들어오기는 했다. 그런데 그럴 때면 그는 이 돈도 어린이들을 위해 썼다. 한 번은 대한축구협회에서 많지 않은 지원금이 들어왔는데 이 돈으로 펠레의 축구 기본기를 담은 영화 필름을 어렵게 구해 어린이들에게 보여줬다. 부유한 일본 유소년 팀은 자비를 들여 한국을 다섯 번이나 방문해 경기를 했는데 김덕준 선생이 운영하는 일요축구교실은 일본의 초청을 받고서도 단 한 번도 일본에 갈 수 없었다. 상황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김덕준 선생은 자신을 원망했다. “내가 더 능력이 있으면 우리 어린이들이 더 풍족하게 축구를 할 수 있을 텐데 내가 너무 부족해 미안하다.” 효제국민학교에서 늘 열던 일요축구교실은 1981년부터 미동국민학교로 옮겨져 계속 이어졌다.

김덕준 선생은 1981년 일요축구교실을 열어 무려 5만여 명에 가까운 어린이들을 위해 노력한 대가로 대한민국 체육상 공로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63세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도 김덕준 선생은 겸손했다. “10년 동안 10만 명의 어린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는 것이 목표였는데 아직 절반도 안 됐다. 이 목표를 이뤄야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이듬해인 1982년 11월에는 제26회 소파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덕준 선생은 늘 이야기했다. “절대 이 선수들에게 결과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평소에 열심히 배우면 결과가 좋으리라는 축구 철학 때문이다. 또한 펠레와 베켄바우어가 특정한 나라에서만 태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도 그런 선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조병득, 김종환, 강신우, 이강석 등 국가대표 선수들이 김덕준 선생이 배출한 제자다.

김덕준 선생은 1969년 처음 어린이들을 위한 축구교실을 열어 매주 일요일마다 어린이들과 만났다. 1985년까지 무려 16년 동안 7만여 명의 어린이들이 김덕준 선생의 손길을 거쳐 갔다. 1985년 이 축구교실이 문을 닫았고 김덕준 선생이 1987년 2월 숙환으로 작고하면서 10만 명의 어린이에게 축구를 가르치겠다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김덕준 선생은 많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고 떠났다. 김덕준 선생에게 처음 축구를 배우며 국가대표의 꿈을 키웠던 강신우 전 서울대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 운동이 끝나면 선생님께서 늘 버스타고 가라고 아이들에게 20원씩 다 나눠 주셨어요. 집이 가까운 녀석들은 그걸 받아서 ‘하드’를 사먹었죠. 그 20원씩 받는 맛에라도 늘 축구를 하러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축구를 시작해 국가대표까지 하게 됐어요. 선생님은 지금의 한국 축구를 위해 씨앗을 뿌리신 분입니다.”

어린이날에 가장 잘 어울리는 멋진 어른

지금이야 한국 축구 유소년 육성에 대해 다들 중요성을 공감하지만 1960년대부터 유소년 축구에 관심을 갖고 한국 최초의 어린이 축구교실을 만든 김덕준 선생의 이야기는 오늘 많은 이들에게 큰 메시지를 던진다.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어린이를 위한 날이지만 어린이를 위해 헌신하고 열정을 다했던 이들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이런 훌륭한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꿈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한국 축구와 어린이를 위해 오랜 시간 헌신한 김덕준 선생에게 늦었지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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