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서울과 FC안양은 내일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맞대결을 펼친다. ⓒ FC서울, FC안양 제공

한국 프로축구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흥미진진한 경기가 펼쳐진다. 안양LG가 서울로 연고 이전을 한 뒤 어렵게 다시 창단한 FC안양, 그리고 이제는 K리그를 대표하는 빅클럽으로 성장한 FC서울이 역사상 첫 맞대결을 펼칠 예정이다. FC서울과 FC안양은 바로 내일(19일) 저녁 7시 30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2017 KEB하나은행 FA컵 32강 외나무다리 승부를 펼친다. <스포츠니어스>에서는 이 역사적인 맞대결을 앞두고 이 경기에 관한 연속 특집 기사를 준비했다. 이 한 경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스토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FC서울과 FC안양은 물과 기름의 관계다. 절대 엮일 수 없는 관계다. 하지만 안양LG와 FC서울, 그리고 FC안양을 유일하게 모두 겪은 단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이 세 팀에서 선수로 모두 활약한 유일한 인물, 한동원이다. 안양LG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상황에서 이 세 팀을 모두 경험한 선수는 더 이상 나올 수 없다. 오로지 한동원만이 이 복잡한 역사의 유일한 주인공이다. 더 흥미로운 건 안양LG는 한동원에게 프로선수로서의 첫 기회를 준 팀이고 FC서울은 전성기를 함께 한 팀이면서 FC안양은 선수 생활의 마무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 팀이라는 점이다. 한동원에게 안양LG와 FC서울, 그리고 FC안양은 각각 어떤 의미일까. FC서울-FC안양전을 앞두고 가장 주목 받아야 할 그에게 직접 물었다. 지금부터 한동원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안양LG 시절 한동원(밑에서 오른쪽 네 번째)은 K리그 최연소 출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한동원 제공

안양LG - 키워드1. ‘수원’ 

“내 고향은 수원이다. 수원 율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수원중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당연히 수원삼성에 입단하는 게 순리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원삼성 경기장에서 볼보이를 하며 수원에서 뛰는 꿈을 꿨다. 이후 수원시장이 된 김용서 당시 수원시축구협회장도 나에게 ‘수원삼성에 무조건 와야 한다’고 했다. 훗날 수원삼성 단장을 지낸 오근영 당시 수원삼성 사무국장도 ‘수원삼성에만 오면 축구화를 트럭으로 가져다 주겠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남수원중학교 시절 수원삼성에서 일본으로 연수도 보내줘 세레소 오사카와 경기를 한 적도 있다. 나는 수원 사람이었고 당연히 수원삼성에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 안양LG에서 먼저 영입 제안을 보내 왔다. 과거 안양LG 감독을 했고 당시에는 안양LG 고문으로 있던 박병주 선생님이 내 경기를 보고는 ‘계약하자’고 찾아 오셨다.”

“수원삼성 김호 감독과 수원시축구협회에 이 사실을 말했더니 그쪽에서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수원 사람이 수원삼성에 와야지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하셨다. 그때 수원삼성에서는 신영록과 이강진을 뽑아갈 때였다. 그런데 안양LG는 입단 테스트 없이 바로 계약을 하자는 입장이었고 수원삼성은 입단 테스트를 하고 합격하면 계약하자는 입장이었다. 입단 테스트를 받은 뒤 계약에 실패하면 타격이 컸기 때문에 나로서는 안양LG가 더 끌렸다. 그래서 안양LG와 계약을 맺었는데 수원에서 복수 아닌 복수를 했다. 원래 남수원중학교가 수원삼성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유니폼 지원도 끊어 버렸고 수원시에서도 내가 대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수원의 배신자’ 소리를 많이 들었다. 김용서 시장이 인사도 받아주지 않더라. 수원 출신이면서도 안양LG로 가면서 그렇게 욕도 많이 먹었다. 2002년 그때 나이가 16살이었다.”

안양LG - 키워드2. ‘최연소’ 

“환경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당시 구리 챔피언스파크는 프로야구 LG트윈스 선수들과 함께 썼었는데 라커룸과 샤워실이 컨테이너 박스에 있었다. 훈련장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구리 시내 아파트 몇 채를 얻어 선수들이 합숙을 했다. 하지만 안양LG는 나에게는 좋았던 기억만 많은 곳이다. 그때 내가 쓴 역사가 아직도 깨지질 않고 있다. 2002년 5월 1일, 날짜도 정확히 기억한다. 아디다스컵 울산현대와의 경기였다. 당시에는 90분 동안 승부가 나질 않으면 연장전도 했고 승부차기까지 이어지는 규정이 있었는데 내가 연장 전반전이 시작하면서 교체 투입됐다. 그때 내 나이가 만 16세 25일이었는데 K리그 역대 최연소 출전 기록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경기는 무승부 끝에 승부차기에서 졌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도 이 최연소 출전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고등학생 선수들이 K리그에 나서질 못하니까 이 기록이 깨지기는 상당히 힘들 것이다.”

“만 16세 선수가 프로 무대에 데뷔한다는 건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인데 ‘한국 축구가 발전하려면 어린 선수가 경기에 나서야 한다’면서 조광래 감독이 기회를 주셨다.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아직도 안양LG 시절 안양종합운동장의 풍경이 생생히 기억난다. 내가 입단한 첫 해 2002년 한일월드컵이 열렸는데 안양종합운동장이 늘 만원 관중이었다. 사람들이 자리가 없어 계단에 앉아 경기를 볼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붉은색 안양LG 유니폼을 입고 응원했던 서포터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늘 서포터스도 많았다. 당시 수원삼성과의 라이벌전도 대단했다. 수원삼성과 경기를 앞두고 있으면 다른 경기보다 더 긴장하고 집중했다. 선수들도 라이벌 의식이 있었고 안양LG 조광래 감독과 수원삼성 김호 감독의 관계도 복잡했다. 조광래 감독이 수원삼성에서 김호 감독과 함께 하다가 안양LG로 넘어왔는데 관계가 좋지만은 않았다. 여기에 서포터스도 서로 얽혀 있으니 수원삼성전은 늘 전쟁이었다. 승리 수당도 그날은 구단에서 두 배로 올려주는 경우도 많았다. 안양LG 소속으로 수원삼성과 격돌하는 날은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이었다.”

안양LG 시절 한동원(밑에서 오른쪽 네 번째)은 K리그 최연소 출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한동원 제공

FC서울 - 키워드1. ‘우승’ 

“2004년 1월 전지훈련 중이었는데 언론 보도를 접했다. ‘안양LG가 서울로 연고이전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문을 보니 안양LG 팬들은 연고 이전 반대 서명 운동을 하고 LG 제품 불매 운동을 하고 있었다. 선수들도 구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훈련 도중 언론을 통해 우리가 서울로 연고를 옮긴다는 확정 보도를 접했다. 선수가 관여할 수는 없는 부분이었는데 아무래도 구단에서는 서울로 옮기는 게 더 많은 이득이 있다고 생각해 그런 결정을 내린 것 같다. 하지만 선수들에게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원래 숙소가 경기도 구리에 있었고 안양LG 시절에는 홈 경기 전날 워커힐 호텔 근처에 있는 한강 호텔에서 하루 자고 안양종합운동장으로 갔다. 그런데 서울로 연고지를 옮긴 뒤에도 숙소는 똑같은 구리였다. 경기 전날 한강 호텔이 아니라 상암 부근 호텔에서 하루 자는 것과 홈 경기장이 안양이 아니라 서울이었다는 점만 바뀐 것이다. 팀 이름이 안양LG에서 FC서울로 바뀌었지만 우리가 느끼는 건 별로 없었다.”

“FC서울 때에도 50평 짜리 아파트 네 채에서 선수들과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2005년에 챔피언스파크에 2층짜리 건물을 지어 숙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선수들도 FC서울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 같다. ‘서울에서 뛰고 싶다’거나 ‘서울은 어떤 팀이냐’고 묻는 주변 친구들도 많아졌고 청소년 대표를 거친 안태은, 심우연 등 좋은 선수들도 데려왔다. 서울의 선수 구성은 정말 좋았고 팬들도 열정적이었다. 아무래도 서울을 연고로 하는 팀이다보니 관중도 많이 찾아오고 관심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내 전성기도 시작됐다. 2005년까지는 주로 2군리그에서 뛰다가 2006년도에 1군 경기에 21번이나 나가 5골을 넣었다. 안양LG가 나를 데뷔시킨 고마운 팀이라면 FC서울은 나의 전성기를 이끈 팀이다. 2006년에는 FC서울이라는 이름을 달고 리그컵에 참가해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나에겐 남다른 의미가 있는 팀이다.”

FC서울 - 키워드2. ‘전성기’ 

“FC서울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2006년 5월 27일 제주유나이티드와의 삼성 하우젠컵이었다. 당시 FC서울의 박주영, 김동진, 백지훈 등 좋은 선수들이 2006년 독일월드컵을 준비하며 빠지게 됐고 이장수 감독이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줬다. 우리가 하우젠컵에서 4연승 중이었고 제주는 3연승 중이었는데 이 경기가 승점 6점짜리 승부였다. 이장수 감독도 ‘오늘 이겨서 더 치고 올라가자’고 우리를 독려했다. 비가 오는 날이었고 서포터스가 홍염을 터트려 경기장이 연기로 가득 차 중단돼 후반 추가 시간이 4~5분 정도 주어졌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후반 49분에 내가 히칼도의 프리킥을 결승골로 연결하며 1-0 승리를 따냈다. 서울 시절 가장 잊을 수 없는 경기가 이 경기였다. 지금도 가끔 이때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에게 있어서는 평생 기억에 남을 경기다.”

“안양LG 시절 팬들의 분노도 그대로 기억한다. 직접적으로 선수들을 향해 해를 가하지는 않았지만 특히 부천에서 연고를 옮긴 제주와 경기를 할 때면 욕도 많이 먹었고 우리를 비판하는 걸개도 많이 봤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LG와 SK는 연고이전한 쓰레기 같은 팀’이라는 내용이었다. 선수 입장에서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컸다. 안양LG 시절 팬들이 연고이전 결정 이후 대한축구협회에 가서 누워 울면서 항의하는 모습을 신문으로 봐 안타까움은 당연했다. 나에게 있어 16세 때 프로 무대 데뷔 기회를 준 안양LG를 떠나게 됐다는 점은 아쉬웠지만 한편 FC서울 선수가 돼 전성기를 맞이하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는 점도 솔직히 부인할 수는 없다. 연고이전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계속 안양LG로 남았더라면 환경이 달랐을 테니 내가 그만큼 활약하고 주목받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안양LG 시절 한동원(밑에서 오른쪽 네 번째)은 K리그 최연소 출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한동원 제공

FC안양 - 키워드1. ‘고향’ 

“이후 성남일화, 대구FC, 강원FC 등을 거친 뒤 2013년 에이전트로부터 연락이 왔다. 안양LG 연고이전 이후 절치부심해서 창단한 K리그 챌린지 FC안양이 나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성남일화 시절 함께 했던 김학범 감독과 강원FC에서도 함께 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사실 계약상 팀을 옮기지 않았어도 됐다. 지금이야 1,2부리그에 대한 개념이 많이 사라지고 있지만 처음 승강제가 실시되고 K리그 챌린지로 내려가는 것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K리그 챌린지에 가 잘하면 좋지만 원하는 경기력이 나오지 않을 경우 ‘이제는 K리그 챌린지에서도 안 통한다’라는 말을 들을 게 뻔했다. 그런데 예전에 안양LG 팬들과 마주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중에 기회 되면 안양으로 꼭 돌아가겠습니다’라고 했던 적이 있는데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2013년 7월 임대 신분으로라도 FC안양에 가겠다고 에이전트와 김학범 감독께 말씀드렸다. 강릉에서 버스를 타고 수원 집에 들렀다가 안양으로 향하는데 고향으로 가는 느낌이었다.”

“걱정도 있었지만 설렘도 있었다. 첫 프로 생활을 시작한 10년 전 그곳에 다시 돌아가니 마치 16살 때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첫 훈련을 안양종합운동장에서 했는데 2003년 연고이전 이후 딱 10년 만에 그 경기장에 간 것이었다. 그런데 경기장이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거다. 지금이야 앞에 펜스도 설치하고 가변석도 있지만 2013년에는 그런 것도 없이 신기할 정도로 10년 전 모습과 똑같았다. ‘내가 진짜 돌고 돌아 다시 안양종합운동장에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적하고 팬들에게 인사하러 가는 자리에서 몇몇 분들이 ‘저 배신자 X끼는 왜 여기에 다시 왔느냐’고 하셨다. 옆에 계신 팬들이 ‘그러지 말자’고 말렸지만 아마도 그 분들은 연고이전에 대한 상처를 많이 받으셨던 것 같다. 그때는 욕을 먹는 게 화가 난다기 보다는 슬펐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 뿐이었다.”

FC안양 - 키워드2. ‘기억’ 

“내가 연고를 옮기고 싶어서 옮긴 건 아니고 선수는 어쩔 수 없이 구단의 방침을 따라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그날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의 글을 썼다. ‘가슴이 아프다. 잘못한 게 있으면 사과드리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안양에 돌아온 뒤 감동적이었던 순간도 많았다. 2013년 9월 1일 10년 만에 다시 안양종합운동장에서 경기에 나섰다. 그날도 후반에 교체로 투입됐는데 마치 16살 때 그 느낌 그대로였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뒤 FC안양 팬들이 식당을 예약하고 나를 초대했다. 안양에 돌아온 걸 환영한다는 의미였다. 그날 식사를 마치고 팬들이 사인을 해달라고 해 고마운 마음으로 사인을 해드렸는데 팬들이 대뜸 그러시는 거다. ‘어? 사인이 바뀌었네요?’ 10년 전에 나에게 받은 사인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팬이었다. 감동적이었다. 10년 전에 경기장에서 만났지만 여전히 얼굴이 기억나는 팬들도 있었다.”

“FC안양으로 옮긴 뒤에도 부상을 당해 많은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다. 앞서 언급한 경기를 포함해 딱 두 경기에 나선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때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2013년 8월 25일 충주험멜과의 원정경기에 나섰는데 내가 공을 차단해 두 번째 골이 시작됐다. 그날 3-1로 이긴 뒤 충주까지 원정을 온 FC안양 팬들 앞에서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뭉클했다. FC서울 시절 수천 명이 외치는 내 이름보다 백 명도 채 되지 않는 FC안양 팬들의 외침이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록 많은 원정 팬은 아니었지만 수천 명 이상의 함성이었다. 몇 주 전 ‘왜 배신자 X끼가 여기 왔느냐’고 했던 그 분들이 외쳐주시는 거라 더 뭉클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2013년에는 FC안양이 그리 사정이 좋지 않아 일주일에 두 번만 천연잔디에서 훈련을 하고 나머지는 인조잔디에서 훈련을 했다. 작은 원룸을 숙소로 잡아 빨래도 선수들이 직접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처음 프로 무대를 경험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어 기뻤다.”

안양LG 시절 한동원(밑에서 오른쪽 네 번째)은 K리그 최연소 출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한동원 제공

안양LG와 FC서울 그리고 FC안양

“비록 지금은 일 때문에 지방에 와 있어서 경기장에 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다. 요즘에는 수원에서 초등학생과 중학생 개인 레슨을 하며 다음 달 지도자 자격증 수업을 준비하고 있다. 자격증을 따면 지도자로 일 할 수 있는 팀을 알아보려고 한다. 이미 FA컵 대진표가 나왔을 때부터 이 경기를 기다려 왔는데 경기장에 갈 수 없어 아쉽다. 언론에서 FC안양이 호남대만 이기면 FC서울과 붙는다는 보도가 나와 관심 있게 지켜봤다. 아마 내일 경기는 전쟁이 될 거다. FC서울에는 안양LG 시절을 겪어본 선수가 없다. FC서울 선수들은 아마 다른 여러 경기 중 한 경기처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FC안양 선수들은 연고이전 상황을 잘 알고 서포터스의 마음을 잘 아니까 죽기 살기로 덤빌 것이다. 안양LG와 FC서울, 그리고 FC안양을 모두 경험한 선수로서 이 경기가 너무 기대되고 떨린다.”

“아마 상대에 도발하는 걸개도 많이 내걸릴 거 같다. 경기가 끝나고 양 팀 팬들이 충돌하거나 폭력 사태를 일으키는 불상사는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FC서울에서 전성기를 맞았고 행복하게 축구를 할 수 있었다. 요즘 FC서울 성적이 좋지 않은데 팬들이 선수들에게 많은 응원을 보내줬으면 좋겠다. 내가 몸담았던 팀이어서 애정이 크다. 그리고 안양은 내가 16살 때 처음 입단해 꿈을 키웠던 곳이다. 추억이 많다. FC안양도 당연히 응원한다. 지금은 K리그 챌린지에 있지만 언젠가 K리그 클래식으로 올라가 FC서울과 더 자주 격돌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이 경기가 K리그 흥행을 이끄는 최고의 스토리를 담고 있으니 FC안양이 K리그 클래식으로 승격해 FC서울과 붙을 일이 많아져야 한다. 내가 K리그에서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했던 안양, 그리고 전성기를 누렸던 서울 모두 응원한다. 내일 경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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