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팬들은 11년 만에 다시 고양종합운동장으로 돌아왔다. ⓒ맥파이 기자단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2006년 11월 26일 고양종합운동장은 뜨거웠다. 내셔널리그 고양국민은행과 김포할렐루야가 K리그 승격 자격을 놓고 챔피언결정전 2차전을 치렀기 때문이다. 김포에서 열린 1차전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한 두 팀은 이 한 경기를 통해 K리그로 가는 총력전을 펼쳐야 했다. 당시 2차전 경기에서 고양국민은행은 2-1로 승리를 따내며 K리그 승격의 영광을 누리게 됐다. 이 경기가 열린 고양종합운동장은 관심이 덜한 내셔널리그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만여 명의 관중이 찾았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자랑했다. 고양종합운동장을 찾은 이들은 이듬해부터 고양시민을 위한 팀이 K리그에서 뛰게 됐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고양종합운동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

하지만 이 경기가 끝이었다. 고양국민은행은 승격을 거부했고 그들을 응원하던 서포터스 ‘보레아스’의 목소리도 더 이상 고양종합운동장에서 들을 수 없었다. 승격하면 K리그로 가겠다던 약속을 깬 구단에 대해 서포터스는 응원 보이콧을 선언했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따금씩 고양국민은행에 항의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는 이들도 있었고 조용히 경기장 한 구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도 있었다. 누군가는 축구와 담을 쌓고 생업에 매진했다. 그리고 이들 중 진짜 고양시민을 위한 구단을 갈망하던 이들은 2008년 3월 고양시민축구단 창단에 힘을 보탰다. ‘보레아스’라는 이름 대신 ‘울트라스 맥파이’라는 이름의 서포터스로 변신했지만 구성원은 대다수가 고양국민은행 시절부터 함께 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내셔널리그에서도 부자 구단에 속했던 고양국민은행과 달리 고양시민축구단은 가난했다. 출범 첫 해인 2008년에는 K3리그 15개 팀 중 꼴찌를 했고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K3리그에서도 가장 약체로 손꼽혔다. 물론 A매치를 치를 수 있는 고양종합운동장도 그 더 이상 그들의 홈 구장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조잔디에 환경도 부족한 고양 어울림누리 별무리구장을 홈으로 사용해야 했다. 경기가 있는 날에도 인근 주민들이 트랙에서 조깅을 할 정도로 경기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양종합운동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사용료가 워낙 비쌌기 때문에 열악한 구단 사정상 번듯한 고양종합운동장을 쓴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양시민들을 위해 탄생한 팀이지만 그들은 최신식의 41,311석짜리 경기장 대신 2,425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라한 곳에서 생활했다. 고양시에 좋은 경기장이 있지만 고양시민을 위한 팀이 이걸 쓰지 못하고 더 열악한 곳에 터를 잡아야 했던 건 아이러니였다. 그 사이 고양시는 고양국민은행이 해체를 선언하고 고양종합운동장의 주인이 없어지자 2012년 안산할렐루야를 고양시에 데려왔다. 이 팀은 고양종합운동장을 안방으로 쓰기로 약속한 뒤 고양 Hi FC라고 이름을 바꾸고 K리그 챌린지로 합류했다. 하지만 이 팀은 고양시민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했기 때문이다. 팀명에 들어간 ‘Hi’는 연고지에 친근하게 다가서겠다는 의미에서 지었다는 그들의 말과 다르게 사실은 할렐루야와 임마누엘의 약자였다. 전지훈련을 빙자한 해외 선교 활동도 했다.

11년 전인 2006년 고양 팬들은 K리그로 승격하겠다는 의지를 카드섹션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경기가 그들이 고양종합운동장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고양국민은행과 고양 Hi FC, 그리고 고양시민축구단

고양종합운동장을 차지한 고양 Hi FC는 이후 고양자이크로로 이름을 다시 한 번 바꾸고 계속 좋은 환경에서 축구를 했지만 고양시민축구단은 열악한 별무리운동장을 쭉 홈으로 써야했다. 고양시민축구단은 별무리운동장에서 그렇게 무려 9년 간을 지내왔다. 그런데 고양자이크로가 지난 해 결국 유소년 육성을 위해 써야하는 프로축구연맹 보조금을 횡령하는 일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가뜩이나 종교적 색채가 강하고 고양시민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팀은 결국 이렇게 사단을 냈다. 결국 지난 시즌을 끝으로 고양자이크로는 프로에서 탈퇴했다. 보조금 횡령 금액을 반납해야 하지만 이 역시도 구단이 해체 수순을 밟았기 때문에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다. 다시 고양종합운동장은 주인을 잃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고양시민축구단이 고양종합운동장 입성을 노렸다. 9년 간이나 고양시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며 2천여 석짜리 인조 잔디 구장에서 생활한 그들이 “고양종합운동장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보레아스’ 시절부터 고양을 응원했던 이들로서는 2006년 내셔널리그 챔피언결정전 이후 무려 11년 만에 다시 고양종합운동장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꿈꾸기 시작했다. 고양시민축구단은 곧바로 고양종합운동장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양시와 고양도시관리공사의 입장은 미온적이었다. 알고 봤더니 지난 시즌 고양자이크로가 고양종합운동장 사용료를 하나도 내지 않고 팀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한꺼번에 정산하겠다”고 한 뒤 팀이 횡령에 연루되면서 리그를 탈퇴해 버려 경기장 대관 외상값(?)을 하나도 받지 못한 것이었다.

고양시와 연고 협약도 맺지 않은 상황에서 고양시 지원금까지 받아갔던 고양자이크로가 불미스러운 일을 벌여 리그 탈퇴와 해체까지 결정됐으니 경기장을 외상으로 빌려주고 시 지원금까지 제공한 공무원들에게 불똥이 튀었다. 이 때문에 고양시와 고양도시관리공사의 여러 공무원들이 문책을 당하고 징계를 받아야 했다. 고양시민축구단도 그나마 시에서 지원 받던 3천여만 원의 예산이 고양자이크로의 비리 때문에 모조리 끊기고 말았다. 두 팀은 다른 팀이었지만 엉뚱하게도 고양시민축구단까지 피해를 입은 것이었다. “고양종합운동장을 홈으로 사용하고 싶다”는 고양시민축구단의 문의에 담당 공무원들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고양자이크로 때문에 문책을 당했던 그들은 고양종합운동장을 쓰겠다는 축구팀을 원하지 않았다.

11년 전인 2006년 고양 팬들은 K리그로 승격하겠다는 의지를 카드섹션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경기가 그들이 고양종합운동장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큰 의미가 있던 고양의 홈 개막전

하지만 고양시민축구단 측에서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 팀과는 완전히 다른 팀이다. 고양시민이 주체가 되는 구단이다.” 직접 담당자를 만나 해명하고 설득하기를 반복했다. 고양시민축구단이 9년 동안 정들었던 별무리경기장을 떠나 고양종합운동장으로 가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 건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한 구단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고양종합운동장이 주인 없이 또 비어 있으면 다른 지역 프로팀이 연고를 옮겨 또 고양시로 들어오려고 할 것이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고양종합운동장에는 주인이 있어야 한다.” 그러자 담당자들도 조금씩 협조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고양시민축구단이 올 시즌 고양종합운동장에서 K3리그 경기를 치르기로 약속했다.

고양시민축구단 창단 9년 만의 일이었고 고양 축구팬들이 고양종합운동장을 떠난 지 11년 만의 일이었다. 그렇게 고양시민축구단은 지난 15일 K3리그 베이직 3라운드 홈 개막전에서 FC의정부를 고양종합운동장으로 불러 들여 역사적인 첫 경기를 치렀다. 이날 경기를 위해 고양시민축구단에서는 많은 준비를 했다. 푸드트럭을 모셔 왔고 식전 공연과 하프타임 공연으로 인근 고등학교 댄스 동아리까지 섭외했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홈 경기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2006년 K리그로 가겠다던 고양국민은행이 들썩이게 했던 이 경기장은 이후 종교색 가득한 횡령 구단이 있는 동안 그들만의 잔치가 열렸고 그렇게 11년 만에 고양시민들의 함성이 다시 울려 퍼지는 곳이 됐다.

무엇보다도 고양종합운동장 입성을 기다렸던 건 11년 전 이곳을 떠나야 했던 바로 그 축구팬들이었다. 훌쩍 세월이 흘러 그들은 많이 변해 있었다. 11년 전 고양국민은행을 응원하던 고등학생 김규영 씨는 어느덧 서른을 바라보는 직장인이 돼 있었다. “그 사이 집이 김포로 이사를 갔지만 다시 이곳에서 축구를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달려 왔습니다.” 일반석에서 경기를 지켜본 박민석(41세) 씨도 마찬가지였다. “고양국민은행의 그 챔피언결정전 이후 11년 만에 다시 이곳에 처음 왔어요. 그때는 총각이었는데 지금은 초등학생 딸내미가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익명을 요구한 한 팬은 이렇게 말했다. “11년 동안 아내가 축구 보러 안 간다고 좋아했는데 이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게 돼 기뻐요. 주말마다 아내와 또 부부싸움을 할 것 같지만 그래도 고양종합운동장에 돌아오니 좋습니다.” 비록 이들은 아직 손으로 셀 정도의 적은 수였지만 다시 오랜 만에 뭉쳤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11년 전인 2006년 고양 팬들은 K리그로 승격하겠다는 의지를 카드섹션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경기가 그들이 고양종합운동장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11년 만에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

이날 경기에서 고양시민축구단에는 11년 만에 돌아온 팬들 못지 않게 특별한 사연을 가진 선수가 한 명 있었다. 바로 남하늘이었다. <청춘FC-헝그리 일레븐>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린 남하늘은 지난 시즌 고양자이크로에 입단해 16경기에 나섰지만 팀의 리그 탈퇴와 해체로 갈 곳을 잃었다. 그러던 중 올 시즌을 앞두고 같은 연고지 내 다른 팀인 고양시민축구단에 입단해 고양종합운동장에 다시 서게 된 것이다. 남하늘에게 고양시민축구단은 특별한 존재다. “고양자이크로가 해체되고 팀을 알아보고 있는 과정이었는데 고양시민축구단이 이곳을 홈 구장으로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지난 시즌에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이 많아서 다시 이 경기장에서 한 번 보여주고 싶어 고양시민축구단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지난 시즌과 같은 경기장이지만 남하늘이 입은 유니폼은 지난 시즌과 달라졌다.

그런데 이 드라마틱한 경기에서 드라마틱한 골이 터졌다. 바로 남하늘이었다. 남하늘은 이날 경기 전반 막판 FC의정부를 상대로 귀중한 결승골을 넣은 뒤 골대 뒤 서포터스 ‘울트라스 맥파이’ 앞으로 달려가 기쁨의 세리머니를 펼쳤다. 남하늘은 서포터스 앞에서 두 손을 불끈 쥐며 포효했다. 11년 전 고양국민은행 윤보영과 고민기가 ‘보레아스’를 향해 보여주던 바로 그 세리머니였다. 남하늘은 경기가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응원 받을 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팬들이 열심히 응원해 주시고 있어요. 이런 세리머니라도 해드려야 팬들의 응원에 보답을 드리는 것 같아서 팬들에게 달려 갔습니다.” 비록 많은 관중은 아니었지만 오랜 만에 고양종합운동장은 고양시민을 위한 축구장으로서의 기능을 했다. 그렇게 고양 축구 팬들은 무려 11년 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고양시민축구단은 올 시즌 모든 홈 경기를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치른다는 방침이다. 개막전 사용료가 260만 원에 이르렀고 이 돈을 구단이 전부 부담했지만 고양시도 이제는 협조적인 태도로 자세를 바꿨다. “고양시와 고양도시관리공사 측에서도 경기장 사용에 대한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어 아마도 다음 홈 경기부터는 경기장 사용료를 조금 할인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구단 관계자의 설명이다. 고양시민축구단 팬들도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팟캐스트 수익금 전액을 구단 운영비로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비록 11년 전처럼 내셔널리그를 평정하던 팀은 더 이상 고양시에 없고 그 자리에는 K3리그에서도 최하위를 전전하는 팀이 자리 잡고 있지만 그들은 차근차근 이 단계를 밟아나갈 예정이다. 11년 만에 고양종합운동장에 ‘진짜 고양 팀’이 돌아왔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제는 그때 그 고등학생이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고 서른살 청년은 초등학생 딸을 둔 부모가 됐지만 그들이 하나둘 경기장으로 모이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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