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축구협회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1993년 10월 25일 카타르 도하 칼리파 경기장에서 벌어진 한국과 일본의 1994 미국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이전까지 일본은 한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 경기 전까지 역대전적에서 한국은 32승 13무 7패의 압도적인 성적을 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일본이 한국 축구를 따라 잡을 것이라고 믿는 이들은 없었다. 가끔 한국이 최악의 졸전을 펼칠 때면 비기거나 질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일본은 한국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우위는 천년만년 갈 것만 같았다. 적어도 축구에서만큼은 한국의 DNA가 일본보다 우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도하에서 겪은 일본전 완패의 기억

그런데 한국이 일본에 조금씩 고전하기 시작했다. 1992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다이너스티컵 예선에서 일본과 0-0 무승부를 기록한 한국은 이 대회 결승전에서는 2-2 무승부에 이은 승부차기 끝에 일본에 패하고 말았다. 공식적인 기록은 두 번 연속 무승부였지만 사람들은 조금씩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어? 일본 축구가 이제 좀 하네?’ 아직도 이때의 느낌이 기억난다. 되게 못 생기고 키도 작고 옷도 못 입어서 인기도 없던 애가 조금씩 잘 생겨지고 키도 커지고 패션 감각도 생겨나는 느낌이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때부터 일본이라는 친구는 우쭐대던 나보다 훨씬 인기가 많아지고 있었다. 그걸 나만 몰랐다.

1988년부터 프로화를 추진해 1992년 J리그를 발족하고 이듬해 첫 시즌을 시작한 일본은 이미 이때부터 차근차근 한국 축구를 따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참담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던 건 바로 1993년 10월 25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일본과의 1994 미국월드컵 최종 예선 경기였다. 조금씩 성장해 어느덧 한국의 턱 밑까지 추격해 왔다고 느꼈는데 막상 일본과 붙으니 한국은 졸전 끝에 결국 0-1로 패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한국 축구계는 완전히 일본을 인정해야 했다. 이전까지 민족성 운운하며 축구 DNA를 자랑스러워하던 한국은 일본에 참패한 뒤 큰 충격에 빠졌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국이 처음으로 일본에 완패했던 기억이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은 한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제는 그 누구도 한국이 일본 축구를 월등히 앞선다고 믿지 않는다. 일본과 A매치를 하면 승률은 반반 정도 될 것이다. 1992년부터 슬금슬금 한국 축구를 따라오던 일본은 1993년 카타르 도하에서의 승리를 기점으로 한국 축구와 동등한, 아니 어쩌면 앞서는 위치에 섰다. 나는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언론에서는 늘 ‘일본은 한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자신만만했는데 브라질 유학파라는 작은 일본 녀석의 현란한 개인기에 농락 당하며 졌을 때의 충격은 잊을 수 없다. 민족의 자존심을 앞세우고 우리의 축구 DNA가 월등하다면서 일본을 깔볼 동안 일본은 이렇게 무섭게 성장했다. 1993년 10월 25일 카타르 도하에서의 패배는 한국 축구가 일본에 뒤지고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된 계기였다.

중국 축구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공한증'도 이제 옛말이 됐다. ⓒ중국축구협회

우리에게 굴욕 선사한 중국의 자신감

그리고 바로 어제(23일) 나는 24년 전 일본에 느꼈던 그 기분을 똑같이 느꼈다. 그런데 충격적인 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절대 질 것 같지 않던 중국에 이런 완패를 당했다는 점이다. 24년 전과 비교해 상대만 일본으로 바뀌었을 뿐 상황도 비슷하고 충격도 비슷하다. 한국이 중국에도 이렇게 중요한 길목에서 발목을 잡힐 것이라고 믿은 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충격이 크고 화가 난다. 경기 전부터 사드 문제를 비롯해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시기였고 혐한 감정에 대해 우리 국민 중 상당수는 중국인을 폄하하고 그들의 민족성까지 건드리며 감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중국 축구 DNA로는 절대 한국을 넘을 수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내포돼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어제 그들의 안방에서 역사에 남을 패배를 기록하고 말았다.

1993년 10월 25일 일본전과 너무나도 닮았다. 지금껏 중국 축구가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수준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어마어마한 돈으로 세계적 수준의 외국인 선수를 사오는 리그 정도로 생각했고 아무리 돈을 써도 절대 중국은 우리를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다. 24년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일본은 체계화 된 리그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한국 축구를 앞질렀다는 점이고 중국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성장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제외하면 모든 게 그때와 비슷했다. 한국은 1993년 10월 25일 절대 밀리지 않을 것 같던 일본이 어느덧 우리와 대등하거나 어쩌면 넘어섰다고 인정해야 했고 이제는 중국 축구도 어쩌면 한국을 넘어서고 있다는 걸 어제 경기를 기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완패다. 그래서 더 충격적이다. 더 화가 나는 건 중국이 1-0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도 공격적인 선수 교체를 이어갔다는 점이다. 중국이 한국을 상대로 이런 선수 교체를 선보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중국이 어제는 1-0으로 앞서고 있는 후반 15분 왕용포를 빼고 인훙보를 투입했다. 당연히 지키기 위해 수비수를 투입하는 게 지금껏 지켜봐 온 중국의 전략이었지만 마르셀로 리피 감독은 측면 미드필더를 투입하며 공격적인 전략을 계속 유지했다. 이건 한국 축구에 굴욕적인 일이다. 중국이 한국을 이기고 있는데 그래도 공격적인 의지를 계속 보인다는 건 지금껏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중국은 자신감이 넘쳤다. 1-0으로 이기는 게 아니라 더 골을 넣고 이기겠다는 중국의 의지를 느끼는 순간 24년 전 일본에 당했던 굴욕적인 패배보다 더한 굴욕감을 느꼈다. 심지어 그들은 침대 축구도 안 했다.

중국 축구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공한증'도 이제 옛말이 됐다. ⓒ중국축구협회

변명의 여지 없는 완패였다

감독의 전략에서도 완벽한 패배였다. 여우 같은 리피 감독이 일대일 대결을 피하면서 수적 우위를 점하며 한국 선수들을 농락하는 동안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뻔한 카드로 대응했다. 경기가 안 풀리면 교체로 투입하던 김신욱을 후반 시작과 동시에 투입했고 이후 교체로 나선 황희찬과 허용준도 아무 것도 보여주질 못했다. 김신욱을 활용한 뻔한 전술에 맞서 중국은 공중볼을 장악하고 날카로운 역습까지 하며 한국의 뒷공간을 계속 공략했다. 중국이 원하는 대로 전개된 경기였고 전술 싸움에서도 슈틸리케 감독은 리피 감독에게 완패하고 말았다. 나는 지금껏 슈틸리케 감독을 더 믿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돌아서야 할 때인 것 같다. 슈틸리케여서 믿은 게 아니라 한 번 신임한 감독은 신뢰를 보여줘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리피 감독의 영리한 전략을 보고 슈틸리케 감독에 대한 믿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매너에서도 졌다. 경기 시작 전 애국가가 연주될 때 야유를 퍼붓는 중국 관중을 보며 그들의 비매너를 문제 삼으려 했지만 경기 막판 중국 선수의 몸을 향해 킥을 날리고 몸싸움까지 하는 황희찬을 보면서 그들의 매너를 탓할 때가 아니라는 걸 반성해야 했다. 매너만 따질 게 아니라 0-1로 지고 있는 후반 44분에 상대 선수를 거칠게 대하고 거기에 또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몸싸움까지 해주며 시간을 끌어주는 한국 선수를 보면서 경기 운영 또한 완패라고 받아들이게 됐다. 실력은 물론 감독의 용병술과 매너, 경기 운영 능력까지도 중국에 이렇게 밀리는 날이 올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불운과 우연, 애매한 판정, 홈 텃세에 의한 안타까운 패배가 아니었고 모든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2010년 일본에서 중국에 0-3 패배를 당했을 때는 주력 선수가 빠진 동아시안컵이라고 위로할 수 있지만 이번 패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더 1993년 10월 25일 일본전이 생각난다. 그들이 우리를 추월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가 한 번의 경기로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던 그 기억이 그대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중국 축구의 성장을 인정해야 할 때인 것 같다. 1억 명 중에 리오넬 메시를 한 명씩만 발굴해도 13명의 메시를 만들 수 있는 나라에서 축구를 그렇게 못할 수도 없다며 비아냥대는 동안 중국 축구는 눈에 띄게 성장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성장을 경계하지 못했고 그저 민족성 운운하고 중국인들을 폄하하면서 서서히 추월 당했다. 중국 축구가 돈을 쳐 발라 외국인 선수만 사온다고 생각했지 그들의 경기장이 꽉꽉 찰 정도의 축구 열기를 주목하는 이들은 없었다. 슈퍼리그는 K리그를 앞질렀을지 몰라도 국가대표 팀 수준은 아직 우리가 한참 위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넘쳐났다. 자국리그의 발전은 뒤로하고 그저 대표팀 경기 몇 번 이긴 것에 만족했던 게 우리다. 그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이다.

이제는 그들의 성장 인정해야

앞으로 한국이 중국에 지는 일이 더 많아질 수도 있다. 1993년 일본전 패배 이후 한국은 계속 일본과의 전적에서 엎치락 뒤치락하고 있다. 이제 중국과도 그럴 일이 많아질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 중국에 발목을 잡히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할 날들도 더 생겨날지 모른다. 이번 경기를 통해 슈틸리케 감독과 선수들에게 정말 많이 실망했지만 그들에게만 화살을 돌려서 될 일도 아닌 것 같다. 중국 축구가 우리를 넘어설 만큼 성장했다는 걸 인정하고 이제는 우리가 도전자의 입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기분이 상하지만 그게 앞으로 중국에 덜 당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J리그와 슈퍼리그가 출범하고 발전하는 동안 우리는 정작 내실을 다지기 보다는 그저 화려한 대표팀의 겉치장에만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닌지 잘 생각해 보자. 우리가 중국 축구를 폄하하며 입으로만 축구를 하는 동안 중국은 어느새 한국을 턱 밑까지 따라왔거나 앞질렀을 수도 있다. 어제 경기는 그저 쌓여 있던 게 폭발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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