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시청에서 7년간 활약했던 故박재완의 생전 모습. ⓒ내셔널리그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한 축구선수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무려 석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이 선수에 대한 기사 한 줄이 없다. 그것도 한 팀에서 무려 7년이나 뛴 ‘원클럽맨’인데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없다. 서른 살의 젊고 창창한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이 선수를 위해 소속팀은 작은 추모 행사를 준비 중이지만 이런 행사가 내일(18일) 열린다는 사실 또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은 ‘원클럽맨’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한 선수를 조명해 보려 한다. 창원시청에서 무려 7년 동안 헌신한 故박재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칼럼을 고인에게 바친다.

내셔널리그 정상급 수비수, 박재완

경기도 수원 출신 1987년생 박재완은 2006년 수원공고를 졸업한 뒤 경기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경기대를 졸업할 무렵 그를 원하는 프로팀은 없었고 결국 그는 2010년 내셔널리그 창원시청으로 향했다. 박말봉 감독은 프로팀이 외면한 박재완의 성실성에 후한 점수를 줬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박재완과 창원시청이 운명적인 관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창원시청은 박재완이 성인 무대에 입성한 뒤 처음 몸담은 팀이자 마지막까지 함께 한 팀이 됐다. 박말봉 감독은 박재완을 중앙 수비의 백업 요원부터 차근 차근 키워나갈 생각이었다. 박재완과 창원시청의 운명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박재완에게 첫 시즌부터 기회가 찾아왔다. 붙박이 주전 수비수인 김성용이 무릎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동안 이를 박재완이 대체한 것이다. 박재완은 2010년 첫 시즌에 19경기에 나서며 가능성을 보여줬다. 2006년 창원시청에 입단해 이 팀에서만 쭉 뛴 최명성은 당시 박재완을 이렇게 기억했다. “경기장에서는 터프한 수비를 했지만 평소에는 너무나도 순수하고 착한 친구였어요. 원래 젊은 친구들이 가끔 말썽을 피울 때도 있는데 재완이는 단 한 번도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었죠. 실력도 좋았고 인성도 좋았어요.” 실력과 인성까지 겸비한 박재완은 2010년 창원시청 유니폼을 입은 뒤 대선배 김성용을 밀어내고 붙박이 주전 자리를 꿰찼다.

2011년 시즌 들어 부상으로 7월까지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부상을 털어낸 뒤에는 펄펄 날기 시작했다. 2011년 9월 23일 펼쳐진 수원시청과의 홈 경기에서는 수비수임에도 두 골이나 기록하며 맹활약하기도 했다. 매년 20경기 이상 뛸 정도로 박재완은 창원시청 수비진에서는 없어선 안 될 선수로 자리매김 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2015년은 박재완의 해였다. 한 팀에서 내셔널리그 통산 100경기 출장이라는 금자탑을 세우기도 했고 시즌이 끝난 뒤에는 내셔널리그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박재완은 2015년 팀의 준우승을 이끈 듬직한 주전 수비수였다. 지난 시즌에도 27경기에 출장하며 팀 수비를 책임졌다. 7년 동안 창원시청에서만 143경기에 나선 명실상부한 원클럽맨이었다.

박재완과의 믿을 수 없는 이별

하지만 박재완에게는 한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바로 병역이었다. 2016년 시즌을 끝으로 사회복무요원으로 일하면서 K3리그 경주시민축구단에서 뛰기로 합의했다. 7년 동안 한 팀을 지킨 박재완이 잠시 팀과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박재완은 지난 시즌 10월 29일 대전코레일전을 끝으로 동료들과 잠시 작별해야 했다. 경기대 시절 1년 후배이면서 창원시청에서도 함께한 10년지기 동료 이정환은 그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어요. 시즌이 끝난 뒤에도 가볍게 몸 푸는 운동을 하면서도 항상 봤고 연말 휴가 때도 따로 보기로 했거든요. 재완이 형이 잠시 팀을 떠났지만 영원한 이별은 아니었으니 큰 감정은 없었어요.”

창원시청 선수들은 시즌이 끝난 뒤 각자 휴가를 받고 흩어졌고 언제든 다시 만날 기회가 있던 터라 그 이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박재완은 그렇게 동료들과 영원한 이별을 해야 했다. 2016년 12월 26일,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다음 날 팀 동료 최명성은 모르는 이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최명성 씨 맞으시죠? 차량 번호 XXXX번 차주 박재완 씨 아시죠? 놀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방금 박재완 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셨습니다. 여기 산청에 있는 장례식장입니다. 빨리 오셔야겠어요.” 이날 새벽 박재완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하기 위해 잠시 팀을 떠난 박재완이 남아 있는 마지막 짐을 정리하기 위해 창원 숙소로 가던 도중 고속도로에서 트럭과 충돌하며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최명성은 말문이 막혔다. 경기도 수원에서 비보를 듣고 달려온 박재완의 부모님보다 최명성이 먼저 산청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7년간 함께 한 팀 동료의 죽음을 가장 먼저 접한 최명성은 충격에 빠졌다. “재완이하고 같은 방을 5년 넘게 썼어요. 사고를 당하기 며칠 전까지 통화하면서 웃던 친구였는데 너무 충격적이었죠. 저희 아버지께서도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는데 재완이의 죽음은 그때 당시 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사고 당시 CCTV를 직접 봤는데 졸음운전으로 추정하고 있더라고요.” 박재완의 빈소가 수원에 마련되자 팀 동료들이 전부 달려와 사흘 내내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박재완 만큼 동료들로부터 인정 받고 사랑 받는 선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늘 웃는 얼굴로 동료를 대하던 박재완과 영영 작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故박재완(오른쪽)이 창원시청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펼치고 있다. ⓒ내셔널리그

순수하고 축구밖에 모르던 선수

2년 동안 박재완과 룸메이트로 지낸 최명희도 박재환의 사망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늘 운전도 조심히 하는 형이었어요. 항상 ‘운전 조심해라. 천천히 달려라. 그러다 사고 난다’면서 잔소리도 많이 했거든요. 그런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형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고 하니 믿기지가 않아요.” 박말봉 감독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 선수단 전체가 큰 시름에 빠져 있던 시기 박재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2년 정도 투병 생활을 했던 박말봉 감독과 달리 박재완은 이별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창원시청 선수들은 누구보다도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 다들 입을 모아 “재완이가 보고 싶다”고 했다.

박재완은 순수한 선수였다. 최명희는 세 살이나 많은 박재완에게 장난을 참 많이 쳤다. “유행어 중에 ‘의문의 1패’라는 말이 있잖아요.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재완이 형한테 장난으로 ‘형 의문의 1패 했어’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루 종일 물어볼 정도로 순수한 형이었어요. 유행어도 잘 모르고 축구만 아는 선배였죠. 나이 어린 선수들이 먼저 장난을 칠 정도로 편한 형이었고 장난을 걸어도 화도 안 내는 형이었습니다. 재완이 형은 어린 시절부터 선배들이 경기장에서 후배들에게 호통 치는 모습을 별로 안 좋게 봤나봐요. 경기 도중에도 먼저 싫은 소리를 하기보다는 후배들과 소통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어요. 경기장에서 선배가 후배 이야기 들어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재완이 형은 선배라고 무조건 따르라는 게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는 사람이었죠.”

무려 7년 동안 함께 한 최명성도 여전히 하늘로 간 박재완의 영상을 찾아본다. 유독 장난을 쳐도 순수하게 속아주던 그가 그립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이었던 것 같아요. 밥을 먹으러 재완이하고 식당에 갔는데 재완이 마음에 쏙 드는 여자 분이 있어서 재완이가 용기를 내 종이에 연락처를 써서 건네줬어요. 그런데 우리끼리 장난을 쳤죠. 그 여자 분의 남자친구인 척 모르는 번호로 후배가 옆방에서 재완이한테 연락해 ‘왜 내 여자친구한테 작업을 거느냐’고 했어요. 재완이가 당황하면서도 얼굴이 빨개져 ‘여자 분은 잘못이 없고 제가 일방적으로 연락처를 건네줬다’고 해명하는데 저는 그걸 몰래 영상으로 찍고 다같이 웃었죠. 워낙 착했어요. 지금도 가끔 그 동영상을 봐요. 그때는 배를 잡고 웃으면서 장난을 쳤는데 지금 보면 참 그립고 슬프네요.”

故박재완(오른쪽)이 창원시청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펼치고 있다. ⓒ내셔널리그

그를 추억하는 동료들

2014년 9월 19일 용인시청과의 경기에서 박재완은 행운의 골을 기록하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그런데 최권수는 아직도 가끔 사진첩을 들여다 보며 박재완을 떠올린다. “당시 공이 재완이 형의 얼굴에 맞고 골로 연결됐거든요. 제가 재완이 형을 보면서 ‘형 괜찮아?’라고 웃으면서 묻던 모습이 사진으로 찍혔어요. 그 사진을 보면 재완이 형 생각이 많이 나요. 가끔 그 사진을 보거든요.” 동료들은 지난 해 여름 박재완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떠났던 전주 여행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그를 그리워한다. 사진첩을 열어 보고 동영상을 보면서 지금은 하늘로 간 동료를 추억하고 있다. 팀의 딱 중고참으로 후배라고 모질게 대하지도 않았고 형들에게도 깍듯했던 박재완은 모든 선수들이 따르던 선수였다. 성실하고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하는 박재완은 7년 동안 단 한 번도 시즌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10년지기 동료인 이정환은 박재완보다 1년 늦은 2011년 창원시청에 입단한 뒤 방황했다. 부상을 당했고 동계훈련도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박재완이 이를 알아채고는 이정환에게 한 마디 툭 던졌다. “잠깐 나와. 맥주 한잔 하자” 같은 대학교를 다니면서도 단 둘이 술 한 잔 할 일이 없었지만 이 둘은 처음으로 단 둘이 맥주잔을 기울이면서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박재완은 이 자리에서 1년 후배인 이정환을 다독였다. “지금 잘하고 있어. 이렇게만 하면 충분히 잘 적응할 수 있을 거야. 같이 힘내자.” 이정환은 이때 박재완에게 많은 힘을 얻었고 팀에 적응해 지금도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정환은 그때 맥주와 치킨을 사주던 박재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따뜻한 선배였다.

박재완은 7년 동안 정 들었던 창원시청을 떠날 무렵 동료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 2년 뒤에도 다시 우리 팀에서 불러줄까? 다시 돌아오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까? 그때도 내 자리가 남아 있을까?” 그는 7년 동안 헌신한 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아직도 박재완이 마지막으로 챙기려던 신발과 옷가지는 창원시청 숙소에 그대로 남아 있다. 숙소 생활을 하며 가족 이상으로 붙어 지내던 동료들은 유품을 쉽게 처리하지도 못한다. “재완이 형 신발하고 옷을 보면 생각이 많이 나요. 같이 쇼핑을 가서 산 옷도 있거든요.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는 형을 이제 볼 수 없다고 하니 너무 속상해요.” 아직도 동료들은 박재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밥을 먹을 때도, 텔레비전을 볼 때도 문득 문득 박재완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숙소에 남겨진 박재완의 신발을 볼 때도, 옷가지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故박재완(오른쪽)이 창원시청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펼치고 있다. ⓒ내셔널리그

원클럽맨 박재완, 우리의 기억에 남길

더 안타까운 사실은 박재완과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까지 있었다는 사실이다. 박재완은 늘 결혼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서른 살의 나이에 내셔널리그 선수로 활약하면서 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도 올릴 수 없었다. 최명희는 항상 박재완의 고민을 함께 나눴었다. “군대 문제 때문에 K3리그로 가면서 결혼을 늦췄어요. 재완이 형하고 2년 정도 만나서 미래를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K3리그에서 뛰면 월급이 얼마 되지 않으니까 사회복무요원을 마치고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재완이 형이 ‘지금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데 여자친구를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때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결국 박재완은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하늘로 갔다.

7년 동안 한 팀에서 헌신했고 누구보다도 따르는 동료들이 많았던 그의 죽음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기사 한 줄 나간 적이 없고 그가 팀을 떠났다는 사실 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주목받지 못하는 내셔널리그 선수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 문제 때문에 계약이 만료되고 K3리그로 떠나던 시점에서 사고를 당해 엄밀히 따지면 그는 더 이상 창원시청 소속도 아니었다. 실업축구연맹 측도 시즌 도중 사고를 당한 선수가 있으면 이를 파악하고 있었겠지만 시즌이 끝나고 리그를 떠난 선수의 사고 소식은 뒤늦게 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7년 간 한 팀에서 활약한 원클럽맨이 하늘로 갔다는 건 이 선수가 얼마나 유명한지 아닌지를 떠나 우리가 한 번쯤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창원시청은 그를 기억하기위해 올 시즌 등번호 3번을 비워 놓은 상태다. 모든 동료들에게 실력과 인성 모두 인정 받던 한 멋진 선수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렇게 글로나마 영원히 남길 바란다.

내일(18일) 창원시청은 중요한 일전을 치를 예정이다. 故박말봉 감독 이후 부임한 박항서 감독이 윤성효 감독이 이끄는 김해시청을 안방으로 불러들여 2017 내셔널리그 개막전을 치르기 때문이다. K리그에서도 이름을 날렸던 두 감독의 대결로도 관심을 끄는 이 승부는 ‘불모산더비’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박재완이 7년 동안 활약했던 창원시청은 이 경기를 앞두고 조촐한 행사를 치르기로 했다. 원클럽맨 박재완에게 공로패를 수여하기로 한 것이다. 아마 많은 이들이 내셔널리그를 주목하지 않을 테고 그나마 이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은 박항서 감독과 윤성효 감독의 대결 정도로 받아들일 것이다. 아주 짧게 진행될 박재완의 추모 행사를 눈여겨 보는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칼럼을 통해 단 한 명이라도 이렇게 한 팀에서 7년 동안 헌신한 선수와의 작별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인사도 없이 간 형이 그립습니다”

팀 동료 최권수는 이런 말을 했다. “재완이 형이 팀을 떠날 때 주변에서는 ‘제일 친한 형이랑 떨어져서 어떻게 하느냐’고 할 정도였어요. 경기에서 골을 넣고 재완이 형 유니폼을 들면서 형을 기리는 골 세리머니를 하고 싶어요. 그런데 재완이 형이 숙소에서 이미 유니폼을 다 정리했더라고요. 아직도 형이 떠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데 형의 흔적이 사라졌다는 게 너무 슬퍼요.” 10년지기 이정환도 덧붙였다. “늘 제 뒤에서 묵묵히 수비를 책임지던 형이었어요. 팀을 떠날 때도 무거운 마음은 없었거든요. 언제든 다시 조기축구회에서라도 재완이 형이 제 뒤를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항상 제 뒤에 든든하게 있던 형인데 이제는 함께할 수 없다는 게 너무 그립습니다. 인사도 없이 그냥 갔어요. 항상 웃던 모습, 운동장에 있던 모습이 그리워요. 보고 싶습니다.” 박재완은 내일(18일) 하늘에서 정들었던 창원시청 동료들을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창원시청에서 7년 동안 143경기에 나섰던 원클럽맨 故박재완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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