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부름 앞에서 그는 치열하게 고민했다 ⓒ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K리그에는 두 명의 마술사가 있었다. ‘파리아스매직’을 선보이던 포항스틸러스의 파리아스 감독이 있었고 인천유나이티드에는 ‘봉길매직’을 부리던 김봉길 감독이 있었다. 감독대행으로 위기에 빠진 인천을 위기에서 두 번이나 구해냈던 그는 19경기 연속무패라는 대단한 역사를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야인(野人)이 돼 다시 한 번 마술을 부릴 준비를 하고 있다. 김봉길 감독을 직접 만나 근황을 비롯해 여러 이야기를 나눠봤다.

반갑다.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나.

나도 반갑다. 현재 고등축구연맹 자문 위원으로 일하고 있고 논설위원으로도 활약 중이다. 며칠 전까지는 춘계고등연맹전을 지켜보기 위해 경남 합천에 쭉 있었다. 기회가 되면 다시 지도자로 현장에 복귀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운동장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인데 잠시 떨어져 있다 보니 몸이 근질근질하다. 기회가 되면 빨리 지도자로 복귀하고 싶다.

당신은 여러 일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상의 백수다. 집에서 눈치가 보이지는 않나.

당연히 집사람 눈치를 보고 있다. 그래서 내 친구인 정종선 감독이 지휘하는 언남고 축구부에 가 학생들과 같이 운동도 하고 땀도 뺀다. 언제 지도자로 복귀할지는 모르겠지만 감독이 배가 나와 있으면 안 되지 않나. 집에 있으면 눈치가 보이니까 점심에도 약속을 잡고 밖에서 식사도 해결하려고 한다. 나도 솔직히 집에 있으면 불편하다.

그래도 감독으로서 성적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 편하지 않나.

감독을 그만두고 처음 며칠은 괜찮았다. 지인들과 태국으로 여행도 가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며칠 지나니까 오히려 현장에 있지 않은 게 더 스트레스다. K리그 경기 시간이 되면 초조해지고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중계를 보면 내 발에 땀이 다 나더라. 직업병인 거 같다. 밖에 있어도 K리그 결과가 나올 때쯤이면 누가 이겼는지 스마트폰으로 결과도 확인하게 된다.

김봉길 감독은 인천에서 코치와 감독대행, 정식 감독으로 7년의 세월을 함께했다. ⓒ인천유나이티드

아들이 올 시즌을 앞두고 FC안양으로 이적했다. 아들 경기는 자주 지켜보나.

경기장에 몰래 가서 보고 오는 적도 많다. 스트레스 받을까봐 축구 이야기를 잘 하지는 않는 편이다. 그런데 아직도 확실한 주전 자리를 못 잡았다. 답답한 마음이 들 때도 많다. 가끔 잔소리를 할 때면 우리 집사람이 “신철이 아빠 요즘 애들한테 그런 이야기하면 그게 먹혀?” 그러더라. 집사람은 늘 아들편이다. 우리 아들이 27살인데 이제 선수로서 시간이 많이 남은 것도 아니다. 조금 더 분발해 줬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당신은 결혼 안 하나.

하고 싶은데 짝이 없다.

나는 천천히 결혼하는 걸 추천하고 싶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지금 집사람을 만나서 25살에 결혼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숙소 생활을 시작했고 그게 너무 싫었는데 프로팀 유공에 가니 거기에서도 기혼자만 숙소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 물론 좋아하는 마음이 가장 커서 후딱 결혼한 거지만 빨리 숙소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그때 일화팀 숙소가 장충체육관 옆이었는데 밤이면 고정운이 전화해서 “여기 리버사이드 호텔 나이트클럽인데 물 좋다”고 약을 올리더라. 나는 그때 우리 첫 아이 기저귀 갈고 있었다. 일찍 결혼해서 아이 낳으면 아이를 일찍 키울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지만 나는 천천히 결혼하는 걸 추천한다. 당신도 천천히 가라.

지금 가도 이미 천천히 가는 거다. 내 나이가 올해 36살이다.

그러면 이제는 적기인 거 같다. 가라.

가고 싶어도 데려가는 사람이 없다. 어찌 됐건 지도자로서의 이야기는 차근차근 해보자. 당신에 대해 어린 팬들은 그저 덕장 감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신이 선수 시절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런가. 벌써 세월이 그렇게 많이 지났나보다.

당신이 어떤 선수였는지 직접 소개해 달라. 자기자랑 시간이다.

나는 지독하게 운동했다. 초등학교 때 학교 화단에 뿌리와 밑동이 굵은 나무가 심어져 있질 않나. 그러면 나는 거기에다가 밤에 몰래 축구공을 숨겨 놓고 새벽에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나와 혼자 공을 꺼내 연습을 했다. 숙소에서 공을 들고 나오면 다른 애들도 나와서 운동할까봐 몰래 그런 거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을 그렇게 했다. 인맥도 없고 배경도 없어서 오로지 실력으로만 인정받아야 했다. 의도한대로 되지 않으면 그걸 못 받아들이는 성격이었다.

자기자랑을 더 해보라.

부평고 다닐 때 별명이 ‘필드의 저격수’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고3 형들이 주축인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돼 아시아학생축구대회에 나갔다. 그런데 그 대회 8경기에서 10골을 넣고 득점왕에 올랐다. 고등학교 때는 주위에서 늘 ‘고교 랭킹 1위’라고 했다. 그때는 경기에 나가면 골을 넣고 이기고 대회에 우승을 하니 축구가 참 재미있었다. 내가 내 입으로 말하자니 부끄럽다. 내가 부평고 창단 멤버였는데 워낙 우리팀 선수들이 좋아서 그런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골 넣는 사람만 유명해지지 않나. 그래서 ‘고교 랭킹 1위’나 ‘필드의 저격수’라는 별명을 얻은 것 같다.

고등학교 무대를 평정한 공격수였는데 대학교에서의 스카우트 경쟁도 엄청났을 것 같다. 특히나 그때는 좋은 선수들을 연세대와 고려대가 싹쓸이 해 가던 시절 아닌가.

당시 부평고 고명수 감독님이 고려대 남대식 감독님하고 가까웠는데 나를 고려대에 보내고 싶어 하셨다. 그런데 연세대 정병탁 감독님은 우리 부모님에게 접근해 나를 연세대에 입학시키려고 하셨다. 연세대 훈련이 끝나면 정병탁 감독님이 우리 집으로 퇴근해서 거의 사실 정도였다. 그런데 고려대는 또 유명하신 체육위원장님이 직접 아버지를 만나러 와 “남대식 감독이 김봉길 스카우트에 실패하면 책임져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나는 부평고 창단 멤버라 고등학교 선배가 없었는데 고려대 형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려대가 좋아보였고 연세대 형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면 또 연세대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때 연세대와 고려대 사이에서 갈등이 심했다.

김봉길 감독은 인천에서 코치와 감독대행, 정식 감독으로 7년의 세월을 함께했다. ⓒ인천유나이티드

더 자세히 이야기 해달라. 나는 내 인생에 연세대와 고려대 입학을 놓고 갈등해 본 적이 없다.

고민을 하다가 연세대로 진로를 정했다. 부모님도 그쪽으로 생각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부평고 고명수 감독님과의 면담에서 이 사실을 말씀드렸는데 그게 고려대에 전달된 거다. 하루는 부평고 훈련이 끝나고 나오는데 정문 앞에서 형들 두 명이 서 있었다. 자세히 봤더니 최대식 선배와 지금 단국대 감독인 신연호 선배였다. 둘 다 고려대 2학년 선수들이었다. 1983년 멕시코 청소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신연호 형은 그때 우리의 우상이었는데 나한테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하는 거다. 나는 좋다고 따라 나가서 그 형들이 잡은 택시를 탔다. 그런데 학교 주변이 아니라 그 택시가 명동에 도착했고 그 형들이 명동 YMCA 회관에서 불고기를 사줬다. 그런데 밥을 사주더니 다시 택시를 태워서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내렸더니 거기는 남대식 감독님 댁이었다. 내 기억엔 대치동에 청실아파튼가 그랬을 거다. 그때 남대식 감독님이 나한테 그러셨다. “넌 고대 와야 된다. 지금부터 학력고사 볼 때까지 학교에 갈 필요도 없다.”

이거 납치 아닌가.

그분들 말해 따르면 납치가 아니라 보호였단다. 그때 프로팀 현대 감독이 조중연 전 대한축구협회장이었는데 남대식 감독님과 같은 동네에 사시더라. 곧바로 조중연 감독님 댁으로 가서 고려대 졸업하고 현대에 오는 걸로 합의까지 봤다.

하지만 당신은 고려대가 아닌 연세대에 입학했고 현대가 아닌 유공에 입단했다.

내 이야기를 더 들어보라. 그때 감독님들 이야기를 듣고는 ‘나를 이렇게까지 챙겨주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알겠다. 고려대에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신연호 선배는 잠깐 고려대 숙소로 들어갔고 최대식 선배와 둘이 여관방으로 갔다. 내가 연세대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으니 입학 때까지 나를 이렇게 붙잡아 놓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나는 밤이 늦도록 집에 전화 한 통 하지도 못했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던 시대도 아니었는데 고등학생이 이렇게 무단으로 외박까지 하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같아 집에 전화를 걸었다. (최)대식이 형은 이미 내가 고려대에 가기로 했으니 마음을 놓고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집으로 전화를 하니 친형이 받았다. 내가 형을 무척 어려워했는데 형이 다짜고짜 나한테 뭐라고 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한 건가. 올 때 메로나라도 사오라고 한 건가.

“네가 인마 축구를 얼마나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하고는 연대에 가기로 다 약속해 놓고 고대로 쏙 가버린다고? 넌 인마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나한테는 참 어려운 형이었는데 그 형한테 정말 많이 혼났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몰래 여관방을 빠져 나왔다. 운동화를 신고 나가면 내가 나가는 게 걸릴 수도 있어서 여관 슬리퍼를 신고 몰래 빠져 나와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 택시를 탄 채 부평 집으로 도망쳤다. 그래서 집으로 왔는데 연세대 정병탁 감독님께 연락이 와서 그 길로 연세대 숙소로 들어가 버렸다. 학력고사를 보는 날도 연세대 선배 두 명이 나를 에스코트해서 시험을 보고 바로 데리고 나왔다. 그런데 그 자리에 고려대 선배들도 와 있더라. 여차하면 나를 다시 채 가려던 것이었다.

정말 대단한 스카우트 경쟁이었다. 부럽다.

그 이후로도 나는 부평고 졸업식도 못 갔다. 고려대 쪽에서 다시 채 가면 연세대 쪽으로 올 수 없다고 생각해 연세대에서 보내주지 않은 것이다. 지금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옆 동문회관 자리가 우리 숙소였는데 나는 외출도 없이 거기에서 살았다. 진로를 결정하면서 많이 힘들었다. 그때는 그 정도로 영입전이 치열했는데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고등학교 선생님이 동의서를 두 장 써준 거다. 집에서는 내가 연세대에 간다고 하니까 연세대 쪽으로도 써줬고 고려대 쪽에도 동의서를 써주신 거다. 그래서 결국 대한축구협회에 가 재판 아닌 재판까지 받았다. 본인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해 연세대 입학을 허락했지만 결국 동의서를 두 장 써준 우리 고등학교 감독님도 징계를 받았고 나도 6개월인가 1년인가 경기 출장 금지 처분을 받았다. 내가 이 기간에 뛸 수 있는 경기는 연고전 뿐이었다.

당신을 놓친 고려대와의 경기에서 심한 복수를 당했을 것 같기도 하다.

당연히 그런 게 있었다. 나에게 불고기를 사주며 웃던 신연호 선배가 연고전에서 내 발을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남대식 감독님이 나를 거칠게 다루라고 그러셨다더라. 물론 이건 다 지난 일이다. 대학교 4학년 때 내가 주장이었는데 사실 연세대와 고려대 선수들이 가장 친하다. 그때 고려대에서 축구부 파티를 하면 내가 연세대 주장 자격으로 가 같이 맥주도 한잔 하고 했다. 지금은 서로 만나도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한다. 작년에 남대식 감독을 뵌 적이 있는데 “이 녀석 나하고 인연이 됐어야 한다”고 하시더라. 신연호 선배도 “이 놈 그때 여관방에서 도망쳤다”고 놀린다. 지금은 다 옛날 이야기다.

그래도 축구 명문인 두 학교에서 그 정도로 치열한 쟁탈전을 펼칠 정도면 당신이 엄청난 선수였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혹시 연세대가 아닌 고려대로 진학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후회는 하지 않았나.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에 후회할 이유도 없는 것 같다. 고려대에 가서 더 잘 됐을 수도 있지만 나는 연세대를 통해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연세대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만족한다. 국가대표도 길게는 하지 못했지만 경험해 봤고 프로 생활도 꽤 오래 했다. 연세대 출신 허정무 감독님과 정병탁 감독님도 프로에서 다시 만났고 장외룡 감독님과도 함께 했다. 연세대에 진학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다.

김봉길 감독은 인천에서 코치와 감독대행, 정식 감독으로 7년의 세월을 함께했다. ⓒ인천유나이티드

당신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도 황선홍, 홍명보와 함께 대학생 신분으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됐다. 엄청난 일 아닌가.

하지만 나는 마지막에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참 많이 아쉽지만 그건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다. 우리 때는 선배들이 너무 쟁쟁했다. 변병주를 비롯해 정해원, 김주성, 황보관, 최순호 등이 있었는데 그 벽이 너무 높았던 것 같다. 내가 1988년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 이란전에서 황선홍의 A매치 첫 골을 어시스트한 사람이다. 지금도 황선홍 감독을 만나면 “너 나 때문에 큰 거야”라고 장난을 친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그 당시 가장 기량이 뛰어났던 선배는 누구인가. 쟁쟁한 선수들이 참 많을 때였던 것 같다.

단연 (김)주성이 형이다. 독보적이었다. 1988년 아시안컵 결승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승부차기 끝에 져서 준우승에 그쳤는데도 그 형이 MVP를 받을 정도였다. 체력이면 체력, 스피드면 스피드, 기술이면 기술 약점이 없는 선수였다. 공격수로는 아시아에서 단연 독보적인 선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당신은 프로 무대에서는 학창 시절 만큼의 활약을 선보이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래도 10년 동안 프로 생활을 하면서 286경기에 뛰었으니 1년에 30경기 정도씩은 뛴 거다. 부상 당해서 한 시즌 동안 6경기밖에 나가지 못한 해가 있었는데 이 정도면 꾸준한 주전이긴 했다. 1993년도가 전성기였는데 당시 우리 유공이 성적은 좋지 않았음에도 내가 팀에서 유일하게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까지는 최고의 선수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는데 프로 무대에서는 그 정도까지는 못했다. 체력적인 약점이 프로에 와서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던 것 같다. 많이 뛰는 프로 경기는 아마추어 경기와는 다르더라. 그 벽에 자주 부딪혔고 결국 학창 시절 만큼의 날카로운 공격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당신은 유독 허정무 감독과의 인연이 깊다. 전생에 연인이었던 것 같다.

연세대 시절 스승인 정병탁 감독님과 전남에서 다시 만났다. 그런데 1996년도 시즌 중반에 정병탁 감독님이 팀을 나가시고 허정무 감독님이 새 사령탑으로 부임하셨다. 그때 내가 주장이었는데 1997년까지 주장을 한 뒤 1998년 선수 생활을 끝냈다. 그때 나는 은퇴를 하고 허정무 감독님은 대표팀을 지휘하러 떠나셨다. 그렇게 허정무 감독님과 잠시 멀어졌다가 용인축구센터에서 다시 만났다. 내가 부평고 감독이었는데 다시 2000년에 용인축구센터에서 만났다가 같이 전남드래곤즈로 옮겼다. 나는 허정무 감독님을 보좌하는 코치였다. 그때가 2005년이었는데 전남이 FA컵에서 2연패를 할 때 함께 했다. 그리고 허정무 감독님은 2007년 겨울에 또 다시 대표팀 감독이 되셨고 다시 헤어졌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인천유나이티드 코치로 왔는데 허정무 감독님이 2010년 남아공월드컵이 끝나고 인천 감독으로 오신 거다. 허정무 감독님과는 첨 질기고도 신기한 인연이다.

나도 허정무 감독과 인터뷰도 해보고 접해 봤지만 굉장히 무섭기도 하고 어렵다. 당신은 오랜 시간 동안 허정무 감독과 함께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

지금도 사실 제일 어려운 분 중에 한 분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되게 여리고 정도 많은 분이기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누구한테 혼을 내면 스스로 미안해서 그 감정이 오래 못 가는 분이다. 축구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셔서 허정무 감독님 밑에서 많이 배웠다. 나는 정말 복 받은 사람이다. 허정무 감독님 밑에서도 많이 배웠고 다른 지도자들로부터도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대해 많이 배웠다. 장외룡 감독님은 절대 남을 탓하지 않고 자기가 다 책임을 진다. 페트코비치 감독님 역시 잘한 거는 선수들에게 돌리고 자기는 늘 그림자 역할만 한다. 나는 36살에 부평고 감독으로 첫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답답하면 내가 시범을 보이고 그랬다. '나도 이렇게 하는데 왜 너희는 못해?' 이런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여러 감독님을 겪으면서 내 지도 방식도 바뀌게 됐다.

인천에서는 두 번이나 감독대행을 맡았다. 내가 보기엔 감독대행이나 감독이나 선수들을 지도하는 건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 않다. 페트코비치 감독이 가정 문제로 갑자기 팀을 떠났을 때 감독대행을 해보니 감독대행은 팀과 선수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그저 이 시기만 넘기기 위한 '땜빵' 아닌가. 선수들도 굉장히 혼란스럽고 나 역시 애매한 신분으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굉장히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한 달만 버티면 그때는 다음 감독님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들더라. 선수들도 정식 감독과 감독대행을 받아들이는 건 다르다. 감독대행은 다시 코치로 내려갈 수도 있고 새로운 감독이 오면 팀을 나갈 수도 있다. 감독대행은 감독인 척 하기에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감독이 아닌 척하는 것도 이상하다. 감독대행은 선수단을 장악하는 부분도 힘이 든다.

김봉길 감독은 인천에서 코치와 감독대행, 정식 감독으로 7년의 세월을 함께했다. ⓒ인천유나이티드

감독대행은 감독인 척 하기가 어색해서인지 경기장에 정장이 아닌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오는 모습을 자주 봤다. 당신도 그랬던 것 같다.

맞다. 한 번은 경기장에서 인사하는데 신태용 감독이 나한테 “아, 형. 경기장 나올 때 정장 좀 입고 나와. 추리닝이 뭐야”라고 하더라. 그래서 “야, 형은 대행이잖아”라고 했더니 “대행도 감독이지” 그러더라. 미팅을 하는데 코치들도 “감독님 트레이닝복 입고 경기장에 나가는 거 저희가 보기에도 좀 그렇습니다”라고 하더라. 나는 감독이라는 자신감도 없었고 금방 다른 감독이 선임될 거라고 생각했다. 감독대행을 하면서 성적도 계속 좋지 않아 내가 계속 기회를 받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당신은 두 번의 감독대행 끝에 결국 인천의 정식 감독이 됐다. 당신이 정식 감독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두 번째 감독대행을 하고 7경기에서 한 번도 못 이길 때였던 거 같다. 그때는 선수들한테 말은 못했지만 경기장에 나가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사실 무승이 계속되면서 조용히 구단에 감독 선임해달라고 말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한 번은 주장이었던 (정)인환이가 나한테 “경기장에서는 정장을 입으시면 안되겠냐”고 말했다. 계속 안 입으니 2012년 스승의 날에 선수들이 돈을 모아서 정장을 한 벌 사왔다. 다른 코치들이 내게 "선수들이 직접 자기들 손으로 감독으로 만들고 싶어하고 함께 끝까지 가고 싶어 해요"라고 말해줬다. 그 정장 한 벌이 나에게는 큰 용기가 됐다. 서포터즈 대표도 정장을 또 한 벌 선물했다. 학생들이 천 원, 이천 원씩 모아서 산 거란다. 내가 어떻게 다시 일어서지 않을 수 있겠나. 너무 감동적이었다.

참 인천 선수들이나 팬들도 대단하다. 그렇다면 언제가 정식 감독이 되는 분수령이었나.

두 번째 감독대행을 하면서 5경기 정도 지나고 나서부터 경기장에 가면 기도부터 했다. ‘어머니 아버지. 제발 오늘은 이기게 해주세요.’ 이미 준비할 만큼 다 준비한 뒤로는 모든 걸 하늘의 뜻에 맡겼다. 처음 감독대행을 할 때는 5경기를 모두 졌었는데 두 번째 감독대행을 하고도 한 경기도 못 이기고 있어서 ‘언제 떠날지 모르지만 제발 한 경기만 이기게 해달라’고 빌었다. 부모님한테도 빌고 하나님한테도 빌고 빌 수 있는 데는 다 빌었다. 그런데 계속 첫 승을 거두지 못하고 연속 무승은 12경기까지 늘어났다. 다음 상대는 상주상무였다. 경기 막판까지 0-0 점수가 이어져서 이날도 ‘비기나보다’ 싶었는데 후반 44분 측면에서 날아온 크로스를 설기현이 헤딩골로 연결해서 13경기 만에 승리를 따냈다. 이게 내 감독 대행 인생에 첫 승이었다. 그 경기 이후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 같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 경기가 끝난 뒤 혼자 몰래 울었다.

나 같아도 그럴 것 같다.

우리 인천 팬들은 어쩜 그렇게 대단한지 모르겠다. 남들은 12경기씩 못 이기면 감독 바꾸라는 말을 진작부터 했을 텐데 나는 13경기 만에 승리를 거두고 나서 팬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경기가 다 끝나고 정리를 한 뒤 선수들을 내보내고 혼자 담배 한 대를 피우고 화장실에 있는데 감정이 확 복 받쳐서 눈물이 나오더라. 팬들에게 고마웠고 미안했다. 그리고 나오는데 갑자기 구단 직원이 “감독님, 지금 팬들이 버스를 막고 있어서 선수들이 나가지를 못해요”라고 하는 거 아닌가. 원래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은 구단 버스를 타고 가고 나는 따로 나가는데 팬들이 선수단 버스를 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사고가 났나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팬들이 내 얼굴 한 번 더 보고 가겠다고 버스를 막아 세운 것이었다. “감독님 빨리 오셔야겠다”면서 구단 직원이 나를 주차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팬들도 울고 나도 또 울었다. 내 이름을 연호해 주는데 너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컸다.

당신은 이후 인천 구단의 역사를 새로 썼다. 인천 정식 감독이 된 뒤 인천 구단 사상 처음으로 19경기 연속무패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구단에 어떤 요구를 했고 어떤 변화가 있었나.

정식 감독 계약 이야기가 나올 때 나는 연봉에 대해서는 구단에 일임했다. 사실 내가 원하는 건 연봉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연봉은 알아서 주시고 대신 저에게는 팀을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달라”고 했다. 구단에서도 동의했고 3년 계약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때가 2013년 시즌 중반이어서 3년 6개월 계약을 확정지었다. 나에게는 돈보다도 이 한 팀을 안정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는 게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인천 시절 당신이 꼽는 최고의 경기는 어떤 경기였나. 나는 2013년 전북과의 홈 경기에서 거둔 인천의 3-1 승리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많은 분들이 그 경기를 말씀해 주시더라. 나 역시도 굉장히 기억에 남는 경기였다. 그리고 2013년에 비 오던 날 안방에서 서울을 3-2로 이겼던 경기도 잊을 수 없다. 빠울로가 결승골을 넣었던 경기다. 그 전에는 그해 서울 원정에서도 3-2 승리를 거뒀었는데 그 경기 역시 극적이었다. 서울이 워낙 강팀이라 상대하기가 쉽지 않은데 명승부를 연출했다.

유독 서울을 상대로 명승부를 많이 펼쳤던 것 같다. 서울을 이기는 공략법이라는 게 있는 건가.

최용수 감독이 내 후밴데 경기장에서 만나면 늘 그랬다. “형, 오늘은 또 뭘로 우릴 죽일 거야.” 나는 인천에 있으면서 수비적인 축구를 한 적은 없다. 상대가 강해도 내려서지 않고 정상적인 경기를 하면 맞받아쳤다. 아무래도 서울이 당시 인천을 만나면 인천 특유의 포기하지 않는 끈끈한 플레이에 지쳐서 떨어지는 경우가 생긴 것 같다. 서울은 실력이 있고 깨끗하고 깔끔한 스타일이다. 샤프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인천 선수들은 투박하지만 끈끈하다. 거기에 서울이 자주 당했다.

한일전으로 이해하면 될까. 일본은 늘 기술이 좋고 깔끔하지만 투박한 한국에 당한다.

그런 비유라면 나도 동의할 수 있다. 비슷한 맥락이다. 인천한테는 매운 맛이 있다. 그런데 2014년에는 서울에 많이 당했다. 1-5로도 졌고 1-3으로도 패했다. 최용수 감독은 서울을 정상의 팀으로 만든 시기였고 우리는 주전 선수들이 많이 팀을 떠나면서 전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김봉길 감독은 인천에서 코치와 감독대행, 정식 감독으로 7년의 세월을 함께했다. ⓒ인천유나이티드

꼭 서울전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후반 투입된 선수들을 이용해 마술을 자주 부렸다. 이걸 우리는 ‘봉길매직’이라고 불렀다.

과찬이다. ‘봉길매직’은 내가 아니라 선수들이 만들어 준 거다. 나는 프로에서는 초보 감독이었고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상대팀에 대한 분석도 철저히 하면서 우리 선수들에 대한 분석도 많이 했다. 아마 다른 팀 감독님들도 다 그럴 것이다. 구단에 영상 분석팀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상대방 약점을 파고들 후반 작전에 대해 많이 연구했다. 전반에 투입되면 경기력이 별로였지만 후반에 들어가면 괜찮았던 선수들 데이터도 분석해 계획적으로 교체 카드를 썼다. 전반만 잘 버티면 후반에는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선수들이 그런 작전에 잘 따라와 줬고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져서 ‘봉길매직’이라는 과한 칭찬까지도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늘 당신은 겸손하다. 패한 경기에서는 모든 게 감독탓이라고 하고 이긴 경기에서는 그 공을 선수들에게 돌린다.

감독은 선수들이 만들어 주는 거다. 이건 내 철학이다. 감독은 선수들이 잘 나갈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잘 됐을 땐 선수들이 박수를 받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힘들었던 시기도 많았을 것 같다.

물론이다. 특히나 팬들이 열정적인 사랑을 보내주는데 거기에 기대 만큼 성적을 내지 못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특히 2014년도 초반에 참 경기가 안 풀렸다. 그때가 가장 마음이 아팠던 시기다. 선수들도 열악한 환경에서 운동을 하는데 지원을 더 받지 못하는 모습이 아쉬웠다.

인천 감독은 주전급 선수들과도 유독 자주 이별해야 하는 직업이기도 하다. 조금만 실력을 보였다가는 금방 다른 팀으로 이적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인천 감독의 숙명이다. 나도 인천에 있을 때는 구단이 선수를 판다고 할 때 속된 말로 ‘뗑깡’도 부려봤다. “이 선수는 절대 이적 못 시킵니다”라고 해봤는데 감독이 구단 방침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나. 못 이긴다. 선수도 재정적으로 더 풍부하고 좋은 조건에서 운동을 하고 싶으니 설득할 수가 없다. 감독 입장에서는 공들여서 1년 동안 만들어 놓은 팀을 다시 동계훈련부터 새로운 팀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열악한 시민구단인 인천으로서는 이게 어쩔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다.

여러 선수들을 다른 팀으로 보냈는데 특히나 가장 아쉬웠던 선수는 누구인가.

(김)남일이다. 구단은 남일이 연봉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었고 남일이는 또 자기 나름대로 구단이 자신을 홀대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건 물론 내 추측이다. 개인적으로는 고향도 인천인 남일이가 구단에 남아 레전드가 돼 주길 바랐는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더라. 이미 구단과 에이전트가 다 일을 진행하고 결정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남일이는 훈련장에 가장 먼저 나오고 훈련 도중에도 가장 솔선수범하고 후배들한테 직접 지도까지 하는 자세가 너무나도 좋았다. 코치 역할까지 자처한다. 자기가 돋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불편하다는 이야기는 안 하고 후배들 불편한 거만 챙긴다. 사비를 털어 후배들 고기도 사주더라. 그런 선수가 팀을 떠나는데 아쉽지 않을 감독은 없을 것이다.

인천 감독 시절 너무 베스트11에 변화가 없고 전술도 일관적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실험은 훈련 때 다 한다. 프로 무대는 시험장이 아니라 전쟁터다. 이미 훈련 때 이것저것 다 해 보고 가장 최적의 조합을 경기장에 내보내야 한다. 2012년에 11경기 연속 무패를 할 때 우리는 일찍 강등권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우리는 리그가 끝날 때까지 베스트11를 모두 경기에 투입했다. 꾸릴 수 있는 최상의 전력을 다하는 게 팬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철학이 정답일 수는 없지만 나는 이 내 철학을 믿는다. 물론 베스트11을 짤 때 나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니라 코치진들도 다같이 모여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 인천이 선수층이 두텁지 못해 주전 선수와 백업 선수 간의 경쟁이 치열하지 못했다는 점은 늘 감독으로서 안고 갈 숙제였다.

그렇다면 구단의 해임 과정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 해달라.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2014년에 10위를 했는데 구단에서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나에게 자진사퇴를 요구하더라. 3년 6개월 계약 중에 1년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내 임기 동안은 그래도 끝까지 해보고 싶었지만 구단의 생각은 달랐다. 나한테는 성적 부진에 대해서만 말했지만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치적인 문제도 있어 보였다. 1년 더 남아 팀을 다시 일으킬 상황이 아니었다. 어떻게 더 구단에 따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계약 기간 1년을 더 남겨 놓고 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인 문제라는 건 정확히 어떤 건가.

나한테는 직접적으로 구단에서 이야기해 주질 않았지만 사실 경질 전부터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평생 축구만 해온 사람이 여당, 야당 뭐 아는 게 있겠나. 정치는 잘 모른다. 그런데 내가 감독으로 있을 때 인천시장이자 우리 구단주가 송영길 시장이었다. 무슨 일이 있거나 상의할 일이 있을 때 구단주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게 감독 아닌가.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송영길 사람’이라고 분류가 돼 있더라. 다른 당의 후보가 차기 시장이 되면서 정치적인 입김이 꽤 많이 작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리그 10위가 성적부진이라는 점에는 동의하나. 인천은 늘 잔류만 해도 성공인 팀 아닌가.

10위를 했으니 좋은 성적이라고는 볼 수 없다. 구단 입장에서는 뭐 충분히 성적 가지고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물론 선수 핑계를 댄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해에는 남일이도 떠났고 선수 보강도 참 아쉬웠다.

김봉길 감독은 인천에서 코치와 감독대행, 정식 감독으로 7년의 세월을 함께했다. ⓒ인천유나이티드

그렇다면 혹시 인천에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아 있나. 오랜 시간 정들었는데 참 복잡한 감정일 것 같다.

지금은 나쁠 건 전혀 없다. 시간도 지났고 이제는 서운한 감정도 다 털어냈다. 솔직히 팀을 떠날 때는 서운했지만 2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와 7년을 함께 한 팀 아닌가.

인천 경기장에는 자주 가는 편인가.

지난 시즌에도 K리그 경기장을 자주 찾았는데 솔직히 인천 경기장으로는 발길이 잘 가질 않더라. 마음으로는 응원하고 있지만 인천 경기장에 가면 아는 분들도 많은데 백수가 인사하고 다니기도 그래서 다른 경기장엘 더 많이 갔다. 하지만 영상을 통해서는 빠짐 없이 인천 경기를 챙겨봤다. 내가 데리고 있던 김용환, 진성욱도 많이 좋아졌고 내가 있을 때는 없었던 선수 중에는 박대한과 권완규도 제몫을 잘 해주더라. 그런데 이 두 친구도 이번 시즌을 앞두고 전남과 포항으로 이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천을 떠나 있지만 그래도 신인 선수들의 이적 소식까지 꿰고 있을 정도면 이건 거의 헤어진 여자친구 인스타그램을 들여다 보고 있는 수준이다.

김도훈 감독이 인천에서 첫 승을 했을 때는 축하 전화도 했다. 내 후임 감독이고 좋아하는 축구인으로서 축하 전화는 해야 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김도훈 감독도 고생을 많이 하지 않았나. 내가 인천에서 느끼는 그런 기분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인천은 원래 첫 승이 더딘 팀이라고 잘 될 거라고 전해줬는데 며칠 전에도 김도훈 감독이 나를 찾아와서 같이 식사도 했다. 김도훈 감독이 “앞으로 조언 많이 부탁한다”고 하기에 “조언할 건 없고 힘들고 괴로울 때 내가 소주 한잔 사겠다”고 했다. 울산에서도 잘 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지난 시즌에도 몇몇 K리그 팀과 중국 프로팀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구체적인 제안은 아니고 혹시 우리 팀을 맡을 생각이 있느냐는 정도였다. 어느 무대건 이제는 빨리 현장에 돌아가고 싶다. 또한 인천에 있을 때도 늘 선수한테 존경받는 감독이 되어야 한다는 지도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철학을 어디에서건 다시 한 번 펼쳐보고 싶다. 선수들이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축구를 할 수가 없다. 선수들에게 존경받는 지도자가 돼 다시 한 번 성과를 내보고 싶다.

김봉길 감독은 잠시 경기장을 떠나 있지만 언제든 돌아올 준비를 마친 상태다. 늘 잘못은 혼자 책임지고 공은 선수들에게 돌리던 이 멋진 철학을 갖춘 지도자가 다시 우리들 앞에 섰으면 좋겠다. 그가 K리그에서 보여준 ‘매직’을 넘어선 ‘감동’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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