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은 이렇게 1990년 우여곡절 끝에 손을 맞잡고 평양에 섰다. ⓒMBC 방송 화면 캡처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대한민국 여자축구 대표팀이 역사적인 평양 원정을 떠날 수도 있다. 대한민국은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아시안컵 예선 조추첨에서 북한, 우즈베키스탄, 홍콩, 인도와 B조에 편성됐다. B조 예선이 평양에서 모두 열리는 가운데 대한민국은 오는 4월 7일 북한과 대결을 펼치게 됐다. 물론 북한이 이를 거부해 제3국에서 경기를 치를 가능성도 적지 않다. 지금껏 우리 선수들이 평양에서 경기를 펼쳤던 적은 딱 한 번뿐이다. 그런데 이 경기 결과에 대한 보도는 많지만 평양 원정이 성사되기까지의 이야기는 잘 전해지지 않았다. 아마도 대한민국 여자 대표팀의 평양 원정 성사 여부는 이 딱 한 번뿐이었던 경기를 살펴보면 되지 않을까. 시계를 1988년으로 되돌려 보려 한다.

남북 축구 교류, 다이너스티컵이 시초

1988년 중국 광동에서 AFC 총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김우중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은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남한과 북한, 중국, 일본이 참가하는 축구 경기를 개최합시다.”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앞서가던 대한민국과 경기를 치를 기회를 얻는 건 모든 아시아 팀에 이득이었다. 중국과 일본이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하지만 문제는 개최 장소였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고 결국 1989년 2월 제3국인 홍콩에서 경기를 치르는 데 합의했다. 대회 개최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런데 북한에서 갑자기 불참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유는 이랬다. “홍콩 비자 발급이 어려워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상대적으로 실력이 강한 대한민국과 격돌을 피하기 위한 핑계였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북한이 참가를 거부하면서 홍콩에서 열리기로 했던 대회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AFC 관계자들의 의지는 확고했다. “축구로 남북 화해 무드를 조성하겠다”는 것이었다. 탄스리 함자 AFC 회장과 피터 벨라판 사무총장은 북한 측을 포기하지 않고 설득했고 결국 북한의 “참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렇게 1990년 7월 이 대회는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딛게 됐다. 중국 베이징에서 남과 북 그리고 중국, 일본이 참가하는 이 대회의 이름은 바로 다이너스티컵이었다. 이 대회는 1990년부터 1998년까지 4회 대회가 열린 뒤 동사이안컵으로 대체되고 있다.

우려와 달리 남과 북은 얼굴을 마주하자 화기애애했다. 대회 개막 직전인 1990년 7월 26일 저녁 천안문광장 인민대회장 연회실에서는 AFC와 중국축구협회가 주최한 만찬이 열렸다. 이 자리는 남과 북의 화해를 위한 자리였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 끝나고 한 달여가 지난 시점에서 만난 북한 이한복 단장은 덕담부터 건넸다. “월드컵에서 남조선이 체력과 기술이 세계 수준에 조금 미치지 못했을 뿐이지 남조선은 잘했습니다.” 이미 1989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전을 통해 익숙해진 선수들도 서로를 스스럼 없이 대했다. 북한 대표 김영남은 “변병주와 친해졌는데 왜 이번 대회에는 안 나왔느냐”고 물었고 서로 나란히 기념 촬영을 하기도 했다. 대표팀 경기가 열리는 기간 동안 남과 북 관계자들이 자주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고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남과 북은 1990년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친선 경기를 펼쳤다. 잠실올림픽경기장에서 맞붙은 남과 북 선수들의 모습.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정책방송원

남측의 제안과 북측의 화답

남과 북이 맞붙는 1990년 7월 29일, 이 경기보다 역사적인 장면이 그라운드 밖에서 연출됐다. 김용균 체육차관은 대한민국을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고 강득춘 인민체육위원회부위원장도 북한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이 둘이 즉석에서 만남을 갖게 됐다. 이념 논쟁이 한창이던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에 접어 들면서 눈을 의심할 만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6.25 전쟁 이후 제3국에서 이뤄진 남북한 체육관계 인사의 접촉으로는 최고위급 만남이었다. 귀빈실에서 만나 덕담을 나누던 중 김용균 체육차관이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6.25 이후 중단됐던 경평 축구를 부활시키는 게 어떻습니까.” 이뿐 아니었다. 이 둘은 처음 만났지만 오랜 시간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스포츠로 남과 북이 교류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경평 축구 부활과 함께 대한민국이 여러 제안을 했다. 서울에서 1990년 11월 열리는 월드복식탁구대회와 12월 세계핸드볼선수권대회, 1991년 1월 한국오픈배드민턴선수권대회에 북한 팀을 초청했고 부산-신의주 남북 종단 역전마라톤대회와 서울-평양 사이클대회 개최도 제의했다. 노태우 정부 들어서 서서히 남북 교류가 활발해지려던 참이었고 1990년 10월 평양에서 남북 총리회담도 예정돼 있던 터라 스포츠를 통한 화해 분위기에 북한도 호의적으로 답했다. “좋은 제안입니다. 평양으로 돌아가 연구하고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김용균 체육차관이 이렇게 말했다. “평양 체육 당국과 협의해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면 즉각 알려주세요.” 북한도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었다. “긍정적인 결과가 있으면 판문점을 통해 바로 알리겠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1990년 9월 16일 판문점에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북한 측의 연락문은 이랬다. “베이징 아시안게임이 끝나는 10월 7일 이후 일주일 안에 북과 남의 대표팀 친선 축구 경기를 엽시다.” 여러 제안 중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남북 축구부터 부활하자는 것이었다. 북한 측에서는 10월 14일 평양에서 경기를 열고 이후 곧바로 서울에서 경기를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1946년 이후 무려 44년 만에 평양에서 남북 축구 경기가 열리게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었다. 이때부터 남과 북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를 극비 사항으로 유지하면서 실무 접촉을 갖기로 한 것이다. 박종환 대표팀 감독에게도 이러한 지시가 내려졌다. “평양에 갈 준비를 하라.” 이렇게 양 측이 호의적인 가운데 평양 원정이 물밑에서 속전속결로 이뤄지고 있었다.

남북 축구, 물거품이 될 위기의 순간

1990년 9월 18일 정부 고위 관리들과 언론사 사장단의 오찬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한 정부 고위 관리가 언론사 사장단에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이야기를 전달했다. “남북 축구 경기가 곧 평양에서 열릴 겁니다. 베이징 아시안게임 기간 동안 남북체육회담이 열릴 예정인데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논의가 이뤄질 계획입니다. 아마도 21일이 될 겁니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보도를 삼가주세요.”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이 소식은 세상에 알려졌다. 일부 언론에서 ‘특종’이라며 남과 북의 축구경기가 평양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대서특필했기 때문이다. 곧바로 체육부 측으로 확인 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했고 당황한 체육부 측에서도 어쩔 수 없이 공식 발표를 해야 했다. “남과 북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친선전을 치르기로 합의했습니다.” 대한민국은 마치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것처럼 들떴고 언론은 신이 났다.

하지만 여기에서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북한 측이 “그런 사실이 없다”며 합의를 부인한 것이었다. 북한축구협회 대변인은 공식 보도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북남 축구 경기를 갖자고 남조선축구협회에 전문을 보낸 사실이 없습니다.”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참관하던 장웅 북한올림픽위원회 사무총장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면서 이를 극구 부인했다. 그러자 체육부도 난감해졌고 결국 말을 바꾸고 말았다. “북측과 이에 대해 공식 합의한 것은 아닙니다. 북측이 평양에서 친선경기를 하자는 전문을 우리에게 보낸 적은 없습니다. 북측으로부터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는 정도의 반응이 있었을 뿐입니다.” 곧바로 체육부와 정부에 대한 질타가 쏟아졌다. 1990년 10월 17일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앞서 정부 주도의 남북 교류를 과시하게 위해 축구 대표팀을 평양에 먼저 보내려는 계산에 바빠 정부가 이를 과대포장했다는 비난이 거셌다.

베이징에서 최종 합의만 하면 되는 순간이었지만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갈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역사적인 평양 원정을 눈 앞에 두고 또 다시 먼 길을 돌아가야 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북한 측에서는 자신들도 남북 스포츠 교류를 하면서 이점을 누리고 싶었는데 남한이 먼저 대대적인 언론 보도로 혼자 이점을 누리니 당연히 이게 불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양 측은 또 다시 조용히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정동성 대한민국 체육부장관과 김유순 조선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이 극비리에 중국 베이징에서 1990년 9월 23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유순 위원장은 남측이 먼저 이 사실을 보도한 것에 대해 불쾌감을 나타냈지만 그럼에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가 없었다. 남북 고위 인사들이 남북 축구 친선전 개최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고 양 측 누구도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과 북은 1990년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친선 경기를 펼쳤다. 잠실올림픽경기장에서 맞붙은 남과 북 선수들의 모습.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정책방송원

서로 양보해 성사될 수 있었던 경기

노태우 정부가 북한에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고 곧 남북 총리회담도 열리게 될 상황이었다. 후안 아벨란제 FIFA 회장은 “2002년 월드컵을 아시아에서 개최하고 싶은데 대한민국이 이 개최권을 얻기 위해서는 남북 통일이 우선시 돼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도 남북 교류는 필요했다. 이 무렵 ‘대북밀사’로 통하는 박철언 의원도 베이징으로 향했다. 박철언 의원은 “개인적인 일로 중국에 왔다”고 했지만 이 시기 박철언 의원이 중국에 갈 뚜렷한 현안은 없었다. 그런데 딱 이때 북한 이종옥 부주석도 베이징에 있었고 세 차례나 비밀리에 이 둘이 접촉했다는 사실이 포착되기도 했다. 청와대가 박철언 의원에게 “어떤 양보를 하더라도 남북 축구 교환 경기를 성사시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소문도 사실처럼 전해졌다. 양 측의 의지가 강력하다보니 ‘오프 더 레코드’가 깨졌어도 협상은 계속됐다. 물론 세상은 이미 남북 축구 교류가 물거품으로 끝난 줄 알고 있었다.

북한 측에서는 가장 부담스러웠던 게 남자 축구가 대한민국이 더 강했다는 점이다. 안방인 평양에서 44년 만에 치르는 경기인데 패할 경우 타격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대한민국에서도 한 발 양보했다. “그렇다면 북측이 강한 여자 축구 경기도 같이 치릅시다.” 서로 한 발씩 양보하면서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북한 측에서는 대한민국 선수들이 평양에 오는 경비만 대면 체재비는 자신들이 부담하고 신변 안전 또한 북한 사회 안전부가 보장하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1990년 9월 28일 오후 7시 베이징의 한 식당에서 남북 대표가 비밀리에 만나 최종 사인을 했고 다음 날인 1990년 9월 29일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발표가 이뤄졌다. 장충식 남측 수석대표와 김형진 북측 수석대표는 베이징 아시안게임 메인 프레스센터에서 같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10월 11일 평양, 10월 23일 서울에서 남북한 축구 남녀대표팀이 남북 통일을 기원하는 통일 축구 대회를 열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공식 발표였다. 이미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깜짝 놀랄 소식이었다. 전체적인 틀도 확정됐다. 대회 명칭은 ‘남북 통일 축구 대회’로 정해졌고 대한민국 측 선수단이 10월 9일 베이징에서 조선민항기편으로 평양으로 가 4박 5일간 체류하기로 했다. 유니폼은 국기 표시 없이 남측은 붉은색, 북측은 흰색을 착용키로 했다. 공식 발표 이후 곧바로 남과 북은 그날 오후에도 바로 만났다. 세부 업무 협의를 위해서였다. 남과 북이 상호 중계 방송을 한다는 데는 원칙적인 합의를 했지만 양 측 방송 시스템에 달라 송출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원칙적인 합의를 한 상태여서 논의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런데 평양에서 열리는 이 경기에 대해 국내에서 이념 논쟁이 다시 불붙기도 했다. 대한민국 선수단이 평양을 방문하는 시기가 북한의 노동당 창건일과 겹친다며 반발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병렬 공보처장관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 측이 먼저 제안한 일이고 이를 실현시키려다 보니 그러한 결과가 나왔다. 우연의 일치다”라는 해명까지 해야 했다.

남과 북은 1990년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친선 경기를 펼쳤다. 잠실올림픽경기장에서 맞붙은 남과 북 선수들의 모습.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정책방송원

여자 대표팀은 평양에 갈 수 있을까

남과 북은 대한민국 선수단의 평양 방문 하루 전까지도 만나 실무 문제를 협의했다. 1990년 10월 8일 오전 10시부터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연락관 접촉을 갖고 선수단 및 보도진의 체류 일정을 면밀히 논의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범민족통일음악제에 참가하는 예술인들의 방북 실무 문제까지도 논의됐다. 남과 북이 이렇게 스포츠와 예술 분야의 교류를 위해 논의한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평양에 방문하는 역사적인 1990년 10월 9일이 밝았다. 체육 관계자 및 임원 17명과 남자 선수 21명, 여자 선수 18명, 기자 20명 등 총 76명이 베이징에서 조선민항기를 타고 북경으로 향한 것이다. 1990년 10월 9일 오전 9시 30분, 이들을 태운 조선민항기는 평양 순안비행장에 착륙했고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선수들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 여자축구 대표팀이 과연 평양 원정을 치를 수 있을까. 이는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우선적으로 남과 북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어렵다. 화해 무드가 이어져도 쉽지 않은 판국에 지금처럼 교류가 완전히 끊긴 상황이라면 더더욱 힘들 것이다. 여기에 평양 원정이 성사되려면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고 양보를 통해서라도 이를 성사시킬 의지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남과 북 모두 그럴 의지가 없어 보인다. 아마도 대한민국 여자축구 대표팀이 태극마크를 달고 애국가를 울리며 평양에서 경기를 하는 건 지금 상황에서는 쉽지 않을 것 같다. 1990년처럼 다시 평양에서 남과 북이 축구하는 모습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1990년 당시 평양에 가는 대한민국 선수단의 비자 문제가 논란이 됐을 때 베이징주재 북한 대사관의 한 간부가 한 말을 전한다. 아마도 이 말이 정답이지만 이 정답을 풀기까지는 아직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같은 민족이 자기 땅에 가는데 비자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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