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문정식 선생(왼쪽 슈팅하는 선수)은 제일모직에서 맹활약하며 팀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한국 축구 역사를 뒤져 보면 짧으면서도 강렬했던 한 팀이 있다. 바로 제일모직 축구단이다. 이 팀은 급속도로 성장해 한국 축구를 정복했지만 또 급격히 쇄락하고 말았다.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지금부터 제일모직 축구단의 흥망성쇠를 소개하려 한다. 이 팀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현재 상황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수 싹쓸이한 제일모직, 축구계를 평정하다

삼성그룹 모태 기업 중 하나인 제일모직은 1954년 설립됐다. 모직 사업을 시작해 이후 합섬 등 직물 전반으로 시장을 확장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이병철 회장은 1962년 4월 제일모직 이름의 축구단 창단을 지시했다. 연고지는 제일모직 공장이 있던 대구였다. 군팀이 기세를 떨치던 당시 제일모직 축구단 창단은 대단한 의미를 지녔다. 제일모직은 초대 사령탑으로 배종호 감독을 선임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 주장으로 활약했고 광복 이후 한국 대표로 런던올림픽에 나서기도 했던 배종호 감독은 인천조일양조와 대전방직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다 야심차게 출범한 제일모직 감독에 부임했다.

제일모직은 창단하자마자 열풍을 일으켰고 곧바로 1962년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실업 축구 최강의 자리에 섰다. 특무대와 헌병감실 등 군 팀이 강세를 떨치던 시대에 갓 창단한 실업 팀이 곧바로 정상에 올랐으니 축구계가 발칵 뒤집힌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제일모직은 이렇게 1962년 그 찬란한 역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1963년 1월 16일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신생팀을 정상으로 올려놓았던 배종호 감독이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뜬 것이었다. 몸이 좋지 않았던 배종호 감독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열리는 제일모직의 합숙훈련을 지휘하다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고 급하게 병원으로 옮겼지만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자 제일모직은 또 다른 명장을 모셔왔다. 동래고를 지휘했던 안종수 감독이었다.

안종수 감독이 이끌게 된 제일모직은 곧바로 화끈하게 선수 영입에 나섰다. 1962년 종합축구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실업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내던 대한중석의 주전급 선수들을 모조리 스카우트한 것이다. 제일모직은 1963년 3월 파격적인 발표를 했다. “문정식과 김홍복, 임영국 등 대한중석 선수 5명을 영입했습니다.” 이들은 대한중석은 물론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하는 주전급 선수였다. 지금처럼 프로선수들의 다년 계약 개념이 없으니 대한중석은 주전 선수들을 대거 빼앗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한중석이 단단히 화가 났다. “팀 간 선수 쟁탈이 계속된다면 정상적인 실업 축구 발전을 바랄 수 없다. 수긍할 수 없는 추잡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대한체육회가 우리의 선수 탈취 조정을 거부한다면 3월 21일을 기해 팀을 해체하겠다.” 대한중석은 대한체육회에 조정안을 냈다.

1950~60년대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활약할 당시 故차태성 선생의 모습. 차태성 선생은 제일모직에서도 좋은 플레이를 선보였다.

제일모직의 찬란했던 영광

하지만 이 조정안은 거부됐고 결국 대한중석은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해체는 없던 일이 됐고 제일모직과 대한중석은 중요한 길목마다 격돌하며 라이벌로 성장했다. 그렇게 1963년에도 막강한 선수 영입으로 순항하던 제일모직은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준결승까지 오른 뒤 결승 길목에서 특무대를 만났다. 특무대는 이미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세 차례나 우승을 차지했고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는 다섯 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강팀 중의 강팀이었다. 차태성과 정순천 등 대표급 선수들을 보유한 특무대는 강했다. 이 경기에서 제일모직은 특무대와 90분 동안 0-0 무승부를 기록한 뒤 대회 규정에 따라 추첨 끝에 극적으로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결승전 역시 힘겨웠다. 제일모직과 서울시경의 경기를 보기 위해 서울 효창운동장에는 무려 1만여 명의 관중이 들어찰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효창운동장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결승전에서 제일모직은 서울시경을 상대로 경기 초반 유판순이 쇄골 부상으로 교체되는 등 힘겨운 승부를 펼쳤고 90분 경기 동안 또 다시 0-0에 그쳤다. 그리고 연장 7분 마침내 제일모직이 일을 냈다. 문정식이 극적인 결승골을 기록한 것이다. 이후 서울시경이 급하게 공격하는 틈을 타 제일모직이 쐐기를 박았다. 연장 후반 2분 조윤옥이 한 골을 더 만회하며 2-0 승리를 차지했다. 준결승에서도 혈투를 펼쳤던 제일모직이 결승전에서도 힘겨운 승부 끝에 마침내 감격적인 우승컵을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군 팀이 점령했던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제일모직의 창단 최초 우승이었다. 당시에는 제일모직 축구단을 ‘일모 축구단’이라고 불렀는데 바야흐로 ‘일모 시대’의 시작이었다.

제일모직은 대회가 끝난 9월 좋은 선수들을 싹쓸이 했다. 특무대의 주전이었다가 제대한 5명 중 무려 네 명이 곧바로 제일모직에 입단했다. 차태성과 정순천, 김순옥, 이현 등이 그 주인공이었다. 연세대에 복학한 이요원을 제외하고는 제일모직이 특무대 선수를 모두 데려온 것이다. 제일모직은 가뜩이나 강력한 전력에 이 선수들까지 가세하면서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와 추계실업선수권, 전국체전, 도시대항축구제전 등 거머쥘 수 있는 모든 대회의 트로피를 한 해에 다 거머쥐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특히나 1963년 9월 29일과 30일, 이틀에 걸쳐 펼쳐진 추계축구종합선수권대회는 역사에 남을 명승부였다. 당시 규정은 승부차기 없이 승부가 날 때까지 연장전을 펼치는 것이었는데 29일 열린 결승전에서 제일모직은 한국전력과 90분 경기에 이은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 그리고 김호의 가세

그런데 이때 해가 지고 말았다. 당시 결승전이 열렸던 효창운동장에는 제대로 된 조명 시설이 없었고 심판은 논의 끝에 이렇게 선언했다. “내일 다시 재경기를 펼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29일 저녁까지 120분 경기를 펼쳤던 두 팀은 다음 날 낮 3시부터 다시 90분 경기에 임했다. 제일모직 선수들도 체력적으로 힘들어 했지만 한국전력은 전날 부상을 당한 조성달과 심건택, 임경진 등이 마땅한 교체 자원이 없어 그대로 출전을 강행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그런데 이 경기 역시 90분 동안 득점을 기록하지 못한 채 0-0으로 마무리 됐고 또 다시 연장 전,후반 30분 경기가 펼쳐졌다. 하지만 유독 골운이 없었다. 또 한 번 120분 사투를 벌였음에도 스코어는 여전히 0-0이었고 주심은 연장 전,후반 30분 경기를 한 번 더 치르기로 했다.

이 역시도 팽팽한 승부였고 연장 2회 후반 15초를 남기고 마침내 역사적인 골이 터졌다. 제일모직 문정식의 코너킥이 한국전력 수비수에 맞고 흐르자 차태성이 강력한 슈팅으로 연결하며 골망을 흔든 것이다. 무려 270분 간의 혈투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제일모직은 이렇게 정규 90분 경기 두 번과 연장 3회라는 사상초유의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1963년 실업 무대를 통일했다. 이 대회는 대표 선수 선발전을 겸한 경기였는데 문정식과 차태성을 비롯해 제일모직 선수들이 대거 대표팀 유니폼을 입게 됐다. 하지만 제일모직의 선수 보강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1964년을 앞두고 안종수 감독은 눈 여겨 봤던 선수 한 명을 더 영입했다. 바로 이후 불세출의 수비수가 된 김호였다. 김호는 안종수 감독의 말에 절대적으로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통영고에 다니던 김호를 동래고로 스카우트해 키워낸 이가 바로 안종수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김호 감독은 지금도 故안종수 감독을 선생님으로 모실 만큼 큰 영향을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대학 진학을 고민하던 김호에게 안종수 감독이 러브콜을 보냈다. “우리 팀으로 오거라.” 김호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안종수 감독을 따라 제일모직행을 결정했다. “선생님의 말씀을 절대 따르기로 했습니다. 직장팀에 들어가 가족도 먹여 살려야 했어요.” 더군다나 제일모직은 그 어떤 실업팀에 비해서도 대우가 훨씬 좋았다. 김호는 1964년 4월 제일모직 유니폼을 입고 동대문운동장에서 치른 첫 춘계실업연맹전 첫 경기에서 데뷔골을 넣으면서 신인왕을 차지했고 제일모직은 이 대회에서도 우승을 기록했다. 이병철 회장의 투자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대구 침산동 제일모직 공장 부근에 천연 잔디 축구장까지 건립하는 등 다른 구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축구단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1950~60년대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활약할 당시 故차태성 선생의 모습. 차태성 선생은 제일모직에서도 좋은 플레이를 선보였다.

폭행 사건과 전 같지 않은 운영 의지

1965년 시즌을 앞둔 상황에서는 노장 선수들을 대폭 물갈이하고 한양대의 김경준과 동래고의 박정출 등을 영입하면서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하지만 제일모직은 이 해에 불명예스러운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1965년 5월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전국축계실업축구에서 터진 믿지 못할 폭력 사태 때문이었다. 이날 금성방직을 상대한 제일모직 김홍복은 전반 34분 반칙을 범한 뒤 주심으로부터 경고를 받자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당시 주심을 맡았던 성낙운 심판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도 참가했던 선배 축구인이었다. 그런데 성낙운 주심은 김홍복이 계속 욕설을 하자 퇴장 판정을 내렸고 이때부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김홍복과 문정식, 고일남을 비롯한 제일모직 선수들이 집단으로 주심을 폭행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제일모직 선수단이 주심을 둘러싸고 폭행하는 바람에 무려 20분 동안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제일모직은 7개월 간 출전 금지를 당했고 김홍복은 2년간 자격정치 처분이 내려졌다. 문정식과 고일남 등은 1년간 자격정지가 내려졌고 당시 최치환 대한축구협회장은 제일모직 팀 선수 전원을 중부경찰서에 고발하기도 했다. 결국 폭행에 가담한 제일모직 선수 등 무려 11명이 불구속 기소되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이후 1965년 12월 문정식과 고일남 등은 사면돼 자격정지가 풀렸지만 김홍복은 징계가 계속 이어졌다. 1966년을 앞두고 제일모직은 김홍복을 비롯해 고일남 등 물의를 일으켰던 선수들과 정순천, 강수길 등을 서울시경으로 내보내며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제일모직은 강호로서의 기력이 떨어지고 말았다. 이듬해 시즌 개막까지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공식 경기에 나서지 못하며 감각도 떨어졌고 주전 선수들의 이탈도 뼈아팠기 때문이다. 모기업의 운영 의지도 전 같지 않았다.

1969년부터는 모기업에서 투자가 거의 없어졌고 가까스로 운영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제일모직 측에서는 이런 말을 했다. “섬유업계의 전반적인 부진과 더불어 극도의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구단 직원들은 “우리는 구두쇠”라는 명찰을 달고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일모직이 구단 운영의 의지가 예전 같지 않은 건 다른 이유에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당시 국가의 최고 정보기관인 중앙정부보 산하 양지축구단이 창단한 뒤 선수들을 대거 싹쓸이 했고 1970년 양지축구단이 흐지부지 해산할 무렵에는 축구계 판도가 완전히 변해버렸다. 서울은행과 국민은행, 기업은행, 한일은행, 자동차보험, 농협 등 금융단 팀이 대거 창단한 것이었다.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축구 붐 조성을 위해 금융단 팀 창단을 독려했고 제일모직은 가뜩이나 성적이 안 나오는 상황에서 정부가 해산한 양지팀 선수들을 대거 금융단 팀에만 배정하자 잔뜩 뿔이 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제일모직 축구단

제일모직은 축구단에서 서서히 발을 뺐다. 1971년을 앞두고 선수 영입이 전혀 없었다. 상업은행은 양지 팀에서 나온 김호를 영입하면서 이갑수와 유기흥, 장다석 등도 데려왔다. 신탁은행 또한 고려대를 졸업한 손조명을 비롯해 이세연, 김기복, 정강지, 서윤찬, 임국찬 등 초호화 멤버를 구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일모직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제일모직은 서서히 몰락하고 있었다. 제일모직은 1971년 하위권을 전전하는 팀이 되고 말았고 결국 1972년 1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경영 악화와 섬유업계의 불황 때문에 더 이상 축구단을 운영할 수 없다”며 해체를 선언한 것이었다. 대한축구협회에서는 난리가 났다. 한 팀이라도 더 있어야 실업 축구를 운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삼성 계열의 제일모직이 축구단을 해체하는 건 엄청난 타격이기 때문이다.

충격에 빠진 협회는 제일모직의 일방적인 해체 통보를 듣고 일주일이나 언론 보도를 막았다. 어떻게 해서든 제일모직을 유지해 연쇄 반응을 막기 위해서였다. 장덕진 대한축구협회장이 일본 출장에서 돌아온 이병철 삼성 회장에게 간청하기도 했다. “제발 팀 해체만은 막아달라.”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단호했다.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그때 다시 축구팀을 운영하겠다.”결국 협회에 해체 통보를 한지 일주일 만에 제일모직의 해체 사실이 알려지게 됐다. 여론 악화를 우려한 제일모직은 “선수단 16명 전원을 일반직 사원으로 구제하겠다”면서 슬쩍 빠져 나갔다. 대기업인 삼성그룹의 주력이었던 제일모직은 이렇게 한 순간에 어이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협회가 우려했던 것처럼 연쇄 반응은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일어나고 말았다. 눈치만 보던 한국합판 축구단도 제일모직 해체 발표 이후 두 달 만에 해체를 선언해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삼성이 축구로 돌아오는 데는 무려 24년의 세월이 걸렸다. 삼성은 삼성전자를 앞세워 1995년 수원삼성블루윙즈를 창단해 K리그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쩐지 수원삼성의 모습은 45년 전 제일모직을 참 많이 닮은 것 같다. 기우일 테지만 초반 투자 이후 경영 악화를 이유로 슬쩍 투자를 줄이며 발을 빼려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K리그 참가 이후 3년 만에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가장 앞서 나갔던 수원삼성은 이제 삼성전자가 아닌 제일기획이 운영하고 있다. 제일모직과 제일기획이 동일한 회사는 아니지만 비슷한 구석이 참 많다. 제일기획으로 이관된 이 팀은 허리띠를 졸라 맸고 이제는 투자가 없는 게 당연한 팀으로 인식돼 가고 있다. 기업이 돈벌이가 안 되면 사업을 접을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기업이 스포츠단 하나를 운영하기 싫어 서서히 손을 떼기 위한 작업 중이라면 이 팀에 열광하는 팬 입장에서는 화가 날 것 같다. 아마 기우일 것이다.

1950~60년대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활약할 당시 故차태성 선생의 모습. 차태성 선생은 제일모직에서도 좋은 플레이를 선보였다.

제일모직의 해체를 기억해야 한다

삼성전자가 손을 떼고 제일기획이 축구단을 운영하는 걸 경영 투명성과 자립성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을 곧이 곧대로 믿지 못하고 축구단에서 서서히 손을 떼기 위한 과정은 아닌지 의심하는 내가 잘못된 걸 거다. 하지만 45년 전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모양새가 찜찜한 건 사실이다. 역사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라고 했다. 제일모직 축구단이 어떻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지 꼭 기억해야 이런 슬픈 일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이건 삼성이 운영하는 축구단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야구단과 농구단, 배구단도 마찬가지다. 선수 한 명을 위해 220억 원을 지원하는 승마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안심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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