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니어스|조성룡 기자] 한 나라의 스포츠는 경제력과 큰 연관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나라들은 축구도 어느 정도 이상의 수준을 자랑합니다. 물론 브라질과 같은 나라는 축구선수가 국가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경제력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미국이나 독일, 영국 등 선진국의 축구를 생각하면 수긍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아시아의 국가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경제력의 순위가 축구의 순위로 직결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중진국' 소리 들을 정도의 나라들은 한결같이 아시아 축구 강호의 반열에 들어서 있습니다. 한국, 중국, 일본을 포함해 사우디 아라비아 등 서아시아 국가들도 마찬가지죠.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입니다. 축구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대만입니다. 대만의 경제력은 동아시아에서 상위권에 속합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축구에서는 아닙니다. FIFA 랭킹만 놓고보면 대만은 아시아에서도 한참 뒤떨어지는 국가입니다.

친한 대만의 지인은 "대만의 남자축구는 여자의 그것보다 못하다"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여자축구는 대만 축구협회의 정책적 지원에 의해 그나마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남자축구의 경쟁력은 굉장히 약합니다. 도대체 대만은 왜 축구를 못하는 것일까요? 그 원인은 단순히 대만이 야구 국가여서도, 원래 못해서도 아닙니다. 바로 대만 축구의 20세기 역사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야구는 일제 잔재' 축구 지원했던 국민당 정권

약 반 세기 전만 해도 대만의 인기 스포츠는 야구가 아닌 축구였습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대만의 상황을 조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계사를 공부했던 독자들께서는 대략적인 이야기를 알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고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맞붙습니다. 이 전쟁에서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은 패배하고 대만으로 향합니다.

대만을 장악한 국민당 정권은 '일제 잔재 청산 정책'을 시행하게 됩니다. 대만은 과거 일제의 '직영 식민지'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과 비슷한 위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한국과 달리 대만은 일본에 대한 우호도가 높았습니다. 국민당 정권은 좀 더 손쉽게 대만을 통치하기 위해 대만 원주민의 정체성과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대만 장제스 정권은 수월한 통치를 위해 야구 대신 축구와 농구를 보급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이를 위해 내놓은 체육 정책이 바로 '축구 보급'입니다. 일제 치하 대만의 국민 스포츠는 야구였습니다. 대만의 일부 학교가 고시엔(전일본 고교 야구 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둘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국민당 정권에 있어서 야구는 일제가 이식한 스포츠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대만 원주민들에게 '중화 DNA'를 이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에게 좀 더 친숙한 축구와 농구를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책적으로 축구를 살리고 야구를 홀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위안샨(圓山) 경기장의 철거입니다. 20세기 초반 '대만 야구의 성지'라 불리던 이 곳은 1951년 미 군사지원고문단(MAAG)의 본부로 사용되고 이후 1989년 중샨(中山) 축구장으로 바뀝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잠실 야구장을 미군 기지로 사용했다가 축구장으로 바꾸는 셈입니다. 그만큼 야구에 대한 국민당 정권의 반감은 컸습니다.

국민당의 지원 덕분에 대만 축구는 승승장구 했습니다. 월드컵 본선 진출 기록은 없지만 아시아 대회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이 때가 바로 대만 축구의 르네상스라 볼 수 있습니다. AFC 아시안컵에서 3위(1960년)와 4위(1968년)를 기록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만 축구 최고의 순간은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을 꺾었을 때입니다. 그것도 결승전에서 두 번 만나 모두 이겼습니다.

한국에 악몽 안겼던 왕년의 강호, 대만

한국과 대만이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54년 아시안게임 결승전이었습니다. 첫 만남부터 무게감이 상당했습니다. 난생 처음 만난 대만이라는 팀 앞에서 한국의 자신감은 상당했습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사기를 끌어 올리고 한 달 후 처음으로 만나는 월드컵 본선 무대(스위스 월드컵)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실제로 아시안게임 멤버 대부분이 스위스 땅을 밟았습니다.

필리핀 마닐라의 리살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드디어 금메달을 놓고 벌이는 양 팀의 한 판이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승부는 예상과 달리 흘러갔습니다. 대만은 전반 6분 리우척잉이 선제골을 기록하며 앞서 나갔습니다. 게다가 전반 17분에는 츄잉캉이 페널티킥까지 성공시키며 점수는 0-2로 벌어졌습니다. 한국은 전반 30분 최정민이 만회골을 넣으며 추격의 불씨를 살렸습니다.

역전하겠다는 한국의 희망은 후반전 들어 커지기는 커녕 오히려 물거품이 됐습니다. 후반 시작 5분 만에 제토 만의 골로 점수를 더욱 벌린 대만은 후반 23분 츄잉캉, 35분 호잉판의 연속골로 승부를 결정 지었습니다. 한국은 최광석을 대신해 들어온 박일갑이 한 골을 만회하는데 그쳤습니다. 5-2로 한국을 꺾은 대만은 첫 국제대회 우승컵을 품에 안는데 성공했습니다.

대만 장제스 정권은 수월한 통치를 위해 야구 대신 축구와 농구를 보급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첫 만남부터 큰 상처를 입은 한국은 복수전을 기다렸습니다. 1956년 홈 앤 어웨이로 열린 AFC 아시안컵 예선에서 한국은 대만을 2연승으로 꺾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단순한 예선이 아닌 뭔가 큰 것이 걸린 경기에서 시원하게 이겨야 진정한 복수전의 완성일테니까요.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습니다. 또 다시 아시안게임이었습니다.

1958년 아시안게임은 일본의 도쿄에서 열렸습니다. 4년 전 아깝게 결승 문턱에서 좌절했던 한국은 다시 한 번 금메달 사냥에 나섰습니다. 조별예선에서 이란과 싱가포르를 꺾은 한국은 토너먼트에서도 남베트남(월남)과 인도를 제치고 결승전에 무난히 진출했습니다. 4경기 13득점의 압도적인 공격력이 결승 진출의 원동력이었습니다. 당시 성낙운, 최광석, 최정민 등 스위스 월드컵 세대가 팀의 분위기를 이끌었습니다.

한국이 결승전까지 올라오는 동안 대만 역시 차근차근 위를 향했습니다. 말레이시아, 파키스탄을 꺾고 토너먼트에 진출한 대만은 8강에서 난적 이스라엘을 맞아 2-0 승리를 거뒀고 4강전에서 인도네시아에 1-0 진땀승을 거둬 결승전에 진출했습니다. 아시안게임 2연패를 향한 길은 험난해 보였습니다. 뭔가 조금씩 부족한 승리를 거두며 올라왔고 심지어 결승전 상대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한국이었으니까요.

도쿄 국립 경기장에서 다시 한 번 두 팀의 결승전이 시작됐습니다. 확실히 4년 전과 달랐습니다. 선제골의 주인공은 한국이었습니다. 전반 15분 이수남의 골은 분위기를 한국 쪽으로 끌어왔습니다. 이 골에 힘입어 전반전은 한국이 리드를 잡은 채 종료됐습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4년 전의 복수는 성공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반 들어 한국의 계획에 미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4년 전 대만 선제골의 주인공이 다시 한 번 불을 뿜었습니다. 후반 20분 리우척잉이 동점골을 기록하며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습니다. 동점골을 허용한 한국은 후반 40분 라우위에게 페널티킥 역전골까지 허용하며 패색이 짙어졌습니다.

4년 전 악몽이 또다시 재현되는듯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의 아픔을 또다시 재현하지 않겠다는 선수단의 의지는 컸습니다. 특히 그 악몽을 직접 경험한 선수들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곧 결실을 맺었습니다. 실점 후 3분만에 동점골이 터졌습니다. 4년 전 결승에서 전반전만 뛰고 패배를 맛봐야 했던 최광석이 한국에 기적과도 같은 골을 안겨줬습니다. 이 골로 한국은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가는데 성공했습니다.

분위기는 한국으로 넘어온 것 같았지만 여기까지였습니다. 연장전까지 120분 동안 한국은 주전 선수들이 교체 없이 풀타임 출전했습니다. 당연히 체력은 바닥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연장 후반 5분 류궈타이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내주며 두 대회 연속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동시에 대만은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2연패를 달성했습니다. 그 당시 대만은 중요한 곳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던 축구 강호이자 두려운 상대였습니다.

중국의 약진과 대만의 고립

이렇게 잘나갔던 대만 축구는 1975년 뜻밖의 결정을 내립니다. AFC를 떠나 OFC, 오세아니아 축구 연맹에 가입한 것입니다. 아시아 강호 중 하나인 대만이 도대체 이런 결정을 왜 내렸을까요?

당시 대만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들의 결정은 결코 축구 발전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문제는 국제 정세였습니다. 당시까지 중국 대륙을 대표하는 정부는 대만에 있는 '중화민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핑퐁 외교 등을 통해 중국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이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점점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중국의 외교 정책 중 대표적인 것이 '하나의 중국'입니다. 중국 내에 있는 유일한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대만에 존재하는 중화민국 정부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이 원칙에 기초해 대만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만은 국제적으로 점차 고립됐습니다. 냉혹한 국제 사회에서 대만이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1971년 UN에서 축출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는 축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국은 스포츠 외교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만 스포츠 역시 고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대만은 올림픽에서 국기 대신 대만 올림픽 위원회 깃발을 들고 참가하지만 당시에는 올림픽 참가조차 쉽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대만 축구 역시 AFC 주관 대회나 AFC 소속 국가들과 친선경기를 갖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대만은 AFC에서 퇴출 당하고 맙니다. AFC는 총회를 통해 대만을 축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반대표는 단 5표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새로운 보금자리는 오세아니아였습니다. 그나마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대만은 1990년 AFC에 복귀할 때까지 약 15년 동안 OFC 소속으로 국제 축구 무대에 나섭니다. 하지만 이는 대만 축구협회의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대만 축구 10년 퇴보시킨 OFC 가입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대만의 OFC 가입은 대만의 축구 경쟁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국제 무대에서의 경쟁력이 저하된 것은 물론이고 자국의 축구 인기까지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대만 축구협회의 전략 실패는 대만 축구계의 운명을 뒤바꾸고 말았습니다.

OFC 가입 후 대만 국민들은 점차 축구에 대해 흥미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대만 축구는 국민당 정권의 지원 하에 꾸준히 국민들의 관심을 받아 왔습니다. 특히 아시안게임과 AFC 아시안컵에서 대만이 호성적을 거두면서 축구에 대한 관심 역시 상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OFC로 넘어가면서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당시 오세아니아는 AFC 아시안컵과 같은 대륙 대회가 막 생겨난 시점이었습니다. 1973년 OFC 네이션스 컵이 창설된 것이죠. 하지만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대회는 7년 후인 1980년에 뉴칼레도니아에서 열렸고 3회 대회가 열린 1996년부터 비로소 제대로 된 대회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만이 정기적인 국제 축구 교류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정기적인 국제 대회라도 있어야 출전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OFC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당시 대만의 A매치 기록을 살펴보면 1년에 단 한 차례도 A매치를 갖지 못한 적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만큼 대만의 축구 경쟁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국민들의 관심도 점차 축구와 멀어졌습니다. 피지, 타히티, 이스라엘같은 국가와의 경기는 아무래도 한국, 일본과 같은 인접국과의 경기보다 관심이 시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던 와중 대만 축구에 치명타를 날리게 되는 계기가 발생합니다. 바로 '리틀 야구'였습니다.

대만 장제스 정권은 수월한 통치를 위해 야구 대신 축구와 농구를 보급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대만이 고립되자 대만 야구계는 축구와 달리 유소년을 육성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성인 팀은 국제 교류가 쉽지 않았지만 유소년 스포츠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국제 교류가 비교적 활발하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었죠. 게다가 이 전략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대만의 리틀 야구 팀이 세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아마추어 야구는 쿠바, 리틀 야구는 대만'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결국 국민들의 관심은 온통 야구로 쏠린 것입니다. 애초 축구와 농구를 지원했던 국민당 정부도 리틀 야구가 놀라운 성과를 거두자 이를 정권 홍보에 적극 활용하며 그들의 인기에 편승했습니다. 현재도 대만의 지폐에는 이 당시 대만 리틀 야구 팀이 새겨져 있습니다. 축구의 OFC 가입과 리틀 야구의 부흥은 결국 대만의 국민 스포츠가 축구에서 다시 야구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 OFC에 가입했다고 하지만 이후 대만 축구가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나도 가혹했습니다. 국제 무대 경쟁력 약화와 인기 하락까지 겪은 대만의 축구는 이제 그저그런 비인기 스포츠 중의 하나로 전락했습니다. 1988년 다시 AFC로 돌아오는데 성공했지만 때는 늦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세계와의 격차는 심각하게 벌어졌습니다.

원점으로 돌아간 대만 축구, 옛 영광을 회복할까?

더 이상 대만은 한국을 꺾고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하던 그 영광을 재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하지만 대만의 경제력과 스포츠 수준을 생각했을 때 대만 축구의 발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녀 성인 리그의 출범입니다. 축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프로 리그 창설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죠. 2007년 프로화의 사전 준비 단계로 'INTERCITY FOOTBALL LEAGUE'를 창설했고 이는 2017년 프로 리그인 타이완 풋볼 프리미어리그로 전환됐습니다. 현재 총 8팀이 참여하고 있지만 이들이 낼 성과는 아직 더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대만 장제스 정권은 수월한 통치를 위해 야구 대신 축구와 농구를 보급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오히려 여자 축구의 성장 속도는 비교적 빠릅니다. 여자 축구는 아시아 소속 타 국가들과 '해볼 만한 수준'까지 올라왔습니다. 남자 축구보다 여자 축구가 세계 축구와의 격차를 따라잡기 수월하다는 대만 축구협회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만의 여자 축구 리그인 '대만 레이디스 리그'를 중심으로 대만의 여자 축구는 점차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대만의 축구는 암흑기 속에 있습니다. 한 번 벌어진 격차를 다시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인접국의 축구 경쟁력이 상당히 상승한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심지어 태국과 홍콩 등 우리가 '축구 약소국'이라 생각하는 국가와의 격차도 상당히 벌어져 있습니다.

결국 이를 빠르게 따라잡는 것이 관건입니다. 아직 제대로 된 프로리그도 갖추지 못한 나라이기에 이를 실현하는 것은 멀어 보입니다. 하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대만 프로야구가 승부조작 파동으로 휘청이고 이를 대체할 만한 하계 프로 스포츠를 찾기는 쉽지 않기에 대만 축구는 언제든지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대만 축구계는 잘 이용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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