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 트로피가 무거우니 우리가 좀 도와줄게." 수원의 FA컵 우승 트로피 하나를 놓고 많은 고위 관계자들이 이렇게 도와주셨다. ⓒ방송 화면 캡처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드라마와도 같았던 2016 KEB 하나은행 FA컵이 수원삼성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아마도 슈퍼매치가 승부차기까지 이어질 일도 당분간 없을 것 같고 FC서울-수원삼성이 우승컵을 놓고 결승에서 맞붙는 것도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자체로도 굉장히 흥미로운 경기였고 내용 역시 오랜 시간 기억에 남을 만했다. 양 팀이 한 명씩 퇴장 당했고 거기에 극적인 골이 터졌고 승부차기에서는 골키퍼까지 키커로 나설 정도로 이 경기에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특히나 수원삼성이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모습은 아마도 한국 축구사에서 잊지 못할 한 장면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120분 혈투와 승부차기 이후의 모습이다.

이동국과 함께 전북의 우승을 이끈(?) 허정무 감독의 모습. ⓒ방송 화면 캡처

선수단보다 더 앞에 선 고위 관계자들

수원 선수들과 서정원 감독을 비롯한 코치진이 우승 메달을 목에 건 뒤 단상에 오르자 양복을 말끔히 차려 입은 이들이 귀신 같은 위치 선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선수들을 슬쩍 슬쩍 밀어내고 사진이 제일 잘 나오는 맨 앞자리에 포진했다. 수원 주장 염기훈이 감격에 겨워 우승 트로피를 드는 순간 경기장에는 <위 아 더 챔피언>이 흘러나오고 꽃가루가 흩뿌려졌는데 이 양복을 입으신 분들은 마치 이 시상식의 주인공처럼 당당히 박수를 치며 서 있었다. 심지어 이 양복을 입은 두 남자는 염기훈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순간에도 이 트로피가 무거울까봐 옆에서 같이 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는 바람에 서정원 감독은 이들에 밀려 중앙에 서지도 못했다. 그리고 사진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가 끝난 이후 이들은 슬쩍 자리를 떴다. 수원 축구 역사와 FA컵 축구 역사의 한 장면은 이렇게 수원 선수들과 코치진이 아니라 이 얼굴도 잘 모르는 아재(?)들이 우승을 차지한 것처럼 기록됐다.

이들은 누굴까. 바로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을 비롯해 김호곤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후원사인 KEB 하나은행 함영주 은행장, 장기주 FC서울 대표, 김준식 수원삼성 대표, 차범근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등이었다. 이 분들이 FA컵과 한국 축구를 위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고맙다. 특히나 수 년째 FA컵을 후원하고 있는 하나은행에 대한 고마움은 크다. 하지만 후원사는 후원사로서의 역할이 있는 거다. 정작 우승의 주역인 선수들과 코치진은 뒷전이고 이 우승과는 큰 관련이 없는 이들이 시상대에서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사진을 찍는 건 잘못된 일이다. 이들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때 단상에 머무는 시간은 채 10여초에 불과하지만 이 순간은 사진과 영상으로 남아 영원히 기억된다. 양 구단 대표나 후원사, U-20 월드컵조직위원회 부위원장, 협회 간부 등이 서정원 감독보다 더 ‘핫’한 자리에서 우승 세리머니를 하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차범근 부위원장의 등장이 수원 팬들에게는 반가운 일일 수도 있다. 과거 수원삼성을 이끌고 영광의 순간을 보냈던 차범근 부위원장이 수원의 우승 현장에 함께할 수 있었다는 건 굉장히 절묘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차범근 부위원장도 선수들이 우승 트로피를 드는 그 순간 그 단상 위에 있으면 안 됐다. 만약 FC서울 감독을 지낸 황보관 현 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실장이 U-20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이어서 그 자리에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수원의 우승 현장이 황보관 부위원장이 있었으면 수원 팬들은 굉장히 불편해 했을 것이다. ‘무슨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느냐’고 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따져 봤을 때 차범근 부위원장도 엄연히 부위원장 신분으로는 그 단상에서 우승 세리머니를 같이 하지 않은 게 옳았다. 입장을 바꿔 FC서울이 우승했는데 차범근 부위원장이 꽃가루가 날릴 때까지 단상에서 내려오지 않고 모든 사진에 찍혔다면 불편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동국과 함께 전북의 우승을 이끈(?) 허정무 감독의 모습. ⓒ방송 화면 캡처

팬들과 선수단의 축제에 끼어들지 말자

물론 차범근 부위원장이 수원 선수들을 축하해주는 모습은 반가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시상식을 전후해서 해야 할 일이었다. 그 어떤 이도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신분으로 우승 세리머니 현장에 어울리지 않다면 차범근 부위원장도 마찬가지의 기준을 정해야 한다. 그 외 다른 시상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대한축구협회 고위 간부나 양 구단 대표, 후원사 대표 등도 우승 트로피를 드는 순간 같은 단상에 있는 건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더군다나 이들이 귀신 같은 위치선정으로 맨 앞자리를 차지한 채 기념사진을 찍는 건 고생한 선수단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행위다. 서정원 감독은 그들에게 밀려 옆에서 우승 세리머니를 즐겨야 했고 조나탄은 아예 구석에 쳐박혀 있었는데 퇴진 압력을 받고 있는 구단 대표가 ‘센터’를 차지하는 걸 이해할 수 있나. 상대팀, 그것도 라이벌팀 구단 대표가 시상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걸 이해할 수 있나.

지난 해 FA컵 시상식은 더 심했다. FC서울이 우승하고 주장 차두리가 멋지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려던 그 순간 정장을 입은 네 명이 차두리 주변에 몰려 들었다. 이들은 바로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과 함영주 KEB 하나은행장, 장기주 FC서울 사장 그리고 김대은 전북축구협회장이었다. 심지어 정몽규 회장은 차두리와 함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는데 우승 트로피에 손잡이가 없어 차두리만이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게 됐다. FA컵에 손잡이가 있었더라면 아마도 정몽규 회장과 차두리의 트로피 쟁탈전(?)은 더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승 단상에 이들만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기영옥 광주시축구협회장과 조건도 인천시축구협회장, 서정복 전라남도축구협회장, 김성열 대구시축구협회장 등도 한 자리씩 다 차지하고 기념 사진을 박았다. 우승은 차두리와 최용수 감독이 했는데 기쁨은 엄한 사람들이 누렸다.

더한 사건(?)도 있었다. 지난해 K리그 클래식에서 전북이 우승한 뒤 허정무 프로축구연맹 부총재는 최강희 감독을 밀어내고 전북 주장 이동국과 함께 우승 트로피를 감격적으로 들어 올렸다. 이 역사적인 우승 세리머니 장면은 이제 오래 오래 남을 것이다. 100년 뒤 2015년 전북의 K리그 클래식 우승 장면을 되돌려 보면 많은 이들이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어? 저때 감독이 최강희 아니었어? 허정무 감독이 전북을 맡았었나?’ 역사는 사진 한 장으로 기억되기도 하는데 2015년 K리그 클래식의 역사는 엉뚱하게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우승 트로피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 이걸 팔팔한 선수가 드는데 축구계 고위 인사가 같이 들어줘야 하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장면은 상징적인 장면인데 정작 팀의 우승과는 관계없는 이가 주인공 행세를 해서는 안 된다. 후원사 대표건 시,도축구협회 회장이건 상징적인 세리머니 이후 기념 사진 촬영 한 번 하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팬들과 선수단의 축제에 끼어 들어서는 안 된다.

우승 세리머니, 선수단을 위한 자리여야

이런 비판을 의식했는지 K리그 클래식은 올 시즌 우승 세리머니 당시 권오갑 총재가 FC서울 주장 오스마르에 트로피만을 전달한 뒤 퇴장했고 서울 선수단만이 온전하게 이 축제를 즐겼다. 하지만 K리그 클래식은 이렇게 조금씩 변하는 동안 FA컵은 여전히 아재(?)들이 단상을 점령하고 있다. 물론 협회나 연맹 고위 관계자부터 구단 임원 등의 노고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들은 그들의 자리에서 박수를 받아야지 1년 내내 선수들과 코치진이 땀 흘려서 이룬 영광에 편승하려 하면 안 된다. 왜 선수단이 이룬 영광을 고위 관계자들이 가장 좋은 자리에서 누려야 하나. 단상은 땀과 눈물, 그리고 샴페인에 젖은 선수단을 위한 것이지 말끔한 양복을 차려 입고 마치 자신들이 대단한 업적을 이룬 것처럼 기념 사진을 찍는 고위 관계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보싱와는 같은 팀이기라도 했지 ‘아재’들은 같은 팀도 아니지 않은가. 우승 세리머니는 앞으로 선수단에게 양보해 주자. 서정원 감독이 우승한 것이지 정몽규 회장이 우승한 건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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