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기훈은 수원삼성의 전설이 돼 가고 있다. ⓒ수원삼성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나는 지금껏 2천여 편에 가까운 칼럼을 써왔다.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려고 노력했고 알려지지 않은 음지의 이야기도 꺼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내 이름을 꺼내면 ‘기성용의 sns를 공개한 기자’ 또는 ‘박주영의 병역 문제를 비판한 기자’라고만 생각한다.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칼럼을 썼다고 자부하는데 그런 반응에 덮여 버리면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나는 더 오랜 시간 동안 감동적이거나 날카로운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고 믿는다. 언젠간 ‘기성용의 sns를 공개한 기자’라는 타이틀보다 더 멋지고 더 마음에 드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글을 쓴다.

그런데 이런 나보다 더한 선수가 있다. 지금껏 무려 273번의 K리그 경기에 출전했고 A매치에도 51번이나 나섰던 염기훈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염기훈은 10년 전 전북의 아시아 제패를 이끌고 수원에서는 흔들리는 명가를 혼자 일으켜 세우면서 할 만큼 다 한 위대한 선수다. 하지만 4년마다 한 번씩 축구를 보는 이들에게 염기훈은 언제까지나 ‘아르헨티나전 왼발슛’만으로 기억돼 있다. 무려 6년 전의 경기지만 아직도 염기훈에게 이 타이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타이틀이다. 6년의 시간 동안 그 왼발 하나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어도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아직도 ‘아르헨티나전 왼발슛’을 떠올린다. 그런데 여전히 그런 타이틀만 떠올린다면 염기훈을 한참 잘못보고 있는 거다.

"택배 왔어요." ⓒ수원삼성

어제(27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6 KEB 하나은행 FA컵 결승 1차전 수원삼성과 FC서울의 경기는 염기훈을 위한 독무대였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밝힌 결승골은 물론이고 경기 내내 염기훈은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였다. 흔히들 말하는 ‘클래스가 다른 선수’가 바로 염기훈이었다. 날카로운 왼발 크로스와 패스, 거기에 비록 스피드는 다소 떨어지는 편이지만 볼 간수 능력까지 일품이었다. 만33세의 염기훈은 이제 축구에 완전히 눈을 뜬 모습이다. 모든 걸 통달하고 이제는 여유까지 얻게 된 모습이 마치 ‘축구도사’를 보는 듯하다. 산골에서 오로지 축구공 하나만을 가지고 수십 년간 축구에 통달해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이가 있다면 아마도 염기훈과 같은 모습일 것이다.

염기훈의 경기력을 아직도 6년 전 아르헨티나전 슈팅 하나로 깎아내리는 이들과 논쟁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직도 6년 전 과거 속에서 사는 이들하고 논쟁을 해봤자 6년 후를 사는 사람만 손해 아닌가. 딱 지금의 염기훈만 보자. 그는 K리그에서 2년 연속 도움왕이다. 그것도 전력이 많이 약해져 강등권에까지 떨어졌던 팀에서 올해도 무려 15개의 도움을 기록하며 도움왕에 올랐다. 지난 해엔 로페스(당시 제주)와 몰리나(당시 서울)가 도움 11개를 기록하는 동안 무려 17도움을 올리며 압도적으로 도움왕을 차지했다. 택배도 이런 택배가 없다. 신발을 샀다고 치면 그냥 현관까지 오는 택배가 아니라 우리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아서 누르고 안방에 누워 있는 나에게 다가와서 새 신발을 신겨주고 나가는 정도다.

30대가 넘어가면 체력적으로 큰 부담을 느껴야 하지만 나는 올 시즌 내내 염기훈의 플레이를 보면서 그가 체력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껴본 적은 없다. 여기에 염기훈은 노련미와 경험까지 갖췄다. 폭발적인 드리블이나 화려한 헛다리 개인기 같은 건 없지만 2대1 패스로 수비를 공략하거나 몸으로 버텨내며 상대를 등지는 플레이가 단연 돋보인다. 왼발 크로스와 세트피스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지금이 염기훈의 최전성기라고 생각한다. 그가 대표팀에 뽑히지 않는 건 한국 축구에 엄청난 손실이다. 지난 주말 전북을 상대로 돋보이는 플레이를 선보인 이명주(알 아인)의 대표팀 승선이야 1,2년 더 늦어져도 그럴 수 있다 치자. 물론 이명주도 지금 대표팀에서 빨리 보고 싶지만 이명주는 앞으로 더 높이 올라갈 선수이고 보여줄 게 많으니 더 있다가 뽑아도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염기훈은 딱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만 33세의 노장 선수여서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지금 뽑아서 지금 활용해야 한다.

"택배 왔어요." ⓒ수원삼성

내가 가장 보고 싶은 건 대표팀에서 염기훈의 날카로운 택배 크로스를 김신욱이 헤딩으로 연결하는 모습이다. 감독이 대단한 전술을 써서 팀을 더 강하게 만들면 좋겠지만 적어도 아시아권 무대에서 염기훈-김신욱 조합이라면 뭐 다른 전술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염기훈이 칼같이 올려주고 김신욱이 때려 박으면 된다. 염기훈이 은퇴를 앞두게 될 몇 년 후라면 이 모습도 볼 수가 없다. 지금이 아니면 이건 20년 뒤 ‘염기훈과 김신욱이 함께 뛰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칼럼 소재로나 쓸 수 있을 것이다. 염기훈과 함께 한다면 대표팀에서 김신욱의 효과는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이지 않을까. 포지션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지만 요즘 염기훈을 보면 2000년대 초반 안정환을 보는 것 같다. 공을 잡으면 다음 플레이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염기훈이 잡으면 뭔가 창의적인 플레이가 나온다. 구자철과 지동원, 손흥민 사이에서 전혀 다른 유형의 염기훈 한 명 더 있으면 선수 자원이 얼마나 풍복해지나.

최근 대표팀의 세트피스는 특히나 실망스럽다. 코너킥도 별로 기대감이 없고 문전 앞에서의 프리킥 또한 설레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대표팀의 세트피스를 볼 때면 오래된 여자친구를 보는 것처럼 가슴 뛰는 감정이 없다. 그런데 정말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대표팀에서 염기훈이 90분 동안 김신욱에게 택배 크로스를 올리고 여기에서 김신욱이 파울 몇 개만 얻어내도 염기훈의 왼발에서 두세 골은 나올 거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아주 초보적인 발상이지만 90분 내내 헛심만 쓰는 현재의 대표팀보다는 염기훈-김신욱 조합이 훨씬 더 날카로울 가능성은 충분하다. 어차피 아시아권 팀을 상대로도 쩔쩔 매는데 킥 하나 만큼은 이미 통달한 ‘축구도사’가 90분 동안 뒷짐 지고 걸어 다니다가 코너킥과 프리킥 몇 번 차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손해 볼 건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염기훈은 90분 동안 뒷짐 지고 걸어 다니는 게 아니라 인플레이 상황에서도 보여줄 게 많다.

염기훈은 지금 선수로서 최전성기를 맞고 있다. 원래 잘하던 선수였지만 개인적으로는 2011년경부터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3년 동안 염기훈은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딱 5경기에 나섰다. 마지막 대표팀 소집은 지난해 6월 미얀마와 2018 러시아월드컵 2차예선 경기 때였다. K리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입장에서 국가대표팀에 이동국도 뽑고 정조국도 뽑아주면 좋겠지만 딱 한 명만 뽑힐 수 있다면 나는 염기훈을 추천하고 싶다. 더군다나 내년 3월 월드컵 최종예선 중국과의 원정경기에는 손흥민이 경고누적으로 나올 수 없다. 이 선수, 저 선수 다 뽑아서 해봤는데도 다 성에 차지 않으면 그냥 염기훈 뽑자. 염기훈은 이제 물이 오를 대로 올랐고 더 이상 국내 무대에서는 경쟁자도 없으며 대표팀에서도 충분히 활용할 만한 자원이다. 염기훈이 나이가 많아서 안 뽑는다고 하는 건 핑계일 뿐이다. 그는 2018년 월드컵 때 만 35세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보낼 수 있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축구장인’들은 많다. 하지만 이 ‘축구 장인’의 수준에서 한 단계 더 높은 ‘축구도사’ 반열에 올라가는 이들은 많지 않다. 단순히 순간 스피드가 뛰어나고 드리블이 뛰어나고 헤딩 능력이 좋은 선수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축구의 모든 걸 통달한 듯한 수준에 이르는 건 쉽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최근 염기훈의 플레이를 보고 있으면 그가 이제는 축구의 모든 걸 깨달은 듯하다. 바둑으로 치면 이세돌이나 이창호를 보는 것 같다. 아직도 6년 전 단 한 경기, 단 한 순간만으로 염기훈을 평가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이제는 그 잣대를 버렸으면 한다. 염기훈은 지금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선수가 됐다. 대표팀에서 이런 염기훈을 외면한다면 그건 대표팀만 손해다. 포지션은 달라도 염기훈이 충분히 소리아 이상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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