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FC는 K3리그를 거쳐 K리그 챌린지에서 활약하고 있다. ⓒ부천FC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2005년 6월 19일은 경기도 연천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나 많은 이들에게 아픔으로 기억되는 날이다. 그리고 이날 저녁 7시.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던 이때 서울월드컵경기장은 맑았고 1만 명 가까운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다. FC서울과 부천SK의 경기가 열리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경기에서 만21세의 정조국과 만24세의 곽태휘가 서울 유니폼을 입고 뛰었고 히칼도도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그라운드를 누볐다. 부천SK에는 갓 프로 무대에 데뷔한 조용형이 있었고 무려 8년 동안 부천SK 유니폼을 입은 김한윤도 있었다. 부천SK를 응원하기 위해 이날 경기장에는 24세의 어린 안영호 씨도 있었다.

이날 경기는 결국 양 팀 모두 득점을 기록하지 못하며 0-0으로 막을 내렸다. 특히나 후반 막판 들어 양 팀의 경기력은 인상적이었다. 부천에서 서울로 이적한 이원식이 후반 막판 활발히 움직였고 부천 또한 김재성과 이동식 등이 포진한 중원에서부터의 압박이 강력했다. 이날 경기에서 아쉽게도 승리를 놓친 부천 팬들은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 서울 원정에서는 반드시 승리를 거두자”고 약속했다. 부천 팬 안영호 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부천이 다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 서고 부천 팬들이 이 경기장에서 응원을 하기까지는 그로부터 11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천SK가 이듬해 2월 제주로 연고이전을 감행했고 결국 부천 팬들은 한 순간 팀을 잃었기 때문이다.

FC서울과의 FA컵 4강전에서 응원을 펼치는 부천 팬들의 모습.

안영호 씨를 비롯한 부천 팬들이 2005년 6월 19일 이후 단체로 서울월드컵경기장을 방문한 건 1년 뒤인 2006년 5월 27일 토요일이었다. 그날은 2006년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붉은악마가 출정식을 하는 날이었다. 부천 팬들 중에는 붉은악마의 핵심 멤버도 많은 터라 그들은 용산구민회관에서 열리는 붉은악마 출정식에 참석한 뒤 곧바로 서울월드컵경기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더 이상 응원할 팀이 없었다. 이날은 FC서울의 상대로 부천SK가 아닌 제주유나이티드가 경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경기를 연고이전 팀들간의 맞대결이라면서 ‘패륜 더비’라고 칭했다. 이 경기에 초대 받지 못한 부천 팬들은 원래 자신들이 서야 할 원정 응원석 한 켠에 모여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연고이전 반대.” 이날은 서글프게도 하늘에서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서울-제주전이 끝난 뒤에 부천 팬들은 본부석 쪽으로 향했다. 연고이전에 대한 항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십여 명의 경찰이 배치됐고 결국 부천 팬들은 울분에 가까운 메시지를 토해 내다가 경기장 밖으로 쫓겨나듯이 떠나야 했다. 1년 전만 하더라도 이 경기의 주인공이었던 팬들이 초대 받지 못한 불청객이 된 것이다. 안영호 씨도 이 자리에 있었다. 이게 벌써 10년 전의 일이었고 부천 팬들은 이후 단 한 번도 한국 축구의 상징과도 같은 서울월드컵경기장에 초대받지 못했다. 부천이 이후 K3리그 팀을 창단했고 K리그 챌린지에도 속하게 됐지만 서울월드컵경기장에 올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천 팬들에게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의 응원은 2005년 6월 19일이 마지막이었고 다시 그들이 이 한국 축구의 성지에 오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그리고 11년이 흘렀다. 2005년 6월 0-0 무승부 경기를 마친 뒤 “다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곧 만나 승부를 보자”고 벼르던 어린 안영호 씨는 이제 35세의 아저씨(?)가 돼 있었다. 그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던 서울월드컵경기장 원정경기가 이뤄진 건 꿈만 같은 일이었다. K리그 챌린지 소속으로 서울월드컵경기장을 밟을 일이 없던 부천FC가 포항스틸러스와 전북현대를 연파하고 2016 KEB 하나은행 FA컵 4강에 올랐고 그 4강 상대가 바로 FC서울이었기 때문이다. 몇 달 뒤면 다시 올 수 있을 줄 알았던 이 한국 축구의 성지에 다시 오는 데는 무려 11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 사이 안영호 씨처럼 많은 부천 팬들은 나이를 먹었다. 중학생이던 팬은 벌써 군대에 다녀와 이제는 예비군이 됐고 사회 초년병이던 팬은 어느덧 두 아이의 아빠가 돼 아이들과 함께 경기장을 찾았다. 그들은 11년을 기다려 다시 서울월드컵경기장 원정석에 섰다.

FC서울과의 FA컵 4강전에서 응원을 펼치는 부천 팬들의 모습.

11년 전 부천SK가 제주로 떠나고 이들은 늘 서울월드컵경기장의 불청객이었다. 2006년 서울-제주전 때는 경호업체와 경찰에 요주의 인물들로 찍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받아야 했다. 누구는 일상복을 입었고 누구는 부천SK 유니폼에 테이프로 'X'자를 그려 붙이기도 했다. 맞춰 입을 옷도 없었고 그들을 주목하는 이들도 없었다. 하지만 2016년 10월 26일, 이들은 달라져 있었다. 번듯한 팀이 생겼고 통일된 유니폼이 있었고 자신들의 팀 이름이 찍힌 입장권도 있었다. 11년 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부천 팬들에게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경기장에 들어서자 그 동안 쌓였던 연고이전에 대한 분노도 사라졌다. 지금은 부천FC 서포터스 ‘헤르메스’ 회장을 맡고 있는 안영호 씨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분노가 컸고 악에 받쳐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이 경기장에 다시 들어오니 그런 감정보다는 이젠 그냥 기분이 좋아요.”

내 팀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다시 한국 축구의 성지에 초대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안영호 씨는 행복해 했다. “경기 전에 다른 분들께도 ‘즐기자’고 했어요. 이 자리에까지 다시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사실 지난 10년 동안 대표팀 경기를 보러 한두 번 서울월드컵경기장에 왔었지만 씁쓸한 마음이 있어서 그 이후론 이곳에 잘 오지도 않았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정식으로 한국 축구의 성지에 초대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4강까지 왔으니 승패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11년 만에 다시 서울월드컵경기장을 밟은 헤르메스는 김만수 부천시장을 비롯해 부천시 체육회 관계자들과 함께 경기장에서 한을 다 풀어냈다. 원정석을 채운 관중만 하더라도 350여 명이 넘었다. ‘K리그의 악동’이던 부천 팬들은 이날도 반입 금지 물품인 홍염을 반입해 경기장을 붉게 물들이며 또 한 번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경기장에 모여 또 한 번 우렁차게 외쳤다. "연고이전 반대."

비록 경기는 0-1 부천의 패배로 끝났지만 부천 팬들은 경기가 끝난 뒤에도 아쉬움보다는 감격에 겨운 박수를 보냈다. 2006년 연고이전 반대 시위를 위해 부천 팬들이 서울-제주전을 찾았을 때는 그들을 향해 인사를 하는 선수들도 없었고 경찰 병력에 둘러싸여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어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기가 끝난 뒤 부천 선수들은 11년 만에 공식적으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팬들을 향해 인사했고 팬들은 목이 쉬도록 “부천”을 외쳤다. 부천이 한국 축구의 성지에 다시 입성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들은 돌고 돌아 다시 이 자리에 섰다. 안영호 씨는 이렇게 말했다. “11년 만에 이곳에 오니 저도 변해있고 세상도 변해 있네요.” 2005년 6월 19일 이후 무려 4,148일 만에 다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 서게 된 부천 팬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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