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기훈은 수원삼성의 전설이 돼 가고 있다. ⓒ수원삼성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나는 내셔널리그 고양국민은행 서포터 출신이다. 우리는 팬도 몇 명 없었다. 구단의 이해할 수 없는 처사에 대해 목소리를 내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어차피 몇 명 되지도 않는 서포터스였는데 응원 보이콧도 효과가 없었고 선수단 버스를 막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마 선수단 버스를 막았으면 “집에 갈 차가 없어서 그래? 그럼 태워줄게”라고 선수단 버스 한 자리를 내줬을 거다. 그래서 나는 고양국민은행의 승격거부 당시 이것 저것 다 해보다가 거리로 나가 1인시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힘 없는 우리가 유일하게 목소리를 내는 방법이었고 다른 이들에게 우리의 상황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선수단 버스를 가로막는 팬들

최근 들어 K리그 서포터스가 논란 아닌 논란에 휩싸였다. 응원하는 팀이 극도로 실망스러운 경기를 계속 펼치자 결국 참다 못한 팬들이 경기 종료 후 선수단 버스를 막고 항의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에는 울산 팬들이 포항 원정에서 0-4 대패를 당한 뒤 버스를 막아 세웠고 지난 7월에는 수원삼성 팬들이 울산 원정에서 1-2로 패하자 선수들이 탄 버스를 막고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2일 수원삼성 팬들은 수원FC와의 경기에서 4-5 패배를 당한 뒤 또 한 번 선수단 버스를 가로 막고 “단장 사퇴”를 외쳤다. 한 시즌에 두 번이나 버스를 막고 항의하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지난 5월에는 인천유나이티드 역시 팬들의 버스 가로막기로 경기 종료 후 선수단이 경기장을 빠져 나가지 못한 적도 있다. 인천은 이날 홈 경기에서 광주에 0-1로 패한 뒤였다. 포항스틸러스 팬들도 올 시즌 극도로 부진했던 최진철 감독에게 성토하기 위해 아예 경기 종료 후 면담을 요청해 성적 부진에 항의한 적도 있다. 최근 들어 실망스러운 경기 내용에 그친 선수단의 버스를 막아 세우는 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팬들이 감독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성적 부진에 대한 사과와 개선 약속을 받아내는 일도 잦아지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도 상당하다. 하지만 나는 선수단 버스를 막아 세우고 항의하는 것도 팬들의 정당한 권리하고 생각한다.

단순히 경기에서 졌다고 선수단 버스를 막고 감독에게 사과를 요구하거나 압박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연전 연패를 거듭해 강등권으로 추락하거나 아니면 동해안 더비나 수원 더비 같은 중요한 경기에서 실망스러운 패배를 당하는 등의 큰 충격이 아니면 이런 버스 가로 막기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팬들도 참다 참다 못해 이런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단순하게 “거 참. 경기에서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 무슨 경기에서 한 번 졌다고 선수들이 집에도 못하게 막고 있어”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는 거다. 우리 팬들이 그 정도로 덜 성숙하지는 않다. 버스 가로막기까지 했다는 건 팬들의 인내심이 폭발했다는 증거다. 나는 올 시즌 대부분의 버스 가로막기는 그 근거가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포항 최진철 감독은 실망스러운 경기 이후 팬들과 면담을 갖기도 했다. ⓒ포항스틸러스

팬들은 당연히 소비자의 권리 누려야한다

선수들의 월급은 구단에서 나온다. 얼마 되지도 않는 K리그 팬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선수들의 월급이 지급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별로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몇 명의 팬이더라도 그들이 있기 때문에 구단 운영의 이유가 생기는 거다. 어차피 월급은 구단, 혹은 모기업에서 나오는데 팬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K리그는 팬이 없다면서 늘 있는 팬들을 귀하게 대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단 몇 명뿐인 이 소비자들도 눈치 보지 말고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기를 관람했으면 그에 따른 불만 표시도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한다. 수만 명의 팬은 귀한 소비자고 몇 명의 팬은 소비자 취급도 안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K리그 팬들의 버스 가로막기도 하나의 당당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더 응원을 열심히 해야지 왜 선수들 앞에서 그 난리를 피워야 하느냐”고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포터스는 팀의 발전을 함께 이뤄나가는 동료이지 팬클럽이나 가무단, 응원하는 기계가 아니다. 당연히 팀이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버스를 막고 불만을 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상업적으로 접근한다면 몇 안 되는 팬들이 버스를 가로막고 권리 운운하는 게 고깝게 보일 수도 있지만 보기에도 민망한 경기력에 그치는 선수들에게 “정신차리라”고 외치는 건 축구에서는 당연한 권리다. 그래도 이들을 ‘블랙 컨슈머’로 볼 텐가.

“아내는 바꿔도 응원하는 팀은 못 바꾼다”는 말이 있다. 축구 칼럼니스트 입장을 떠나 한 번 내 팀에 충성을 해본 팬의 입장으로서 절대적으로 공감하는 말이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고양 말고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다른 팀 응원가를 부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 번은 내가 출연하는 방송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기획을 한 적이 있다. 슈퍼매치를 하는데 여성 진행자는 FC서울 쪽에서 응원을 하고 나는 수원삼성 쪽에서 유니폼을 입고 응원가를 부르며 신나게 응원하는 콘셉트였다. 나는 방송에서 바보 분장을 하고 대머리 가발은 써도 “이건 못하겠다”고 했다.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이걸 못하느냐”고 했지만 나는 아무리 방송용 연출이라고 해도 ‘팬고이전’ 따위는 할 수가 없었다. 결국 90분 내내 나는 수원 서포터스석에 멀뚱멀뚱 서 있었고 방송도 별로 재미없게 나갔다.

못한다고 응원 팀 바꾸면 속이 편할까?

내가 응원하는 팀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응원하는 팀을 마치 환승하듯 바꾸는 K리그 팬들은 별로 본 적이 없다. 죽으나 사나 그 팀만을 바라본다. 특히나 축구가 다른 종목보다도 이런 현상이 더 심한 것 같다. 축구를 안 보면 안 봤지 서울 팬이 수원 유니폼을 입고 ‘팬고이전’을 한다던가 수원 팬이 갑자기 전북 유니폼을 입고 <심장이 뛰는 한>이라는 응원가를 부를 일은 없다. 나도 내가 처음 응원한 팀이 승격거부를 하고 이제는 해체해 버린 팀이어서 원망할 뿐 다른 팀으로 갈아탈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버스라도 막고 처참한 경기력에 대해 항의하는 그들을 이해한다. 경기력이 최악이라고 요새 경기력이 좋은 옆 동네 팀으로 응원하는 팀을 홀랑 바꿀 만큼 우리 K리그 팬들은 기회주의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화도 내고 야유도 하고 버스도 막는 거다. 수원 팬들이 마음 편하게 경기를 보는 방법은 있다. 올 시즌 리그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전북 팬이 되면 된다. 포항 팬들이 지금은 사퇴했지만 최진철 감독의 절망적인 경기력에서 해방되는 방법도 있었다. 포항 유니폼 대신에 세상에서 축구를 가장 잘하는 리오넬 메시 유니폼을 입고 바르셀로나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면 된다. 하지만 우리 K리그 팬들은 내가 선택한 첫 번째 팀이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원망은 할지언정 응원하는 팀을 바꾸지는 않는다. “선수들이 못해도 야유보다는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고 그래도 안 되면 잘하는 팀으로 내가 응원하는 팀을 바꾸면 되지 않느냐”는 건 정말 “아내는 바꿔도 응원하는 팀은 못 바꾼다”는 축구팬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 버스를 막고 불만이라도 터트려야 선수들이 정신 차릴 수 있다면 이게 뭐가 잘못된 일인가.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다. 심지어 맨체스터유나이티드 팬들은 웨인 루니가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그가 공을 잡을 때마다 야유를 퍼붓는다. 이런 행동에 비하면 K리그 서포터스는 아주 착해 빠진 거다. 선수들과 감독, 구단 관계자들 역시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이겨도 관심 없고 져도 관심 없는 구단에서 뛴다면 이 얼마나 허무할까. 수만 관중 앞에서 주목을 받으며 뛰는 선수라면, 고액의 연봉을 받는 선수라면 혹여 실망스러운 경기력에 머물 때의 비판도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 당신이 잘할 때 받는 박수와 당신이 받는 어마어마한 연봉에는 이 정도의 부담감 쯤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버스 가로막기와 같은 팬들의 불만 표시가 싫거든 고양자이크로처럼 아무도 관심 없는 팀에서 뛰면 된다. 그건 또 싫지 않은가. 팬들의 관심에 감사한 마음으로 뛰자.

포항 최진철 감독은 실망스러운 경기 이후 팬들과 면담을 갖기도 했다. ⓒ포항스틸러스

팬들은 가무단이 아니다

또한 버스 가로막기는 구단을 향한 불만 표시인데 선수들을 앞세우고 구단 프런트는 팬들의 압박에서 빠져 나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수원삼성 팬들이 이번 수원더비가 끝난 뒤 버스를 가로 막은 건 능력이 부족한 구단 프런트에 대한 성토였는데 선수단 주장인 염기훈이 나와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해야 했다. 꼭 수원삼성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앞으로 팬들이 선수단 버스를 가로막으면 이건 선수들이 아닌 구단 전체를 향한 불만 표시라는 걸 반드시 기억했으면 좋겠다. 오히려 버스를 가로막았던 팬들은 눈물을 보이는 염기훈의 이름을 연호할 정도로 그에게 응원을 보냈다. 단순히 버스를 가로막으면 무조건 팬들의 마녀사냥이 시작된다고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그저 버스를 가로막고 항의하는 게 충동적인 일이 아니라는 점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물론 버스 가로막기와 같은 행동을 할 때도 그 안에서의 룰은 잘 지켜져야 한다. 폭력이 오가는 등의 행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군중심리에 휩싸여 선수나 감독에게 인신공격을 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만 지켜진다면 나는 실망스러운 경기를 했을 때 팬들이 선수단 버스를 가로막고 항의를 하는 것도 하나의 권리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팬들은 구단 하청업체 직원들도 아니고 가무단도 아니다. 쓴소리를 해야할 땐 쓴소리를 하는 소비자이자 평생을 함께 가야 할 동료다. 나는 이렇게 버스를 가로 막을 정도로 팬들이 많은 팀이 참 부럽다. 선수라면 아무리 극성스러워도 이런 팬들이 있는 곳에서 뛰고 싶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버스 가로막기와 항의 또한 일종의 팀을 지지하는 행위라고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응원이나 열심히 하라”는 건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에서나 가능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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