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과의 면담 후 김학범 감독은 자진사퇴했다 ⓒ성남FC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K리그 최고의 감독은 누굴까. 거액을 받고 중국으로 떠난 최용수 감독이나 전북을 역대 최강으로 이끈 최강희 감독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이뤄낸 성적은 훌륭하다. 하지만 구단의 자금력을 제외하고 최고의 지략가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성남FC 김학범 감독을 꼽을 것이다. 아마 김학범 감독이 FC서울이나 전북현대 감독이었더라면 최용수 감독과 최강희 감독 못지 않은 성적을 낼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전북의 장점이 레오나드로와 이동국, 김신욱이고 서울의 장점이 아드리아노, 데얀, 박주영이라면 성남의 장점은 김학범 감독 아니었을까.

성남의 급격한 추락, 그리고 김학범 감독과의 이별

그런데 김학범 감독이 돌연 성남 지휘봉을 내려 놓았다. 성남은 어제(12일) 보도자료를 통해 “김학범 감독이 자진 사퇴한다. 후임으로는 U-18 팀을 이끌고 있는 구상범 감독이 올 시즌 말까지 감독대행직을 수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년 동안 성남 감독을 지내고 지난 2014년부터 또 다시 2년 동안 성남 사령탑을 수행했던 김학범 감독은 이렇게 아쉽게 팬들과 작별하게 됐다. 사임 이틀 전인 지난 10일 수원삼성과의 경기에서 1-2로 패배한 뒤 팬들이 항의하자 “선수들을 믿는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던 그가 돌연 사임하게 되면서 사실상의 경질 아니냐는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김학범 감독의 사퇴 이유는 역시나 성적 부진이다. 개막부터 5월까지 6승 3무 3패를 기록하며 상위권을 유지했던 성남은 6월부터 8월까지 16경기 중 4승(4승 5무 7패)만을 거두는 극도의 부진을 겪었다. 특히 최근 3연패를 당하는 등 리그 성적이 7위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상위스플릿 진출 및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진출권 획득을 올 시즌 목표로 정한 성남으로서는 김학범 감독과 결별하고 분위기 반전을 노리겠다는 심산이다. 그러면서 이영진, 김영철, 김해운, 김호영 코치 또한 팀을 떠나게 됐다. 하루아침에 성남은 전혀 다른 팀으로 변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회사가 망해 실업급여를 받아본 내 경험으로 봤을 때 이런 자진 사퇴는 실업 급여 대상자도 아니다.

최근 들어 성남의 경기력이 극도로 실망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심지어 유효슈팅을 하나도 기록하지 못하는 경기가 있을 정도로 부진했다. 최근 3연패를 하는 과정에서는 단 한 골만을 넣고 네 골을 허용했다. 김두현은 경기력이 예전 같지 못하고 티아고가 떠난 빈자리도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 수비를 든든하게 채워주던 윤영선은 상주상무에 입단했다. 시즌 초반 박진감 넘치는 경기에 매료돼 경기장을 채우던 관중도 최근 들어 서서히 떠나가기 시작했다. 성적이 좋지 않다보니 평균 관중이 약 2천여 명 정도가 빠진 것이다. 구단으로서는 변화가 필요했고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김학범 감독에게 돌렸다.

위기의 순간 팀을 구해낸 영웅 김학범

하지만 나는 성남의 이같은 결정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일단 성남의 최근 상황을 살펴보자. 성남의 찬란했던 마지막 시기는 2010년이었다. 라돈치치와 정성룡, 사샤, 홍철, 조병국, 김성환 등 쟁쟁한 선수들을 앞세워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때가 성남의 잘 나가던 마지막 시기였다. 이듬해 윤빛가람과 요반치치, 한상운을 거액에 데려온 건 성남이 몰락하기 직전 마지막 투자였다. 이 영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신태용 감독이 사임했고 문선명 총재까지 사망하면서 팀은 빛을 잃었다. 김정우와 홍철, 몰리나, 사샤, 라돈치치 등 핵심 선수들은 모두 팀을 떠났고 유망주들도 기대 만큼 성장하지 못한 채 이적해야 했다.

이때부턴 암흑기였다. 안산으로의 연고 이전 논란이 일면서 팀의 존폐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안익수 감독도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고 후임 박종환 감독은 선수 폭행 문제로 불명예 퇴진했다. 이후 성남은 이상윤 감독 대행과 이영진 감독 대행이 임시방편으로 팀을 맡게 됐지만 성적은 기대 이하였다. 한해 동안 무려 세 명의 감독이 거쳐갈 만큼 표류했다. 2011년에는 리그 10위, 2012년에는 리그 12위에 머물렀고 K리그 클래식이 출범한 2013년부터는 강등을 걱정해야 하는 팀이 되고 만 것이다. ‘부자구단’의 상징이었던 성남은 시민구단으로 전환하며 운영비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우승컵은커녕 리그 잔류, 아니 팀의 존속을 걱정하는 게 성남의 모습이었다.

바로 이때 등장한 구세주가 김학범 감독이었다. 2014년 9월 성남 감독으로 복귀한 그는 두 달 뒤 곧바로 성남을 FA컵 정상에 올려놓았다. 이뿐 아니다. 강등 위기에 놓인 팀을 시즌 막판 2연승으로 이끌며 극적인 잔류에도 성공했다. 이듬 해에는 AFC챔피언스리그에서도 16강에 진출해 광저우 헝다를 상대로 안방에서 2-1 승리를 따내는 등 잔류 걱정 뿐인 다른 시,도민구단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선보였다. 이는 팀 운영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 이재명 구단주나 선수들, 그리고 팬들도 함께 이뤄낸 결과지만 김학범 감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2014년 FA컵에서 우승을 하지 못했더라면 2015년 시즌을 앞두고 김두현 등 좋은 선수들을 데려오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광저우를 만나 승리를 거두기는커녕 예선에서 고배를 마셨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나 역시 광저우 원정경기 당시 성남의 길거리 응원석에 앉아 맥주를 얻어먹지 못했을 것이다.

성남FC가 시민구단 전환 이후에도 줄곧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건 김학범 감독의 역할이 컸다. ⓒ성남FC

성남이 여전히 다크호스로 지목되는 이유

김학범 감독이 위태롭던 팀을 지금의 위치까지 올려 놓은 건 명백한 사실이다. 다른 시,도민구단들이 내홍을 겪고 재정난에 허덕이면서 잔류 걱정, 혹은 강등 후 승격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윗물에서 놀 수 있었던 건 이런 대단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가진 능력이 부족하지만 그간 쌓아온 업적, 일명 '까방권' 때문에 김학범 감독이 계속 성남 지휘봉을 잡고 있으라는 것도 아니다. 김학범 감독은 누구처럼 “내가 얘 키웠어”라며 명함 하나 달랑 달고 축구계에서 군림하는 과거형 지도자가 아니다. 포항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했던 티아고를 영입해 완전히 개조해 놓고는 40억 원의 이적료 대박을 친 것도 김학범 감독의 작품이다. 꼭 과거의 영광 때문이 아니라 그는 현재도 K리그 클래식에서 가장 수준 높은 감독 중 한 명이다.

여전히 성남일화 시절의 후광이 남아 있어 성남이 강팀 비스무리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사실 성남은 여타 시,도민구단들 이상으로 추락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살아났다. 이런 이미지를 만든 건 김학범 감독이라는 사실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지난 시즌에도 성남은 시민구단이면서도 상위 스플릿에 오르는 등 다크호스 이상의 평가를 받기에 충분했다. 성남은 지난 5월부터 넉 달 동안 안방에서 1승 2무 8패라는 참담한 성적을 거뒀고 김학범 감독에 대한 불신도 깊어졌다. 하지만 성남의 올챙이적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성남은 2012년 안방에서 무려 5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적도 있다. 기다림에 익숙한 성남이 김학범 감독에게 시간을 조금만 더 줬으면 어땠을까.

더군다나 성남이 아무리 최근 들어 추락해 7위까지 떨어졌다고 해도 3위 울산과의 승점차는 4점에 불과하다. 심지어 성남은 울산보다 한 경기를 덜 치른 상황이다. 하위 스플릿으로 떨어졌을 때 감독에게 책임을 물어도 늦지 않았을 것이고 올 시즌을 끝으로 김학범 감독의 계약이 만료되는 상황에서 시즌 종료 뒤 결과를 보고 재계약을 맺지 않아도 충분할 일이었다. 그런데 상위스플릿 진입과 AFC챔피언스리그 진출이라는 목표 때문에 남들이 다 군침을 흘릴 정도로 가치가 뛰어난 감독과 작별한다는 건 성남에 큰 손해다. 김태희처럼 예쁜 여자친구를 두고도 몸이 피곤해 안마방에 다니는 남자친구의 심정이 이럴까. 성남은 지금 진짜 가치 있는 감독과 너무나도 아쉽게 헤어지고 말았다.

성남FC가 시민구단 전환 이후에도 줄곧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건 김학범 감독의 역할이 컸다. ⓒ성남FC

이런 감독 어디서 또 못 구한다

어디 가서 이런 감독을 또 구할 수 있을까. 툭하면 감독이 바뀌는 시,도민구단들의 특성을 봤을 때 김학범 감독과 인연을 맺은 성남은 큰 축복이었다. 하지만 이제 성남은 감독대행 체제와 검증되지 않은 감독, 혹은 인지도가 부족한 감독 등으로 김학범 감독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것이다. 이러면서 시간은 흐르고 팀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을 우리는 K리그에서 자주 봐 왔다. 팀에 꼭 맞는 감독을 찾기까지 수년이 걸릴 수도 있다. 마땅한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명장 중의 명장과 이렇게 이별하는 건 성남이 실수한 거다. 반면 어느 팀에서건 눈독을 들이는 김학범 감독은 중국에 진출하건 국내 다른 팀을 맡건 선택지가 많다. 그때 가서 성남이 ‘김학범 감독 시대가 그리웠다’고 해도 늦는다. 나는 김학범 감독 같은 명장이 우리나라에 몇 없다고 생각하고 시민구단 성남이 그런 감독과 함께 한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더 걱정되는 부분은 성남이 김학범 감독과 헤어지면서 기존 코치들과도 작별하고 유소년 지도자들을 끌어 올렸다는 점이다. 구상범 U-18 감독이 감독대행으로 남은 시즌을 이끌고 변성환 U-15 감독, 남궁도 U-12 감독도 1군 코치로 합류할 예정이다. 일단 성인팀 입장에서 봤을 때도 선수단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건 큰 손해다. 또한 아직 이들이 성인팀 지도자로 검증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피 말리는 상,하위 스플릿 경쟁을 한다는 점도 아직은 불안하다. 여기에 유소년 팀 또한 큰 피해를 보게 생겼다. 독일 연수를 제공하는 등 야심차게 유소년 육성에 투자했던 상황에서 지도자들이 대거 성인팀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유소년 팀도 큰 차질이 불가피하다. 대안도 없이 김학범 감독과 작별하면서 선택한 게 고작 이런 방식인가. 이건 순리가 아니다.

최근 성남이 부진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티아고가 팀에 재정적 이득을 안겨주고 떠나는 시점에서 이미 대체자를 구할 시간이 없었다. 급하게 이적하는 바람에 대체 선수를 수혈할 수도 없었고 혹여 대체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비자 발급도 빠듯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비의 주축 윤영선이 군대에 두 번이나 입대하며 팀 분위기도 어수선해졌다. 핵심 자원이 빠진 상황에서 전력을 보충할 충분한 시간이 부족했는데 김학범이 아니라 김학범 할애비가 와도 별다른 방도가 없는 상황이었다. 일찌감치 갈렸어야 할 기업구단의 몇몇 감독은 여전히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데 김학범 감독이 이 상황에서 팀을 떠난다는 건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던 것 같다. 아직 올 시즌은 9경기나 남았고 이번 시즌이 끝나고 결정해도 될 문제를 성남은 너무 쉽게 결정하고 말았다. 장담컨대 김학범 감독만큼 없는 살림에 팀을 꾸릴 만한 감독도 없다.

성남FC가 시민구단 전환 이후에도 줄곧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건 김학범 감독의 역할이 컸다. ⓒ성남FC

김학범과 작별한 성남, 그들의 미래는?

나는 오래 전부터 성남이 시,도민구단들 중 그래도 특출난 성적을 내는 게 김학범 감독 때문이었다고 생각했고 성남의 전통이 끝나는 건 김학범 감독과 작별할 때부터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 예상이 틀렸으면 좋겠지만 이제부터가 성남 위기의 시작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능력이 부족한 감독이 몇 명씩이나 거쳐 가고 그러다 감독대행 체제를 맞고 그러다 강등 당하고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지고 또 언제 다시 승격할지 모르는 암울한 굴레를 반복하는 일부 구단들처럼 성남 역시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란다. 아직도 성남이 선수 영입에 수십억 원을 쓰고 총재 한마디에 보너스가 억대로 쏟아지고 리그에서 우승을 놓고 경쟁하는 팀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제 그랬던 시절은 성남의 오래된 추억일 뿐이다. 시민구단 성남의 지금 모습을 생각한다면 김학범 감독의 존재가 더더욱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2014년 4승 8무 11패로 강등권에 머물렀던 성남에 김학범 감독이 나타났을 때 팬들은 이렇게 말했었다. “제발 강등만 면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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