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왕성을 직접 만나 축구계를 떠난 이후의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한 해에도 수 없이 많은 신인들이 K리그에 등장하고 또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다. 이 선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K리그에 입성했지만 데뷔전도 치르지 못하고 그렇게 어느 순간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선수를 몇몇 K리그 팬들이 기억하는 이유는 딱 하나, 특이한 이름 때문이다. 바로 2010년 부산아이파크에 입단해 한 시즌 동안 꿈을 키웠던 명왕성이 그 주인공이다. 특이한 이름만으로 잠시 주목받았다가 사라진 그였지만 나는 오늘 그의 근황을 전하려 한다. 비록 명왕성은 K리그에서 빛나지 못했음에도 방황하고 좌절하는 이 땅의 많은 축구선수들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계와 축구계에서 떠난 명왕성이 다시 축구계로 돌아오기 위한 노력의 과정을 지금부터 공개하려 한다.

반갑다. K리그 역사에 있어 박격포, 신세계와 함께 특이한 이름 삼대장으로 평가받던 당신을 만나게 돼 영광이다.

나도 반갑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축구선수가 아니다.

그럼 요즘은 무얼하면서 지내나.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스포츠 사회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이번 학기가 4학기 째인데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가끔은 운동장에 있을 때가 그립기도 하지만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일단 당신의 지금 상황을 논하기 이전에 선수 생활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알겠다. 특이한 이름 때문에 선수 시절 몇 번 인터뷰를 했던 적은 있지만 이렇게 은퇴 이후에도 나를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한 이는 당신이 처음이다. 지금부터 내 이야기를 모두 털어 놓겠다.

당신은 학창 시절 꽤 잘 나가는 선수였다.

언남고등학교와 홍익대를 거쳤는데 당시 우리 팀이 상당히 강한 편이었다. 지금은 러시아에서 뛰고 있는 (유)병수와 성남FC의 (김)성준이하고 고등학교 시절 같이 뛰었다. 나는 중앙 수비수였는데 주전으로 줄곧 경기에 나섰다. 그러다 병수, 성준이와 함께 홍익대에 진학했는데 우리 멤버가 지금 봐도 대단했다. 이들 외에도 (김)보경이하고 (김)기희도 있었다. 지금 J리그 나고야에 간 (이)승희와 FC서울 골키퍼 (유)상훈이, FC안양 (주)현재도 같은 팀이었다. 한 학교에서 프로에 몇 명 가기도 힘들고 그 중에 주전으로 한 명 활약하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인데 당시 우리 학교 동기들은 지금도 다 프로 무대에서 잘 나간다. 그만큼 우리 학교가 강했고 나도 여기에서 꾸준히 중앙 수비수로 활약했었다.

이름만 들어도 정말 엄청난 팀이었다. 당시 홍익대는 대학 무대 정상에 섰던 걸로 기억한다. 홍익대에 갈 실력은 안 됐지만 홍대생들보다 홍대 앞에 더 많이 가서 놀았던 나에게도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전국체전에서 조선대하고 붙었던 적이 있다. 우리 학교에서는 (김)보경이가 에이스였고 조선대에는 ‘제2의 홍명보’라는 (홍)정호가 있었다. 프로팀 스카우터들이 이 경기를 보려고 대거 몰려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우리가 조선대를 5-0으로 이겨버렸고 골을 내주지 않은 나까지도 다들 좋게 보신 것 같다. 이 대회에서 딱 한 골만을 먹고 우승했는데 그것도 결승전에서 6-0 상황이 되자 심판이 상대팀에 페널티킥을 하나 불어줘서 실점한 게 전부였다. 팀이 워낙 강하다보니 자연스레 나도 프로팀에 노출됐고 대학교 3학년 때 드래프트를 통해 K리그에 입성할 수 있었다. 프로에 입성한 게 2010년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프로 무대에서 보여준 게 전혀 없었다.

내가 부산의 4순위였다. 1순위는 (한)지호였고 2순위가 (박)종우, 3순위가 유소년 출신, 4순위가 나였다. 그런데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원래 프로팀에 입단하기 전에도 십자 인대가 두 번이나 끊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는데 이게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타격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와 대학교 2학년 때 십자인대 파열로 고생을 했고 가까스로 재활에 성공해 대학교 3학년 때 전경기를 다 뛰었던 건데 프로에 오니 다시 부상 부위가 나를 괴롭혔다. 연골 파열 같은 부상도 자주 있었다.

 

명왕성(가운데)은 언남고와 홍익대에서 활약하며 수비수로서 인정을 받았다.

학창 시절 이름 깨나 날리던 당신으로서는 K리그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당황했을 것 같다.

그런데 핑계댈 것도 없다. 내가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대학교 때는 늘 주전이었는데 프로 무대에 와서 벤치에만 앉아 있으면서 삐뚤어진 내 잘못이 컸기도 했다. 경기에는 못 나갔지만 줄곧 1군에서 운동을 하며 ‘내가 저 형들보다 더 괜찮은 거 같은데 왜 나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을까’라고 원망도 많이 했다. 그런데 그러다가 결국에는 벌을 받고 말았다.

어떤 벌을 받은 건가.

대학교에서 십자인대를 다친 뒤 무릎에 핀을 박고 있었는데 통증이 심해서 그 핀을 빼 버렸다. 그런데 그게 덧나 심한 염증이 생기고 말았다. 병원성 바이러스에 전염돼 무균실 병동에서 독방을 써야할 정도였다. 한 달 동안 독방에서 독한 항생제를 맞고 버텼는데 근육이 빠질까봐 마취도 해주지 않더라. 아마도 너무나도 자만한 나에게 하늘에서 벌을 내린 것 같다.

다시 재기를 노리지는 않았나.

그때가 2011년 1월이었는데 몸도 아프고 경기에도 나서지 못해서 홧김에 그만두겠다고 짐을 싸서 팀을 나왔다. 이후에 전남과 다시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데 내가 “축구 하기 싫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다시 재활을 해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몇 번 재활 과정을 겪어보니 다시 이 재활을 해서 경기에 나설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드는 게 불가능할 것 같더라. 정신적으로도 너무 힘들었고 다리에는 근육이 다 빠져 뼈만 남아 있었다. 부모님께서도 내가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하니 “지금껏 그 고생을 참아가면서 프로팀에 가려고 축구를 했는데 조금 더 해보라”고 만류하셨다. 그런데 나는 그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안타깝다. 프로 무대에 입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비를 넘겨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현역 생활을 끝낸다는 건 너무 아깝다.

프로는 전쟁터다. 경기장만 전쟁터가 아니라 훈련장에서도 전쟁이다. 서로 웃고 장난치지만 그 안에서의 경쟁은 무시무시하다. 그런데 자주 상대와 부딪혀야 하는 중앙 수비수인 내가 수술을 많이 하다보니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저히 상대와 부딪힐 수 없겠더라. 아마추어 무대에서는 아파도 꾀를 부리면서 하는 게 통하지만 프로 무대에서는 이런 꾀도 통하질 않는다. 아마 다시 재활에 매달렸다면 하위팀이나 하부리그에서 30대 중반까지는 어떻게든 축구선수로서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겠지만 그 나이에 은퇴하고 나면 나에게 뭔가 많은 게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 국가대표 타이틀을 달지 못하는 이상 미래에 대한 현실적인 한계가 있었고 그때 가서 다른 일에 도전하려면 많이 늦을 것 같았다. 그래서 부모님께 내 계획을 차분히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홍익대를 나왔으면 남들이 보기에는 공부를 꽤 한 걸로 알고 있겠지만 당신은 체육 특기자였다. 공부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이 그 나이에 공부에 도전한다는 게 참으로 무모해 보인다.

교육대학원을 목표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석사 학위를 마치면 교사 자격증이 나오는데 이른 나이에 은퇴하고 일단은 국가 공인 자격증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준비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운동만 한 애를 누가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넣어주나. 대학원 전형을 알아보고 스스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시사에 약해 매일 아침 신문을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정독했다. 이렇게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보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검색을 하면서 세 시간씩 집중했다. 그리고 내가 어디 소속된 것도 아니어서 공부할 곳도 따로 없어 국립중앙도서관에 가 공부를 시작했다. 일단 대학원에 가려면 영어 점수가 필요했기 때문에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한 것이다. 이렇게 4개월을 공부하고 마지막 4주 동안에만 토익 점수를 올리기 위해 토익 학원엘 다녔다. 또 프로 생활하면서 모아둔 돈으로 체대 입시 학원 문을 두드렸다. 몸으로 하는 운동이야 자신있었지만 체육 이론에는 무지했기 때문이다. 심리학과 생리학, 체육교육론 등 체육 이론을 중점적으로 공부했고 한 번에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에 합격했다.

명왕성(가운데)은 언남고와 홍익대에서 활약하며 수비수로서 인정을 받았다.

나는 신촌에 옷이나 사러 간 게 전부인데 당신은 당당히 공부를 해서 신촌에 가게 됐다. 대단하다.

노력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나는 안 된다. 요새 내 노래방 18번이 ‘신촌을 못가’다. 그런데 막상 입학을 해서도 문제일 것 같다. 지금껏 공부만 해온 이들과 함께 경쟁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처음에는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대학원 수업은 대부분이 발표로 이뤄지는데 내가 언제 PPT를 만들어 봤겠나. 다른 학생들보다 발표 준비하는데 시간이 두세 배는 더 걸린 거 같다. 그런데 조금 지나고 보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운동보다는 공부가 더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은 자질도 타고 나야하고 운도 따라야 하고 거기에 지도자도 잘 만나야하는데 공부는 정해진 커리큘럼 안에서 세 시간이면 세 시간만 딱 집중하면 남들과 비슷하게는 갈 수 있더라. 혹은 내가 하는 노력에 따라 남들보다도 더 잘할 수도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계속 공부만 했던 학생들은 공부가 얼마나 편하고 즐거운 일인지 잘 모르는 거 같더라. 생각보다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들을 많이 봤다. 나는 지금까지 공부를 한 적이 없어서 두려움도 있었고 운동선수 출신은 무식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싫어 열심히 했다.

반대로 운동선수 출신이어서 공부하는데 유리했던 점도 있나.

인내심과 끈기는 역시 운동을 했던 이들이 나은 것 같다. 아마 대부분의 운동선수들이 그럴 거다.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 번 책상에 앉으면 10시간씩도 잘 참는다. 이건 그동안 힘든 운동을 견뎌왔기에 가능했던 일 아닐까.

당신은 ‘K리그 선수들의 은퇴에 대한 준비 행동 탐색’이라는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이른 나이에 은퇴한 당신이 썼기에 더 와 닿는 논문인 것 같다.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분야이기도 했다. 현역 선수들이 어떤 식으로 은퇴 준비를 하고 있는지 연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인터뷰를 기반으로 논문을 썼는데 은퇴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두 가지로 봤다. 첫 번째가 연령이었고 두 번째가 연봉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K리그 클래식 평균 연봉이 1억 1천만 원 정도였는데 이 이상 연봉을 받는 선수 다섯 명과 이 이하의 연봉을 받는 선수 다섯 명, 그리고 이십 대 다섯 명, 삼십 대 다섯 명 등 총 12명을 놓고 연구를 했다. (한)지호를 비롯해 (김)성준이, (이)원영이형, (김)상록이형 등이 도움을 줬다.

이거 다 인맥 아닌가.

맞다. 그래서 운동선수 출신인 내가 유리하게 잘 쓸 수 있는 주제였다.

그렇다면 논문의 결론은 어떻게 났나. 굉장히 궁금하다.

보통 우리는 나이가 많은 선수들이 은퇴 준비를 열심히 할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연봉이 은퇴 준비의 가장 중요한 척도였다. 20대 초반이어도 연봉이 높은 선수들은 재테크나 부동산, 공부, 창업 준비 등을 착실히 하고 있는 반면 나이가 있어도 연봉이 적은 선수들은 은퇴 이후를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팀내 입지가 불안해 당장 올 시즌 계약이 더 중요하지 은퇴 준비까지 할 정도의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있음에도 당장 올 시즌 계약이 걱정돼 은퇴 이후를 준비하지 못하는 선수들에 대한 행정적인 도움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참 의미 있는 논문이었다.

또 하나는 합숙과 관련된 거였다. K리그에서는 같은 팀에 있더라도 합숙을 하는 선수들과 합숙을 하지 않는 선수들로 나뉜다. 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혼자나 경력이 있는 선수들은 합숙을 하지 않고 신인들은 대부분이 합숙을 한다. 그런데 합숙을 하지 않는 선수들은 은퇴 준비를 착실히 하는데 비해 합숙을 하는 선수들은 그렇지 못했다. 훈련 시간 외에 외출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학원을 다닌다던가 자기 계발을 할 시간이 부족한 것이다. 반대로 합숙을 하지 않는 선수는 여가 시간이 자유로워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다. 사실 시즌 중에는 하루에 훈련을 한 번, 그것도 한두 시간만 하는데 합숙을 하는 선수들의 여가시간도 충분히 보장되어야 그들도 수월하게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할 수 있다.

이런 건 나에게 칼럼 소스로 좀 제공해 달라. 그렇다면 이 논문을 쓰면서 느낀 게 뭔가.

사실 은퇴 이후를 준비하는 선수들도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확실한 은퇴 준비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더라. 주위에서 도와주는 이들도 없고 자기 스스로 은퇴 이후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착실히 은퇴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많이 부족한 수준인데 이걸 조금 더 행정적으로 잘 뒷받침 해줬으면 좋겠다.

명왕성(가운데)은 언남고와 홍익대에서 활약하며 수비수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당신은 석사 학위 이후에도 박사 학위에 도전하고 있다. 이거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공부를 너무 한 번에 몰아서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다 병 난다.

교육대학원에는 박사 과정이 없어서 고민을 좀 했다. 임용고시를 보거나 사립학교를 알아봐 교사를 할까, 아니면 박사 과정을 밟을까 생각이 많았다. 그런데 공부에 대한 욕심이 더 생기더라. 그래도 현장 경험이 있는 운동선수 출신이 스포츠와 관련한 연구 아이디어나 정보 수집, 결과 해석에 유리하다는 생각을 해 스포츠 사회학 박사 과정을 시작하게 됐다. 엘리트 체육이나 공부하는 선수들을 위한 정책 등을 집중해서 연구하고 있다.

운동선수 출신인 당신이 쓰는 박사 학위 논문도 기대가 된다. 준비는 잘 하고 있나.

박사 학위 논문 이전에 국제 학술대회에서 영어로 논물을 발표해야 하고 학회지에 논문 3개를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학회지에 논문 두 개를 제출한 상태고 나머지 하나도 거의 다 썼다. K리그 생중계 시청 결정 요인 분석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K리그 중계 시청에 어떤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 중이다. 2014년과 2015년 자료를 모아 포털사이트 중계 조회수가 어떤 요인에 따라 변하는지 통계를 내고 있다. 구단별, 홈팀별, 슈팅수, 득점수, 전반 득점차, 파울수, 경기 시간이 주간인지 야간인지 등 20여개 정도 요인을 나눠 분석 중인데 역시나 홈팀이 전북이나 수원, 서울, 울산, 포항 등 기업형 빅클럽 경기 때 시청자가 확 늘어나더라. 구단 1년 투자 비용과 선수 평균 연봉이 시청 결정 요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슈팅수는 양팀 평균 24.5개를 기점으로 시청자가 확 나뉘더라. 이걸 조금 더 연구해 학회지 논문으로 투고할 예정이다.

나중에 칼럼으로 쓰게 자료 좀 달라.

나도 어렵게 연구하고 있는 거다. 당신도 직접 노력해서 조사해 보라.

알겠다. 보통 운동선수는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사는 무식한 이들도 비춰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당신이 이렇게 박사 학위에 도전하는 모습이 신선하기도 하다.

학부생들 강의도 하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항상 강조하는 게 운동선수들이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부모님과 지도자의 도움이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주변만 둘러봐도 어릴 때부터 학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부모님과 지도자가 있다면 운동선수들도 충분히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느껴왔다. 사실 나도 학창시절 축구부 생활을 하면서 학교 공부를 제대로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부모님이 늘 2주일에 한 권씩 책을 보내주셨다. 아버지가 다 읽으신 책을 받아 읽고 독후감을 꾸준히 썼다. 공부를 소홀히하지 말라는 부모님의 방침이었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하면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게 도와주신 부모님 덕분에 이른 은퇴 이후에도 내 길을 빨리 정할 수 있었다.

당신 말대로 지도자의 도움도 큰 영향을 끼칠 것 같다.

물론이다. 그런 면에서 언남고 시절 스승이신 정종선 감독님을 무척이나 존경한다. 일단 그 분은 성격 자체가 굉장히 정의롭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 우리끼리 ‘축구계의 김두한’이라고 했다. 사실 깊숙이 들어가 보면 축구계에는 부조리도 많은 편인데 정종선 감독님은 이해관계 같은 건 따지지 않고 부조리가 있으면 그걸 다 화끈하게 오픈해 버린다. 성격 자체가 워낙 남자다워 운동하는 사람들은 다 좋아했고 한 입 가지고 두 말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제자들도 다 감독님을 믿고 따랐다. 또한 잊을 수 없는 게 바로 언남고 축구부의 영어 수업이었다. 감독님이 평소 운동선수라도 학업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철학을 가지고 계신 분이셨는데 영어 선생님 한 명을 초빙해 저녁 훈련이 끝나면 교실 하나를 빌려 우리에게 영어를 배우도록 하셨다. 심지어 우리가 경남 진주로 전지훈련을 갔을 때도 이 영어 선생님을 진주까지 모셔 오실 정도로 운동선수의 공부에 대한 철학이 확고했다.

그렇다고 다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아닐 거 같다.

우리 학년은 다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 우리 밑에 학년인 지금 FC안양의 (서)용덕이, 대구FC에 간 (최)정한이는 매일 자더라. 어찌 됐건 많은 학생들에게 당시의 면학 분위기가 지금까지도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최정한은 누나가 예뻐서 공부를 좀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런데 당신은 뭐니뭐니해도 역시나 특이한 이름이 인상적이다. ‘명왕성’이라는 특이한 이름 때문에 이득을 본 적도 있을 것 같다.

물론이다. 처음 부산에 입단한 뒤 이름이 특이해 인터뷰도 여러 번 했고 팬들의 기억 속에도 강렬히 남게 됐다. 한 번은 부산 신인 선수들에 대한 기사가 나왔는데 다들 선수 얼굴이 나온 사진을 썼지만 내 사진만 명왕성 행성 사진으로 올라온 적도 있다. 공식 경기에는 한 번도 출장한 적이 없지만 유독 부산 선수단 사인회에도 많이 나갔다. 다 특이한 이름 때문이었다.

명왕성(가운데)은 언남고와 홍익대에서 활약하며 수비수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됐다. 개인적으로도 무척 아쉬울 것 같다.

포털사이트에 내 이름을 치면 ‘명왕성 퇴출’이 연관 검색어로 뜬다. K리그 승부조작 사건 이후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승부조작 때문에 K리그에서 퇴출된 줄 안다. 승부조작과 전혀 연관이 없는 나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아니 경기에 나가지를 못했는데 무슨 승부조작인가.

알겠다. 당신은 K리그 승부조작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걸 이 자리를 통해 다시 한 번 밝혀두자.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떤 길을 걷고 싶나.

첫 번째 목표는 스포츠 사회학 교수가 되는 거다. 능력이 되고 타이밍이 잘 맞는다면 꼭 도전해 보고 싶다. 그리고 교수가 되건 안 되건 다시 축구 쪽 일을 하고 싶다. 행정 관련 일도 좋고 지도자도 좋다. 학창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나도 지금까지 축구를 했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한다. 지금은 비록 축구계와 떨어져 있지만 언젠가는 축구계로 돌아가려 한다. 비록 명왕성은 태양계에서 퇴출됐지만 나는 축구계에서 퇴출되고 싶지는 않다.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은 축구선수로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은퇴했지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있다. 당신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좌절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다.

주변 친구들만 보더라도 운동을 그만두면 할 수 있는 일에 제약이 많다. 대부분이 유소년 지도자가 되거나 대출을 받아 자영업을 한다. 어릴 때부터 한 분야에서 땀 흘렸던 이들이 전문적인 분야를 찾아가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다. 그런데 이건 스스로가 의지를 가지고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을 취득해야 해결할 수 있다.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사실 내가 박사 과정을 밟고 있지만 이게 정답이 아닐 수도 있고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중에 내가 잘 안 되면 이게 시간 낭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주변 동료들을 보면 축구 외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비하하는 경향이 짙다. ‘난 축구만 해왔으니 이건 못하고 저것도 못해’라는 식이다. 운동을 하다 그만둔 친구들이 나에게 ‘나도 공부할 수 있느냐’고 많이 묻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일단 도전해 보라고 한다. 건방진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겪어본 바로는 운동보다 공부가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 두려워하지 않고 시작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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