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니어스 | 김재학 기자] 2016 리우올림픽 남자 펜싱 에페 개인전 결승에서 21세의 박상영은 경험이 풍부한 41세의 ‘백전노장’ 게자 임레(헝가리)를 극적으로 제압하고 금메달을 따냈다. 승부 자체도극적이었지만 스무 살이나 나이가 많은 베테랑은 제압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다. 이렇게 성인 무대에서 스무 살의 차이만큼이나 연령별 대표팀에서의 한 살 차이 또한 크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어린 선수들 사이에서는 한 살이라도 더 나이 많은 선수가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열린 2016 펜싱 청소년 대표선수 육성 합숙훈련 플뢰레 내부 1차 평가전에서 한 중학생이 고등학생을 연달아 제압하고 2위에 올라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나이가 깡패’라는 연령별 대표팀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16세의 유망주 정수용이다.

칼을 내려 놓았던 유망주, 정수용

지난 26일 강원도 양구국민체육센터. 한 여름 기세가 한풀 꺾였지만 이곳에는 펜싱 장비로 중무장한 젊은 검투사들이 내뿜는 열기로 뜨거웠다. 세 차례의 전국대회 성적으로 점수를 매겨 선발된 펜싱 청소년 대표선수들의 합숙훈련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우올림픽이 막 끝난 탓에 이곳에 모인 유망주들은 저마다 4년 뒤 일본 도쿄에서 ‘제2의 박상영’이 되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있었지만 사실 이들의 소박한(?) 1차 목표는 올 11월에 일본에 가는 것이다. 이번 펜싱 청소년 대표선수 육성 합숙훈련에서 종목별로 3위 안에 들면 올 11월 일본으로 전지훈련을 갈 자격을 얻기 때문이다. 아직은 해외 전지훈련이 꿈으로만 느껴지는 이들에게 일본 전지훈련은 4년 뒤 도쿄올림픽보다도 훨씬 더 두근거리면서도 현실적인 꿈이었다.

정수용도 마찬가지다. 계양중학교에서 지난해인 중학교 2학년 시절부터 주장을 맡은 그는 전국대회 개인전 은메달과 단체전 동메달을 따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또래 선수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정수용에게 시련이 닥쳤다. 발목 부상을 달고 살았고 여기에 가정사까지 겹쳤다. 어린 나이에, 그것도 선수로서 감당하기 힘든 시련에 슬럼프가 이어졌다. 41세의 베테랑 게자 임레도 한 순간 무너져 다 따낸 금메달을 내주는 ‘멘탈 스포츠’ 펜싱에서 15세의 어린 정수용은 너무나도 크게 흔들렸고 결국 그는 칼을 내려놓은 채 방황했다. 주변에서는 “참 좋은 선수가 될 재목인데 안타깝다”고 했다. 가능성 있는 한 명의 유망주가 쓸쓸하고도 조용히 묻힐 뻔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정수용에게 손을 내민 이가 있었다. 바로 계양중학교 여환용 코치였다. 재능 있는 선수가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는 펜싱 지도자가 아니라 아버지처럼 그를 대했다. 혹독하게 대하기도 했고 때론 감싸 안아주며 다시 정수용을 세로 1.5m, 가로 12m 위의 ‘삐스트’에 올려 세웠다. 잠시 칼을 놓았던 정수용도 금방 감을 되찾기 시작했고 그 사이 기쁜 소식도 전해졌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2016 펜싱 청소년 대표선수 육성 합숙훈련에 참가하세요.” 올 4월에 열린 제28회 한국중고펜싱연맹회장배 전국 남녀 중/고 펜싱 선수권 대회에서 2위에 올른 성적이 반영돼 합숙훈련에 참가하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한때 칼을 내려 놓았던 정수용이 하루아침에 태극마크를 달게 되는 순간이었다. 비록 성인 대표도 아니고 청소년 대표를 뽑는 합숙훈련이었지만 그는 왼쪽 팔에 당당히 태극마크를 달고 훈련지인 강원도 양구로 입성했다.

고등학생을 이긴 중학생 펜싱 선수

“처음에는 어리벙벙했죠. 그런데 막상 훈련장에 와 보니 더 막막하더라고요. 저보다 신체조건은 물론 기술과 경험도 더 많은 형들과 대결해야 했어요.”고등학생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수용은 당연히 불리한 조건으로 싸워야 했다. 합숙훈련 최소 연령인 16세로 갓 이 조건을 충족한 정수용은 170cm를 갓 넘긴 크지 않은 키로 경험과 신체조건에서 앞서는 형들과 동등하게 맞붙어야 했다. 좁디 좁은 ‘삐스트’ 위에서 그가 숨을 곳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정수용은 목표를 소박하게 잡았다. “아직은 부족한 게 많아요. 더군다나 형들과의 경쟁이어서 목표는 5등 정도로 잡았어요.” 정수용은 청소년 대표 육성 합숙훈련에 참가한 8명 중 중간 정도만 해도 경쟁에서 진 게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스피드로 승부를 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스피드는 형들 못지 않거든요.”그런데 자체 1차 평가전 첫 경기에서부터 정수용이 동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접전이 예상된 첫 경기에서 일방적인 경기운영 끝에 승리한 것이다. 첫 경기가 8강이었기 때문에 이 경기에서 승리를 따내며 4강에 진출한 정수용으로서는 이미 5등이었던 목표를 이룬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4강에서는 한국펜싱협회 회장배 전국 중/고 펜싱대회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강력한 우승후보를 접전 끝에 15-12로 제압하며 1,2위 결정전까지 진출하는 사고(?)를 친 것이다. “4강에서는 아마 이기기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석 점차로 이기면서 자신감이 많이 생겼죠.” 이 모습을 지켜본 다른 종목 선수들과 선배들은 다들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결국 정수용은 1,2위 결정전에서 역시 한국펜싱협회 회장배 전국 중/고 펜싱대회 등의 대회에서 금메달2개와 은메달2개, 단체전 동메달 등을 따낸 동 나이대 특급 선수 이광종에게 패하며 2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부상 등 힘든 문제가 겹쳐 펜싱을 중간에 멈췄던 그가 쉬고 돌아와 형들을 연달아 제압하고 플레뢰 2위에 올랐다는 건 충분한 성과였다. 이 모습을 지켜본 청소년대표팀 최병철 감독은 “아직 몸이 조금 딱딱한 느낌이 있는데 유연성만 키운다면 좋은 선수가 될 자질이 충분하다”면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내달 10일까지 열리는 육성 전지훈련의 2차례 내부 평가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청소년 대표팀에 정식 발탁되는 규정상 정수용은 이미 형들보다 한 발짝 먼저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남들보다 돌고 돌아 온 길이지만 정수용은 남들보다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정수용도 박상영처럼 할 수 있다

정수용은 최근 막을 내린 2016 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박상영과 같은 경남 진주 출신이다. 그래서 이번 올림픽을 통해 ‘할 수 있다’는 박상영의 메시지를 누구보다도 더 절실하게 공감했다. “같은 고향 출신인 박상영 선배님은 저의 롤모델입니다. 올림픽에서 힘든 과정을 거쳐 최고의 자리에 오른 모습을 보며 저도 이 힘든 순간을 이겨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당장 최고의 자리가지 올라가는 것은 무리지만 조금씩 성장하고 싶어요. 선수로써 걸을 수 있는 엘리트 코스인 유소년 대표와 청소년 대표를 거쳐 국가대표 상비군, 그리고 최종적으로 성인 대표팀 선수가 돼 태극마크를 달고 큰 무대에 나서고 싶습니다.” 정수용은 아직 16세에 불과한 어린 선수지만 그럼에도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정수용은 잠시 운동을 쉬었음에도 자신보다 경험과 신체조건에서 앞서는 형들을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는 경기력을 선보이며 펜싱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박상영은 스무 살이나 나이가 많은 선수를 앞에 두고 “할 수 있다”고 외치며 기적을 만들어냈고 그와 같은 곳에서 나고 자란 16세의 어린 선수도 불리한 조건을 이겨내며 꿈을 만들어가고 있다. 아마 박상영의 몇 해 전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정수용의 땀이 언젠가는 박상영처럼 보답 받는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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