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5일)은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며 광복을 맞은 지 7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날이다. 이 땅에서 일제의 탄압에 맞서 싸우다 고통 받은 이들을 떠올리고 그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하루가 됐으면 좋겠다. 만약 일제에 항거한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일제의 식민지로 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선조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보내며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칼럼을 준비했다.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한 축구부가 축구라는 꿈을 포기하고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우리 민족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부터 우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보자.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이 땅의 젊은이들이 일제와 맞서 싸우던 그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하려 한다.

전국을 제패한 당대 최강 경신중학 축구부

1928년 경신중학은 당대 최강이었다. 지금이야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돼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중학교가 6년제로 지금의 고등학교 역할까지 맡고 있을 때였다. 당시 경신중학 축구부는 전국의 초특급 유망주가 대거 몰려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중학생 신분으로 당시 대표팀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축구단 상해 원정 멤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던 김용식을 비롯해 훗날 ‘금석배 축구대회’의 세운 채금석, 평양의 축구천재 김영근, 김성태, 이혜봉, 임창제, 차복준, 최성손 등이 포진해 엄청난 전력을 과시했다. 당시 경신중학은 성인 팀들과의 경기에서도 우위를 점할 만큼 강했다. 관서체육회 주최의 평양 대회에서 숭실중에 두 번 패했을 뿐 2년 동안 그 외에는 중등부는 물론 대학과 일반 팀까지 모두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경신중학을 당해낼 팀은 이 땅에 없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와세다 대학이 가장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일본과 중국, 필리핀 등이 참가하는 극동경기대회에서도 일본 축구 대표로 참가할 정도의 실력을 보인 와세다 대학은 대회 참가 직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에 조선에 잠시 들렀다. 조선의 여러 팀과 경기를 펼쳐 와세다 대학이 얼마나 강한지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와세다 대학은 조선축구단과 숭실전문, 평양 무오축구단 등과의 평가전에는 쉽게 합의했지만 유독 한 팀과의 경기는 거부했다. “경신중학과는 경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워낙 강력한 경신중학과의 경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경신중학은 경기를 거부하는 와세다 대학을 이렇게 설득했다. “저희는 졸업생까지 경기에 출전시키겠습니다.” 졸업생이 나서면 조직력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와세다 대학이 경신중학과의 평가전에 합의했다.

하지만 경신중학은 순수 재학생으로만 팀을 꾸렸다. 김용식과 채금석, 김영근, 김성태 등 주축 주전 선수들이 총동원됐다. 그런데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20대 초중반의 선수들이, 그것도 일본 최강팀이라는 선수들이 이제 막 10대 중반을 넘어선 경신중학에 시종일관 끌려 다닌 것이었다. 결국 경신중학은 와세다 대학을 4-3으로 격파했다. 전조선 축구계는 물론 일본까지도 점령한 것이었다. 단짝인 김용식과 채금석은 이때 평생의 약속을 하기도 했다. “술과 담배, 도박, 여자에 정신 팔지 말고 오로지 축구에만 전념하자.” 이 둘이 이끄는 경신중학은 1929년 가을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전일본중학축구대회 출전권까지 획득했다. 머지 않아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들로 이뤄진 경신중학의 놀라운 경기력을 보여줄 생각에 크게 부풀기 시작했다. 이건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경신중학의 실력으로 봤을 때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경신중학은 일본 무대를 평정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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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금석 선생은 은퇴 후 고향인 군산으로 내려가 ‘금석배 축구대회’를 열기 시작했다. (사진=군산시축구협회)

1929년 가을, 광주학생운동이 시작되다

이 무렵 경신중학이 위치한 서울과 멀리 떨어진 전라남도 광주는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었다. 일제 강점기 하에 광주와 나주의 중심지를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이어졌다. 부유한 일본인들이 풍족한 삶을 누리는 동안 가난한 조선인들은 온갖 핍박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일이 벌어졌다. 마치 자신들이 이 땅의 주인이고 조선인을 하인 취급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희롱 당하는 여학생의 사촌동생이 결국 참다 못해 일본 학생들에게 응징을 가하기 시작했다. 싸움의 규모가 점점 커져 조선인 30여 명과 일본인 50여 명이 집단으로 맞붙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출동한 일본 경찰은 이를 중재할 생각이 없었다. “조선놈들이 잘못했네.” 일본 경찰들은 조선인 학생들을 일방적으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나라를 잃은 것도 서러운데 이 땅의 여성들이 희롱당하는 걸 막을 수도 없는 서글픈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이 광주 시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폭력 사건이 터지고 며칠 뒤인 11월 3일 일왕의 생일을 맞아 학생들이 강제로 기념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하지만 이날은 음력으로 10월 3일 즉, 우리의 개천절이었다.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날 기미가요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오자 기념행사에 강제로 참가한 조선인 학생들은 기미가요 대신 침묵으로 일관했고 행사 후 시위를 시작했다. 희롱 사건을 불공정하게 보도한 신문사로 찾아가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며 항의했고 또 다시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의 패싸움이 시작됐다. 처음 충돌한 광주중학 학생들 외에도 이웃 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참여하면서 규모는 더욱 커졌다. 결국 광주 지역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뭉쳐 항일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희롱 사건에 대한 항의 수준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교육에 반대하는 대규모 운동의 출발이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광주학생운동이다.

이 시위 때문에 학생들이 일제에 체포됐지만 시위 열기는 더욱 번져 갔다. 광주를 넘어 목포와 나주 등 인근 지역에서도 시위가 이어졌다. 12월 13일 서울에서 열기로 한 대규모 집회가 주요 간부들의 체포로 무산됐지만 곧바로 다시 학생운동이 이어졌다. 이 학생운동은 광주를 시작으로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까지 연결되고 있었다. 학생들은 “약소민족 해방만세”, "제국주의타도 만세“ 등을 외치며 거리로 뛰쳐 나왔다. 일본 경찰이 수 없이 많은 학생들을 구타하고 체포했지만 지금껏 일제 치하에서 핍박 받고 억눌려 왔던 학생들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조직하거나 동맹휴학을 펼쳐 나갔다. 언론 탄압으로 이 소식이 보도되지는 못했지만 학생들은 입에서 입으로 이 소식을 전국으로 알렸고 마침내 서울에서도 학생운동 움직임이 시작됐다. 단순히 일반 학생들만 참여하는 게 아니라 각종청년단체와 노동단체, 신간회, 해외 독립운동단체 등도 이 학생운동에 동참했다.

학생운동 참가로 해체되고 만 경신중학 축구부

이 학생운동이 서울까지 번지고 경신중학도 학생운동에 참여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도적으로 나서는 인물이 없었다. 잔혹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인 세력을 규합해야 하는데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경신중학 축구부 선수들이 용기 있게 나섰다. 전일본중학축구대회에서 조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땀 흘리던 선수들이 축구화를 벗고 가장 먼저 거리로 뛰쳐 나갔다. 축구로 한 시대를 풍미할 선수들이 자칫하면 모든 걸 망칠 수도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축구보다는 나라의 독립이 우선이었다. 이 중에서도 채금석과 김용식, 김영근 등이 시위를 주도했다. 지금껏 축구 이외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이들의 용기였다. 특히 김용식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더한 분노가 있었다. 아버지인 김익두 목사가 1925년 신사참배 거부로 일본 경찰에 의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심한 고문을 당했고 이후에도 신사참배를 또 다시 거부해 고향으로 유배를 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김용식은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를 이 학생운동에 모두 쏟았다.

3.1운동 때는 전교생이 모두 참여해 이듬해 졸업생이 단 1명에 불과할 정도로 민족 의식이 강했던 경신중학은 축구부 학생들이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자 이후 300여 명이 거리로 뛰쳐 나왔다. 보성고보에서도 400여 명, 중앙고등보통학교 700여 명,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 명, 협성실업학교 학생 150여 명 등이 시위에 참가했다. 12월9일부터 13일까지 서울 지역에서만 무려 1만 2천여 명의 학생이 시위와 동맹휴학에 동참했고 이 중 1,400여 명이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그런데 일본 형사들은 경신중학의 시위 주동자로 채금석을 지목했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형사 6명이 한 조가 돼 채금석의 집을 급습했다. 하지만 별명이 ‘오토바이’였을 정도로 날렵한 채금석은 일본인 형사 한 명을 발로 차 개천에 빠뜨린 뒤 함께 있던 김용식에게 이렇게 말했다. “용식아 튀자.” 결국 채금석은 김용식과 김영근 등을 데리고 자신의 고향인 군산으로 몸을 피했다. 학생운동 참여로 눈앞에 다가온 전일본중학축구대회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채금석과 김용식, 김영근은 잡히지 않고 도망쳤지만 그들은 학생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결국 퇴학 처분을 당하고 말았다. 군산에서 이 소식을 접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이 오랜 시간 기다려 왔던 꿈도 결국 이렇게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들은 몸을 숨긴 게 다행이었다. 나머지 선수들은 대부분이 결국 체포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특히 팀 동료였던 김성태는 당시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가 13일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렇게 경신중학에서 학생운동으로 무려 170명이 퇴학 당했고 축구부원도 12명 가운데 채금석과 김용식, 김영근, 김성태 등을 포함해 10명이나 퇴학 처분을 받으면서 축구부는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한때 전국을 호령하던 최강팀은 이렇게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한 순간에 사라져야 했다. 축구보다도 민족의 독립이 더 중요했던 이들은 이 순간 이후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다시 만날 수 없게 됐다.

그들을 다시 한 번 새겨야 할 광복 70주년

이후 김용식은 방황하다가 축구를 계속하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 숭실전문에서 워낙 재능이 뛰어난 그를 받아준 것이다. 김영근 또한 고향에 돌아가 방황하다가 2년 유급 형태로 숭실중학에 다시 입학해 축구를 계속하게 됐고 숭실중학은 김영근을 보강한 후 전조선축구대회 중등부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하지만 채금석은 학업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 집안일을 돌보며 지내다가 경평전 등 중요한 시합이 있을 때면 서울로 올라와 경성 선수로 출전했고 김성태는 축구를 그만두고 일본 교토 양양중학에 편입한 뒤 연희전문대 상과에 입학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 김성태는 훗날 <동심초>와 <산유화>, <못잊어>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가 됐다. 이후 친일 음악가라는 오명을 쓰게 된 김성태는 광주학생운동 당시 시위에 참가해 옥고까지 치른 자료를 입증해 친일파 명단에서 제외됐다. 평생을 친일파라는 손가락질 속에 살던 그의 나이 100세가 되던 2009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퇴학을 당한 나머지 축구부원 대부분은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고 더 이상의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이들은 학생운동에 참가해 결국 축구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고 더 이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게 됐다.

세월이 한참 흘렀지만 이들은 경신중학 졸업장을 따지 못한 걸 평생 한으로 안고 살았다. 그러다가 김성태는 퇴학당한지 39년 만인 1969년 명예 졸업장을 받았고 채금석과 김용식은 퇴학을 당한지 무려 57년 만인 1985년 명예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국가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그들은 결국 백발 노인이 되어서야 꿈에 그리던 졸업장을 딸 수 있었다. 당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던 경신중학 선수들은 이렇게 결국 뿔뿔이 흩어져 더 이상 위용을 과시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그들이 계속 뭉쳐 있었더라면 우리의 축구 역사가 얼마나 더 찬란했을지 모를 일이다. 아쉽고 슬픈 일이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축구선수를 꿈꾸던 몇 명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 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많은 젊은이들이 이렇게 꿈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말을 쓰고 우리 민족사를 배우며 살고 있는 건 이렇게 꿈을 포기한 채 목숨을 걸고 싸운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광복 70주년을 맞은 오늘, 당대 최강이던 경성중학 선수들과 광복을 위해 싸운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며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대한독립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