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초 나의 흑역사 하나를 공개하려 한다. 당시 나는 경남FC의 초대로 선수들에게 미디어 응대법에 대한 강의를 하기로 했다. 주제 넘는 일이었지만 신입 선수들이 영입된 상황에서 이 어린 선수들에게 미디어에 응대하는 방법을 같이 고민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흔쾌히 초대에 응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막상 현장에 도착해 보니 신입 선수는 물론 기존 선수들도 열외 한 명 없이 모두 강의를 듣는다는 것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관계자에게 물었다. “혹시 김병지 선수도 오시나요?” 그러자 관계자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연하죠. 이 강의는 모든 선수들이 들어야 합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초등학교 시절 김병지를 보며 축구를 접하게 된 내가 김병지 앞에서 무슨 강의를 한단 말인가. 20년이 넘게 프로축구를 경험하고 미디어를 대했던 김병지 앞에서 미디어 응대법을 강의하는 건 만수르 앞에서 돈 잘 버는 법을 강의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정말 나에게는 아찔했던 경험이었다.

그 당시 김병지도 K리그의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 김병지가 아직도 뛰고 있다. 그것도 지난 주말 무려 700번째 경기에 나서며 아직도 펄펄 날고 있다. 400경기 출장을 넘길 때쯤부터 노장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2009년 윤덕여 당시 경남 코치의 소원이 김병지의 500경기 출장이었는데, 600경기 때도 더 이상 새로운 기록을 쓰지는 못할 줄 알았는데 어느덧 700경기 출장이다. 그리고 김병지는 매 경기에 나설 때마다 자신이 세운 최고령 출장 기록도 갈아 치우고 있다. 10년 전에 은퇴했어도 지금껏 존경 받았을 선수가 여전히 현역으로서 대단한 기록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지금부터 김병지가 얼마나 대단한 축구선수로서의 인생을 살아왔는지 한 번 정리해 보려 한다. 원래 칼럼 주제는 김병지의 인생에 남을 경기를 여러 개 꼽는 것이었는데 그건 김병지가 은퇴할 5년 뒤에 써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병지는 아직도 뛸 날이 더 많지 않은가.

1959년생과 1994년생의 연결고리

여러분의 기억에 1992년은 어떻게 남아 있나. 나는 11살 때였고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요상한 그룹이 들고 나온 데뷔곡 <난 알아요>에 열광했다.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 ‘몬주익의 영웅’이 된 것도 이때였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는 뉴키즈온더블록의 브로마이드를 팔았는데 이들이 내한 공연을 한 1992년에는 콘서트장에서 압사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영화 <원초적 본능>을 보고 싶어 몰래 동네 비디오 가게에 갔다가 나이가 어리다고 쫓겨난 것도 1992년의 일이다. 대통령은 노태우였다. 1992년의 기억은 이제 근현대사 책에 기록 되도 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앞서 언급한 것들은 당시 11살이었던 내게 추억의 끝자락에 가깝다. 꼭 내 또래가 아니더라도 1992년의 아련한 기억은 다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하나 더 소개하자면 우리가 이제는 역사 속에서나 언급할 1992년부터 줄곧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김병지다. 김병지는 1992년 9월 2일 유공과의 경기를 통해 만22세의 나이로 프로축구 무대 데뷔전을 치렀는데 그때부터 김병지는 2015년인 오늘까지도 쭉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평생 자유롭게 살 것 같던 서태지가 아이를 낳고 대통령이 몇 번 더 바뀌는 동안에도 말이다.

더 놀라운 사실을 소개해 볼까. 당시 김병지와 함께 현대에서 뛰었던 동료 중에는 ‘선수’ 최강희도 있었다. 1983년 프로축구 출범과 함께 포철에 입단한 최강희는 이듬해 현대로 이적해 김병지가 프로 무대에 데뷔한 1992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현역 선수 중 최강희 감독과 함께 뛰어본 이는 김병지가 유일하다. 그런데 지금 전남에서 김병지와 함께 뛰는 팀 동료 중에는 1994년생 이창민도 있다. 1959년생 최강희 감독과 이창민은 무려 35세 차이가 난다. 김병지가 프로 생활을 시작했을 때 이창민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이창민 뿐 아니라 이지민과 이슬찬, 오영준, 오르샤 등 팀 동료들은 김병지가 프로 무대에 데뷔할 당시 엄마 뱃속에 있거나 아예 이 세상에 작은 점 하나도 아닌 존재였다. 김병지는 1959년생 최강희와도 동료로 경기에 나섰고 1994년생 이창민과도 호흡을 맞추는 역사의 연결고리다. 참고로 이제는 한국 축구의 에이스가 된 손흥민도 김병지가 프로에 데뷔한 1992년에 태어났다. 그런데 1950년대에 태어난 선수부터 1990년대생 선수들이 숱하게 K리그를 거쳐 가는 동안 김병지는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병지의 놀라움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그가 프로 무대를 누비게 된 1992년 상대팀 멤버를 살펴보자. 유공에는 최윤겸과 하재훈, 이광종, 황보관, 김봉길 등이 있었고 대우에는 김귀화와 김정혁, 여범규, 이태호, 하석주가 있었다. 일화에는 신의손과 안익수, 신태용의 존재가 빛났다. 럭키금성에는 서정원과 김봉수, 조민국이, 포항에는 박경훈과 윤덕여, 최문식, 박창현 등이 주전으로 활약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축구를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다들 눈치 챘을 것이다. 현재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거나 지도자 경력을 갖춘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동료들이 다들 지도자가 된 지금도 김병지만은 유일하게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아니 이제는 K리그 클래식 감독 중에 김병지보다 형인 사람을 찾는 게 쉬워졌다. 최강희, 김학범, 황선홍 감독 등 K리그 클래식 12개 팀 중 세 명 만이 김병지보다 나이가 많다. 소속팀 전남의 노상래 감독과 김태영 코치는 김병지와 동갑이다. 경기가 끝난 뒤 상대팀 감독의 어깨를 두드려 줄 수 있는 선수는 김병지 뿐이다. 웬만한 K리그 클래식 소속 코치는 김병지보다 다들 동생이다.

김병지보다 어린(?) 구단도 많다

아예 구단 역사 자체가 김병지의 프로 경험보다 적은 팀들도 많다. 김병지가 속한 전남도 김병지가 처음 프로에 입성했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명문이 된 전북 역시 마찬가지다. 이 두 팀 모두 1995년 창단해 김병지보다 프로 무대를 경험한 시간이 더 짧다. 2004년에 창단한 인천유나이티드와 2011년 출범한 광주FC는 김병지 앞에서는 꼬마다. 참고로 1995년 창단한 전남이 지금껏 치른 정규리그 경기가 601경기다. 리그컵 등 모든 경기를 포함해야 751경기다. 김병지가 지금껏 프로 무대에서 나선 경기가 700번이나 되는데 이게 명문으로 꼽히는 한 팀의 역사와 거의 맞먹는 기록이라는 건 실로 대단한 일이다. 그들을 절대 무시하거나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인천이나 대구, 경남, 강원, 광주 등 신생팀들은 구단의 모든 경기를 더해도 김병지가 세운 700경기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김병지 한 명이 어지간한 구단 하나 이상의 역사를 세우고 있는 셈이다. 최근 KBS에서 방영되고 있는 <청춘FC-헝그리 베스트11>을 보면 프로에서 한 경기라도 뛰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줄 알 수 있을 텐데 이 험난한 경쟁 세계에서 700경기나 나섰다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일이다.

일본의 미우라 카즈요시도 대단한 선수다. 1967년생으로 김병지보다 세 살이나 많은 미우라는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며 존경의 대상이 됐다. 나 역시 감독을 했어도 몇 번은 했을 그가 아직도 현역으로 뛴다는 것 자체에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미우라의 전성기 때는 그의 플레이가 얄밉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의 도전을 계속해서 응원한다. 하지만 미우라는 사실 J2리그인 요코하마FC에서도 주전 선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난 시즌에는 부상으로 단 두 경기 출장에 그쳤고 올해에도 경기에 나서면 60분 정도 뛰는 데 그치고 있다. 1967년생의 선수가 지금도 선수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는 놀랍지만 그는 이제 상징적인 선수일 뿐이다. 그에게서 전성기 시절의 폭발력을 기대하기도 어렵고 왕성한 체력을 기대할 수도 없지만 계속해서 도전하고 경기에 나설 준비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김병지는 여전히 리그에서 손가락에 꼽힐 만한 실력을 선보이고 있다. 그것도 K리그 챌린지 무대가 아니라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주전 자리가 날아가는 K리그 클래식 무대에서 말이다. 골키퍼와 공격수를 비교한다는 건 무리지만 김병지가 여전히 K리그 클래식에서 경쟁력 있는 골키퍼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저 매 경기 기록 갱신을 위해 감독이 투입시키는 선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김병지의 700경기 출장은 대단한 기록이다. 그런데 김병지는 여전히 도전한다. 777경기를 다음 목표로 잡고 전진할 생각이다. 앞으로 2년은 뛰어야 가능한 기록이다. 이에 대해 김병지는 “정말 쉽지 않다. 지금까지 24년 인생보다 앞으로 남은 77경기가 더 힘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은 경기도 지금처럼 계속 가겠다.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자신은 있다”고 밝혔다. 이게 다가 아니다. 작년쯤 만났던 김병지는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또 하나의 기적 같은 일에 대해 구체화하고 있었다. 바로 아들과 한 팀에서 뛰는 꿈만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언남고등학교 축구부에서 활약하고 있는 큰 아들 김태백(17세) 군이 빨리 성장해 프로 무대에 입성한다면 농담처럼 하던 ‘아들과 한 팀에서 뛰는 일’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김병지는 이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프로에 올 때까지는 못 기다려요. 아들이 빨리 저를 쫓아와야죠.”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던 700경기도 이뤄낸 김병지가 또 하나의 기적을 써내려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아무쪼록 그 꿈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매 경기 K리그 최고령 출장과 최다 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써내려가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김병지는 이 시대 모든 이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김병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김병지의 프로경기 출전 역사는 우리가 살아온 과거와도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김병지가 데뷔한 1992년 ‘국민학교’ 4학년이던 나는 여자 아이들 고무줄을 끊고 있었고 김병지가 극적인 헤딩골을 넣었던 1998년의 나는 펠레펠레 힙합 바지를 입고 다니던 여드름이 가득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그리고 그가 2004년 이운재와 챔피언결정전 승부차기에서 만나 뼈아픈 실축을 했을 때는 군대에서 상병 6호봉이 돼 이제 짬이 좀 됐다며 병장 옆에서 아부를 하며 경기 장면을 지켜봤었다. 2009년 김병지가 K리그 최초로 500경기 출장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을 때는 프리랜서가 돼 네이트에서 독자들과 처음 만나 기쁘면서도 생계가 막막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민학교 4학년 때 처음 김병지를 보며 축구에 열광하던 내가 노총각으로 늙어가는 2015년에도 김병지는 7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며 여전히 골문을 지키고 있다. 나는 나이를 먹어가고 내 첫 사랑은 벌써 아기를 둘이나 낳았는데 김병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 같다. 공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까지도 막아내는 남자, 김병지의 700경기 출장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앞으로도 그의 앞길을 응원한다. 김병지 뒤에 공은 없어도 김병지 뒤에서 응원하는 이들은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