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17일은 한국 여자축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 2015 캐나다 여자 월드컵 조별예선 마지막 스페인과의 격돌을 하루 앞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 경기 결과에 따라 한국 여자 축구는 역사를 쓸 수도 있었고 많은 이들은 여자 축구에 대한 대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날 여자축구연맹 홈페이지에 아주 작은 공지사항 하나가 올라왔다는 사실은 다들 알지 못한다. 그 누구도 관심조차 가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지사항은 이랬다. “WK리그 서울시청 여자축구단의 홈 경기 장소 및 시간이 변동되었음을 공지하오니 참고 바랍니다. 장소는 잠실종합보조구장에서 효창운동장으로 변경됐고 경기 시간도 기존 19시에서 16시로 변경됐습니다.” 다들 캐나다에 있는 여자 대표팀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정작 이들이 돌아와 치르는 WK리그 경기 일정과 장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서울시청이 평일 낮에 효창에서 경기를 한 이유

여자축구연맹의 결정사항은 서울시청이 치르는 후반기 6경기를 모두 효창운동장에서 치르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전반기 내내 효창운동장에서 경기를 펼친 서울시청은 후반기에는 잠실로 가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열악한 효창운동장의 인조잔디에서 경기를 치르는 것보다는 그래도 잠실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는 편이 더 선수들을 위해서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록 주경기장은 아니었지만 WK리그 선수들에게는 잠실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이라도 ‘꿈의 무대’가 될 수 있었다. 서울시청 측은 미리 잠실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을 관리하는 서울시설관리공단에 대여료까지 다 지불했다. 하지만 연맹 측에서 “잠실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은 사용할 수 없다”는 통보를 내렸다. 잔디와 조명 상태는 좋지만 본부석과 기록석 등 부대시설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반기 내내 열악한 효창운동장에서 뛰며 잠실운동장 보조경기장만을 기다려온 선수들에게는 힘이 빠지는 소식이었다.

서울시청 측은 다시 한 번 연맹에 실사를 요청했다. 하지만 연맹은 결국 재실사 닷새 뒤 또 다시 “잠실운동장 보조경기장에서는 경기를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내렸고 서울시청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부랴부랴 경기장을 찾아봤지만 당장 빌릴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웬만한 인조잔디 경기장은 생활체육팀들도 제비뽑기를 해 대관할 정도로 예약이 가득 차 있었고 결국 서울시청은 다시 효창운동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효창운동장 사정도 좋지 않았다. 경기를 오후 4시에 진행하지 않으면 추후 일정이 있어 대관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결국 서울시청은 울며 겨자먹기로 열악한 인조잔디인 효창운동장에서 땡볕을 맞으며 오후 4시 경기를 해야 했다. 그렇게 여자 월드컵 16강 신화를 쓴 한국 여자축구는 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서울시청은 지난 월요일(6월 29일) 수원FMC를 효창운동장으로 불러 들여 후반기 리그 첫 경기를 치렀다. 전국민이 여자축구의 열혈 서포터스가 될 것 같았던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고 이들이 오후 4시 땡볕 아래 효창운동장에서 공을 찬다는 사실 또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양 팀 선수들은 경기 시작 전 플래카드를 펼쳐 보였다.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써 있었다. “2015 캐나다 여자 월드컵 16강 진출! 대한민국 여자 축구선수들에게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격려 바랍니다.” 하지만 이 플래카드를 보는 이는 몇 명 없었다. 그저 선수들의 가족 등 100여 명만이 경기장을 찾았기 때문이다. 열악한 인조잔디에서 땡볕을 맞으며 경기를 치르는 선수들도 불쌍했고 평일 오후 4시에 축구를 보기 위해 모여든 이들도 안쓰러웠다. 이날 경기는효창운동장에서 다른 행사가 있어 경기를 4시에 할 수밖에 없다고 했지만 이후 경기 역시 오후 4시 킥오프를 피할 수도 없다. 효창운동장의 조명 조도가 낮아 야간 경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자칫 무리를 했다가는 조명의 폭발 위험까지 있기 때문이다. 효창운동장은 서울시축구협회가 위탁 운영하고 있는데 변압기와 전구 교체 등에 대해 협의하고 있지만 언제 이 공사가 완료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때까지 서울시청의 WK리그 경기는 효창운동장에서 해가 지기 전에 치러져야 한다. 날은 점점 더 더워지는데 말이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정부의 성대한 오찬

이날 관중석에 앉아 있던 이들조차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더위를 느껴야 했으니 선수들은 오죽했을까. 그나마 선수들 가족들 몇몇이 경기장을 찾았지만 이런 환경에서 순수 축구팬의 관람은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 없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자랑스러운 월드컵 첫 16강 진출이라며 열광하던 언론과 팬들도 정작 여자 축구의 근본인 WK리그의 환경 개선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사실 한국이 16강전에서 프랑스에 진 건 선수들의 실력이 부족하기 이전에 이미 축구 환경에서부터 프랑스에 완패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열악한 인조잔디에서 오후 4시에 경기를 하라고 해도 이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우리 여자 선수들이 월드컵 16강에 오른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래 놓고 한국 여자축구가 16강에서 프랑스에 완패했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하는 이들은 양심도 없는 거다. 선수들은 그저 열심히 뛴 죄밖에 없는데 그녀들은 이 죄로 인해 땡볕 아래 인조잔디에서 공을 차야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경기가 열리고 하루 뒤 정부는 여자 월드컵에서 16강에 오른 선수들을 불러 성대한 오찬을 열었다. 여자 월드컵에 나섰던 선수들은 물론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을 비롯한 협회 고위 인사도 대거 참석한 자리였다. 이 오찬 자리에서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여자축구에 대한 무한한 지지를 약속했다. “남자대표팀은 월드컵 16강까지 48년 걸렸는데 여자대표팀은 12년 걸렸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여자대표팀이 대단했다는 감탄으로 끝나지 않게 하고 반짝 관심이 아닌 일상의 관심과 응원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자대표팀뿐 아니라 WK리그, 그리고 꿈을 키워가는 어린 선수들이 건강하게 축구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겠습니다. 어제 재개된 WK리그 경기에 국민적 관심이 많이 높아졌다고 들었는데 저도 WK리그 팬이 되겠습니다. 시간을 내 멋진 경기를 관람하겠습니다.” 하지만 김종덕 장관도, 그리고 그 누구도 어제 열악한 인조잔디에서 평일 낮 경기를 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월드컵 16강에 대한 화기애애한 대화만이 이어졌다.

정부가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여자축구가 좋은 성적을 낼 때마다 생색을 내는 건 사실 이번 만의 문제도 아니다. 문화체육부는 한국 여자축구가 지난 2010년 U-17 여자월드컵 우승과 U-20 여자월드컵 3위라는 위업을 달성했을 당시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처럼 거창하게 말했었다. 당시 문화체육부는 총 49억 8천만 원을 지원해 초∙중∙고∙대학 여자축구팀을 2010년 당시 57개에서 2013년까지 102개로 늘리겠다고 파격적인 발표를 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초∙중∙고∙대학 여자축구팀 수는 69개에 불과하다. 더 이상 학원축구로는 여자축구의 인프라를 키울 수 없다고 현장의 전문가들이 입을 모았지만 정부는 그저 2010년 여자축구의 좋은 성적에 취해 선심성 공약을 내세웠다가 결국 아무 것도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김종덕 문화체육부 장관이 WK리그 팬이 돼 경기장을 찾고 꾸준히 관심을 갖겠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정작 중요한 건 이런 오찬 자리에서 김종덕 장관이 선수들에게 전통 문양의 우산을 선물하는 게 아니라 마음 놓고 경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선물하는 것 아니었을까.

문체부 장관님, 꼭 WK리그 팬이 돼 주세요

나는 이번 여자 월드컵 16강이 단순히 대표팀 선수 몇몇의 성과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음에도 늘 최선을 다하는 WK리그의 모든 선수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그렇다면 16강 진출의 유산도 WK리그에서 물려 받아야 한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WK리그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 같던 이들은 금방 여자축구를 잊었고 여론도 서서히 식어가고 있다. 문화체육부 장관은 “WK리그 팬이 되겠다”고 했지만 WK리그 선수들이 평일 대낮에 열악한 인조잔디에서 공을 차는 모습을 보면 아마도 기겁할 것이다. 나는 앞서 김종덕 장관의 말을 믿지 않겠다고 했지만 내가 틀렸기를 바란다. 김종덕 문화체육부 장관이 약속을 지켜 꼭 WK리그 경기장을 찾아줬으면 한다. 그리고 16강을 이룬 이 대단한 선수들이 평일 대낮에 땡볕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현실에 맞는 정책을 세워줬으면 한다. 2010년처럼 현실성도 없는 일에 수십억 원을 투자하겠다는 허무맹랑한 정책이 아니라 정말 선수들을 위한 정책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열악한 환경을 눈으로 봐야하기 때문이다. 김종덕 문화체육부 장관을 비롯해 정책을 세우는 많은 이들이 꼭 약속을 지켜 WK리그 팬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