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기훈 만큼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선수는 극히 드물다. 한쪽에서는 올 시즌 K리그 클래식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는 염기훈에게 ‘왼발의 마법사’이라는 별명을 하사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 아르헨티나전에서 결정적인 기회를 날린 그에게 아직도 ‘왼발의 맙소사’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왼발의 마법사’와 ‘왼발의 맙소사’는 엄청난 차이인데 한 선수가 이런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다는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염기훈이 날카로운 왼발과는 반대로 오른발로 플레이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껏 별로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왼발만을 고집하게 된 이유를 공개하려 한다. 염기훈은 축구에 대한 열정으로 지금의 왼발을 얻었기 때문이다.

오른발로 공 차던 염기훈을 덮친 심각한 사고

염기훈은 1983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다. 염기훈은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장 축구를 좋아했고 또 오른발로 가장 공을 잘 차는 소년이었다. 그의 앞집에 사는 대학교 축구선수 김기선도 그를 특별히 예뻐했다. 휴가를 나오면 어린 염기훈에게 따로 유니폼을 챙겨줄 정도였다. 염기훈은 동네 골목길에서 오른발로 자기보다 덩치가 훨씬 더 큰 형들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았다. 축구선수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거나 꿈을 키운 건 아니지만 1980~90년대 시골 마을이라면 늘 그렇듯 모든 아이들은 축구를 했고 염기훈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염기훈은 오른발로 공을 차며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겨울에도 거리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콧물을 흘리며 열심히 공을 찼다.

1989년이었다. 당시 일곱 살의 염기훈은 사촌 형과 모내기 구경을 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벼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어린 그에게는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사촌 형이 끄는 자전거에 올라탔다. 개구쟁이였던 염기훈은 맨발로 이리저리 뛰어 놀다가 신발도 신지 않고 자전거에 몸을 맡겼다. 그런데 잠시 후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오른발이 자전거 체인에 빨려 들어간 것이다. “아, 형. 나 발. 발. 발이 끼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촌 형은 자전거가 잘 나가지 않자 더 힘차게 페달을 밟았고 염기훈은 오른발을 끼인 채로 계속 질질 끌려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촌 형이 자전거를 멈추고 살펴보니 염기훈의 오른발은 만신창이가 돼 있었고 결국 곧바로 아버지가 모내기를 멈추고 염기훈을 업은 채 병원으로 달려갔다.

심각한 사고였다. 하지만 의사는 마취도 하지 않고 찢겨진 그의 발가락을 꿰맸다. 마취를 하면 자칫 신경이 손상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염기훈은 극심한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이건 어린 아이가 감당해 낼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수술을 끝까지 참아내고 회복에 들어갔고 오른발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생활해야 했다. 한참 뒤 붕대를 풀었지만 염기훈은 몸이 근질거렸다. 늘 함께 공을 차던 형들과 축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염기훈은 실밥을 풀자마자 곧바로 형들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아직 채 아물지도 않은 발로 공을 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동안 어린 염기훈에게 실력으로 밀리던 형들은 이때가 기회다 싶어 염기훈을 무시했다. “무슨 그런 발로 축구를 한다고 그래? 넌 이제 빠져. 우리끼리 할 거야.” 하지만 염기훈은 오기를 부렸다. “나 그래도 축구할 수 있거든.”

축구를 계속하려면 ‘왼발로’

염기훈이 다친 오른발이 아닌 왼발로 공을 차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어색했고 형들과의 대결에서도 밀렸지만 점점 왼발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오른발은 아직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지만 염기훈은 어린 나이에도 죽어라 왼발을 연습했고 그 결과 멀쩡한 두 다리의 형들을 이기기 시작했다. 이후 오른발의 상처가 다 아문 다음에도 그는 왼발을 고집했다. 오히려 왼발이 더 편해진 것이었다. 여전히 글씨를 쓰거나 밥을 먹을 때는 오른손을 사용하는데 공을 차는 것만 왼발로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렇게 ‘후천적 왼발잡이’가 됐다. 염기훈은 초등학교 내내 학교에 축구부가 없어 이렇게 동네에서 형들과 왼발로 축구를 했고 이후 중학교 2학년이 돼서야 본격적으로 축구부에 가입할 수 있었다. 늦게 축구를 시작한 터라 매일 밤 12시까지 혼자 패스와 킥 훈련을 했다. 그의 아버지도 늦은 시간 고생하는 아들을 위해 공터로 나와 공을 던져주며 도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른발은 전혀 쓸 수가 없게 된 상황이었다. 이미 왼발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고 오른발의 감각도 많이 무뎌져 있었다. 지금도 그의 오른발 엄지 발톱은 1/3만 자라있을 만큼 정상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염기훈이 아예 오른발로 공을 차는 걸 포기한 건 아니었다. 호남대학교 시절까지도 그는 왼발 못지 않게 오른발을 연습했다. 밤 늦도록 오른발로 패스를 하고 슈팅하는 걸 반복했다. 하지만 그는 경기에 나서면 자꾸 불편한 오른발대신 왼발을 썼고 그때 결심하게 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의 왼발을 믿자.’ 오히려 왼발 하나만을 더 고집스럽게 갈고 닦기로 마음 먹은 것이었다. 이후 염기훈은 탁월한 왼발을 앞세워 대학 무대를 평정했고 K리그에서도 가장 빛나는 별이 됐다. 선수로서는 최고의 영광이라는 국가대표 팀에도 발탁됐고 월드컵 무대에도 섰다. 비록 아르헨티나와의 2010 남아공월드컵 경기에서 완벽한 기회를 날리며 지탄을 받았지만 그는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다시 그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왼발을 쓸 것이다.”

‘왼발에 맙소사’라며 그에 대한 조롱과 비아냥이 5년 넘게 이어지고 있지만 그는 이런 이들의 조롱에 실력으로 맞섰다. 올 시즌 K리그는 염기훈을 위한 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한참 멀어진 것 같았던 대표팀에 다시 돌아왔다. 편견 없이 선수들을 관찰하고 기회를 주는 울리 슈틸리케 감독의 낙점을 받은 것이었다. 이때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쟤는 어차피 K리그용이야.” 하지만 염기훈은 오랜 만에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치른 지난 UAE와의 평가전에서 기가 막힌 골을 뽑아냈다. 프리킥 상황에서 왼발로 상대 골문을 가른 것이었다. 이 골은 대표팀에서 실로 오랜 만에 터진 세트피스 득점이었고 단순히 골뿐 아니라 그는 전반 45분 내내 최고의 활약을 선보이며 논란을 불식시켰다. 오늘도 누군가는 그를 ‘왼발의 맙소사’라고 부를지 모른다. 하지만 염기훈은 이런 조롱에 대해 실력으로 반박하고 있다. 부상과 군사훈련 등으로 주축 선수들이 대거 빠진 한국이 오늘(16일) 미얀마를 상대로 2018 러시아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한 장도에 오르는데 이 상황에서 한국은 염기훈의 왼발에 큰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왼발의 마법사’이건 ‘왼발의 맙소사’이건 오늘도 그의 왼발에서부터 한국의 공격은 시작되거나 마무리될 것이다.

염기훈의 왼발을 응원한다

염기훈은 좌절을 딛고 일어난 선수다. 오른발을 쓸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그는 축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왼발을 써야 했다. 갑자기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글씨를 잘 쓸 수는 없다.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염기훈도 마찬가지다. 그가 이런 왼발을 갖게 될 때까지의 노력을 우리가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또한 아픈 오른발 대신 부정확한 왼발로라도 공을 차고 싶었던 염기훈의 축구에 대한 열정에도 박수를 보내는 건 어떨까. 이런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염기훈이 있을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어린 시절 오른발을 다치지 않았다면 훗날 월드컵 무대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제대로 된 오른발 슈팅을 날릴 수 있었을까. 가정이긴 하지만 나는 염기훈이 완전한 오른발로 축구를 했더라면 지금의 자리에 서지도, 월드컵에 나가지도 못했을 것 같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부정확한 왼발을 부단히 갈고 닦았기에 오늘날의 ‘왼발의 마법사’ 염기훈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또 한 번 염기훈이 왼발로 멋진 플레이를 펼쳐주길 응원하려 한다. 그의 별명이 뭐건 나는 좌절을 딛고 일어선 그의 편이다. 왼발의 마법사? 왼발의 맙소사? 그런 건 아몰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