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 우리가 흔히 만수르라고 부르는 중동 거부가 얼마 전 K리그에 투자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약 34조의 재산을 가진 만수르가 K리그에 투자할 것이라는 소식에 축구팬들은 너도 나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만수르가 K리그에 투자하면 세계적인 스타들이 줄줄이 K리그행을 선택하는 등 즐거운 일만 가득할 것 같았다. 하지만 며칠 뒤 이는 사실 무근으로 밝혀졌다. 한 기업이 한 차례 광고 제안을 받았을 뿐 다른 논의는 없었다며 소문을 일축한 것이었다. 이 소식에 많은 축구팬들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만수르가 운영하는 K리그 구단 경기장에 가 기자들에게 제공된 랍스터와 달팽이 요리를 먹으며 취재를 하고 싶었던 나의 바람도 결국에는 물거품이 됐다. 그냥 구단에서 지금 제공하는 한솥 도시락이나 맛있게 먹으련다.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꿈같은 이야기에 대한 여운이 가시길 않는 모양이다. 여전히 여러 축구 커뮤니티에서는 만수르의 K리그 투자에 관한 글이 넘쳐난다. 만수르 같은 인물이 막대한 돈을 투자해 K리그에 흥행 바람을 일으키는 건 나쁘지 않은 현상이다. 한 구단만 살아나는 게 아니라 그 파급 효과로 인해 K리그 전체가 흥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루머로 밝혀졌다니 아쉽긴 하다. 우리는 늘 이렇게 하늘에서 돈이 뚝하고 떨어져 한국 축구에 로또가 터지길 기원한다. 만수르가 K리그에 투자해 세계적인 선수들이 우리 바로 앞에서 공을 차는 모습도 보고 싶고 최첨단 시설에서 축구를 즐기고도 싶다. 하지만 그러면서 지금껏 한국 축구에는 이미 여러 명의 만수르가 있었다는 사실은 잊고 있다. 그저 다가올 행운만을 바라며 과거는 잊고 산다. 한국 축구를 이만큼 끌고 온 여러 명의 만수르가 우리에게도 있는데 말이다.

한국 축구 토대 된 전용구장 건립과 유소년 팀 창단

故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바로 ‘원조 만수르’였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 나선 대표팀이 무패 행진을 내달리며 가볍게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을 거머쥐기 직전 故박태준 회장은 한 외신 보도를 접했다. ‘전용구장 하나 없는 축구 불모지인 한국에서 월드컵 2회 연속 본선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비아냥 섞인 보도였다. 당시 우리는 전용구장은커녕 제대로 된 잔디구장 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화가 난 故박태준 회장은 곧바로 관계자를 불러 당장 축구전용구장을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국내에 축구전용구장을 지을 만한 기술도 없던 시절 해외 유명 축구전용구장을 돌며 발품을 팔아 기술을 얻어왔다. 이미 포항에 종합운동장에 있던 터라 국정감사장에 나가 이 문제로 국회의원들의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故박태준 회장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10억 원을 투자해 국내 최초의 축구전용구장인 포항스틸야드를 건설했다. 트랙이 있더라도 잔디 구장이면 감지덕지하던 시절에 故박태준 회장이 내린 축복이었다.

1995년 국제축구연맹(FIFA) 실사단이 2002 월드컵 유치를 선언한 한국 축구 인프라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당시 대한축구협회는 고민하지 않고 이 실사단을 바로 포항으로 안내했다. 한국이 보여줄 축구 인프라는 이 축구전용구장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지방 도시에 우뚝 선 축구전용구장을 본 실사단은 “원더풀”이라면서 연신 감탄했다. 지금은 지역마다 월드컵 경기장과 축구전용구장이 곳곳에 들어서 있지만 당시 포항스틸야드가 아니었더라면 월드컵 유치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지금의 멋진 인프라도 구축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포항제철 축구단과 포항스틸야드를 만들어낸 故박태준 회장은 이후 전남드래곤즈와 광양전용구장까지 탄생시켰다. 한국 축구에 아무 것도 없던 시절 최고의 프로 구단과 그에 어울리는 멋진 전용구장을 만들어낸 故박태준 회장의 업적은 만수르의 투자 그 이상이다. 故박태준 회장은 시간이 날 때마다 경기장을 직접 찾아 그라운드의 잡초를 뽑았다. 그는 한국 축구의 ‘원조 만수르’였다.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도 기업 운영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은 인물이지만 한국 축구를 위해 그가 한 일 만큼은 조명이 필요하다. 김우중 회장은 1983년 프로팀 대우로얄즈를 창단한 뒤 훌륭한 유소년 선수를 발굴해야 프로팀도 강해진다는 뜻에 따라 거제초등학교와 거제중학교, 거제고등학교, 아주대학교에 연이어 축구부를 개설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프로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시스템이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축구협회장까지 역임하면서 한국 축구 전체를 통솔했다. 그렇게 매년 축구협회 기부금이 30억 원, 로얄즈 운영비 60억 원, 아주대 30억 원, 초·중·고 20억 원 등 축구와 관련해서 200억 원씩을 썼다. 다소 강압적이기는 했지만 계열사에 공문을 보내 일괄적으로 기부금까지 받아냈다. 그룹 총수로서는 부적절한 처사이기도 했지만 당시 한해 200억 원의 어마어마한 돈이 한국 축구의 뿌리를 만드는데 쓰였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김우중 회장은 대우그룹 총수 시절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계열사 간 축구대회에 매번 선수로 뛸 정도로 축구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외국인 감독을 처음 영입한 것도 김우중 회장이었다. 국내에 외국인 감독이 생소하던 1990년 독일 출신 프랑크 엥겔 감독을 시작으로 1991년에는 헝가리 출신 비츠케이 감독을 영입했고 1996년에는 유고의 세큘라리치 감독을 댕로 데려왔다. 한국 축구의 세계화를 위한 포석이었다. 특히 비츠케이 감독은 1991년 21경기 연속 무패라는 위업을 달성하며 리그 우승을 차지, 한국 프로축구를 한 단계 도약시킨 인물로 평가받았다. 지금도 200억 원이 엄청난 돈이지만 1990년대 한국 축구를 위해 매년 200억 원씩을 투자했다는 건 체감도 쉽지 않은 엄청난 일이었다. 이전까지 영세했던 대한축구협회가 김우중 회장 취임 이후 지금의 모습에 뼈대를 갖췄다는 점도 업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대우로얄즈가 현대산업개발로 인수될 때도 다 팔아도 끝까지 축구단만은 안 된다고 버텼던 게 바로 김우중 회장이다. 당시 대우로얄즈 매각에 대해 함께 반대하며 김우중 회장을 지지한 인물이 바로 故박태준 회장이었다. 김우중 회장 역시 故박태준 회장과 함께 한국 축구의 만수르와 같은 존재였다. 아니 애정 만큼은 그 이상이었다.

2002 월드컵 유치와 최강팀 일화, 그리고 피스컵

정몽준 회장 또한 마찬가지다. 정몽준 회장은 한국 축구를 위해 아낌없이 썼다. 특히 한국 축구의 가장 큰 선물인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는 정몽준 회장의 작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겸 현대중공업그룹 회장은 현대를 앞세워 적극적인 유치전에 나섰다. 월드컵 개최지 결정 투표권이 있는 21명의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 소재지 중 현대종합상사 지사가 없던 스코틀랜드와 이탈리아, 독일, 아르헨티나 등에는 이들을 공략하기 위해 현대종합상사 해외 지사를 따로 설치하기도 했다. FIFA 집행위원 소재국에 주재하는 상사원들에게 집행위원 전담맨을 지정해 그들의 취미생활은 물론 가족사까지 파악해 이 정보를 대한축구협회에 직접 전달했고 이 정보는 집행위원의 마음을 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정몽준 회장은 1년 동안 지구를 무려 12바퀴나 돌았다. 1995년 월드컵 유치붐 조성을 위해 브라질을 국내로 초정했을 당시 초청비용은 약 1백 20만 달러였는데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초청 비용은 원래 30만 달러 안팎이었지만 협회는 브라질을 유치 경쟁 라이벌인 일본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급했다. 이 돈도 물론 정몽준 회장 주머니에서 나왔다.

만약 당시 현대와 정몽준 회장의 활약이 없어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리지 못했다면 지금도 우리는 이런 최신식 축구전용경기장에서 축구를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월드컵 유치 후 4강이라는 신화는 물론 이후 월드컵 수익금을 통해 전국의 유소년들을 육성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월드컵 효과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몽준 회장이 없었더라면 한국 축구는 지금도 누런 잔디가 깔린 종합 운동장에서 경기를 치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뿐 아니다. 정몽준 회장이 1995년 대한축구협회에 낸 사비는 무려 43억 7천만 원이었는데 이는 당시 협회 결산액 57억 원 중 무려 76.6%에 이르는 금액이었다. 당시 대한체육회 가맹 39개 경기 단체 회장 출연금 중 정몽준 회장에 이어 2위로 많은 돈을 낸 레슬링협회 이건희 회장의 출연금이 12억 7천만 원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실로 엄청난 금액이다. 정몽준 회장은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에 성공한 뒤 비좁은 협회 사무실에서는 이 큰 대회를 준비할 수 없다고 밝히며 축구회관 건립 비용 170억 원 중 자비로 65억 원을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 축구회관 건립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냐면 당시 협회 예산이 54억 원이었던 걸 감안했을 때 무려 1년 예산의 세 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돈이 여기에 들어가는 셈이었다.

정몽준 회장이 대주주인 현대중공업 산하에는 프로팀 울산현대와 실업팀 울산현대미포조선이 있다. 이 두 팀이 매년 최대 300억 원 정도를 쓴다. 이게 다가 아니다. 현대학원 산하에 현대중, 현대고, 울산대(이상 남자), 현대청운중, 현대정보과학고, 울산과학대(이상 여자)가 있고 여기에 또 울산 지역의 초등학교(7개), 중학교(3개), 고등학교(1개)에 운영비를 보조한다. 4월부터 11월까지 중고교 주말리그, 10월에는 울산현대단장기 초등학교 축구대회, 11월에는 조기축구대회인 처용컵과 어머니 축구대회까지 연다. 그렇게 정몽준 회장이 1년에 축구를 위해 쓰는 돈만 500억 원이 넘는다. 또한 K리그가 메인 스폰서를 구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손을 내민 것도 바로 정몽준 회장의 입김이 강력한 현대오일뱅크였다. 현대오일뱅크는 2011년부터 K리그 메인 스폰서를 자처했고 이후 K리그 챌린지 또한 메인 스폰서로 후원하고 있다. 정몽준 회장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한국 축구와 K리그에 실로 막대한 투자를 이어가는 중이다. 만수르 이전에 이렇게 축구를 위해 주판알 튕기지 않으며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이가 바로 정몽준 회장이었다. 정몽중 회장은 이미 20여년 전부터 한국 축구에서는 만수르였다.

종교적인 논란이 있을 수도 있지만 통일교 창시자 故문선명 총재의 막대한 투자도 빼놓을 수는 없다. 그가 창단한 일화천마는 한국 프로축구사에서 가장 강력한 팀으로 지금도 평가받는다. 물론 故문선명 총재의 어마어마한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익을 따졌다면 절대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낸 것이다. 故문선명 총재는 일화축구단에 지금까지 3,000억 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 6번의 K리그 우승과 세 차례의 FA컵 우승, 그리고 AFC 챔피언스리그(전신 대회까지 포함)도 1995년과 2010년 두 차례 정상에 섰다. 2000년에는 우승을 위해 샤샤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몸값과 상관없이 그를 무조건 데려오라고 지시해 열흘 만에 샤샤에게 성남 유니폼을 입히기도 했다. 당시 샤샤는 계약기간 3년, 계약금 130만 달러, 연봉 30만 달러에 이르는 당시로서는 역대 외국인 선수 중 최고의 대우였다. 만수르가 우승을 위해 투자한 것처럼 문선명 총재도 우승을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다. 레알마드리드와 유벤투스, 토트넘 등을 초청해 무려 다섯 차례나 피스컵을 개최한 것도 故문선명 총재의 의지였다. 한 번 피스컵이 열릴 때마다 드는 돈만 무려 200억 원에서 300억 원에 이르렀다.

여러 명의 만수르가 한국 축구에는 이미 있었다

앞서 말한 네 명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다. 논란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한국 축구를 위해 투자한 돈 만큼은 한국 축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아무 것도 없는 한국 축구에 전용구장을 짓고 유소년 팀을 창단하고 월드컵을 유치하고 최강의 팀을 만든 건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한국 축구가 많은 축구 원로들에 의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지만 그 중 이 네 명의 막대한 투자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트랙이 있는 종합운동장의 누런 잔디에서 공을 차는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유소년 축구도 빈약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입장이 다른 이들에게 앞서 언급한 네 명을 찬양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한 번쯤은 한국 축구를 위해 상상할 수 없는 돈을 쏟아 부은 이런 큰 손들이 있었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 이들 역시 만수르처럼 투자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축구가 좋아 주위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어마어마한 돈을 축구에 쏟아 부은 인물들이다. 이 네 명이 한국 축구에 쏟아 부은 돈만 하더라도 수 조 원이고 돈을 뛰어 넘는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는 지금 하늘에서 뚝 떨어질 만수르를 기대하고 있다. 그의 투자 소식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에 아쉬워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언제든 또 다시 만수르가 한국 축구에 투자하길 바란다. 나 역시 만수르가 한국 축구에 투자한다면 참 좋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정말 만수르가 한국 축구에 투자하는 꿈만 같은 날이 온다면 그건 한국 축구 발전에 뜻이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또 다른 시장의 장난감을 사기 위한 선택일 것이고 언제든 그 장난감이 지겨워지면 만수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사람이다. 그러면 한국 축구는 제자리로, 아니 그보다 더 뒤로 후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한국의 만수르’들은 진짜 한국 축구의 발전을 생각한 이들이다. 언제까지 만수르의 투자 여부에 목을 맬 텐가. 이미 한국 축구에는 여러 명의 만수르가 있었는데 말이다. 이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질 로또 같은 만수르 타령은 잊고 지금껏 ‘우리의 만수르’들이 일궈낸 결과물을 잘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닐까. 만수르에게는 많은 걸 바라지는 않는다. 나 오늘 치킨 사 먹게 2만 원만 줬으면 그걸로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