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트레이닝센터(파주NFC)는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곳이 됐다. 대표팀 선수 소집일이면 파주NFC에서 찍힌 선수들의 사진이 포털 사이트에 도배된다. 선수들이 파주NFC에 모여 훈련하는 장면도 뉴스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이 파주NFC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우리의 것이 됐는지는 그리 관심이 없다. 오늘은 2002년 한일월드컵부터 얼마 전 끝난 2015 아시안컵까지 우리 대표팀 선수들의 땀방울이 스며들어 있는 이 파주NFC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한다. 우리가 당연한 것처럼 가진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는 것도 한 번쯤을 필요할 것 같다. 지금부터 파주NFC의 탄생 과정을 칼럼으로 전달하려 한다.

여관과 호텔을 전전하던 과거의 대표팀

1970년대까지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은 여관에서 생활해야 했다. 양지여관과 지성여관 등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훈련했지만 시설은 열악했다. 한옥으로 된 이런 여관들은 방음시설이 전혀 돼 있지 않아 휴식을 취하기에 상당한 불편이 있었다. 공용 화장실을 사용했고 여관 주인이 직접 조리한 음식을 먹거나 주변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이때는 이런 생활이 당연하다고 느꼈다. 한 축구 원로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남녀가 우리 숙소 옆방에 묵는 날이면 다들 벽에 귀를 대고 집중했었지. 그런 날은 잠은 다 잔 거야. 혈기왕성한 총각들이니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마나 민감하겠어. 그러니 뭐 자기 관리가 제대로 될 수나 있었겠어? 허허.” 대표팀은 1970년대까지 여관 생활을 전전하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합숙 때 호텔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대표팀이 주로 이용하던 곳은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쉐라톤워커힐 호텔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먹고 자는 일만 가능했다. 훈련을 위해 육사구장이나 태릉선수촌까지 이동해야 했다. 또한 특1급인 쉐라톤워커힐 호텔은 A매치가 열리는 날이면 상대팀 선수들까지 묵어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한 호텔에서 양 팀 선수들이 경기 전 마주치는 모습도 자주 일어났다. 여기에 선경그룹이 운영하는 이 호텔만을 이용해 협회가 특정 기업에 특혜를 주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일었다. 1990년대 들어 대한축구협회는 쉐라톤워커힐 호텔 대신 서울 중구 남산 자락에 자리 잡은 타워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하지만 쉐라톤워커힐 호텔 시절과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육사구장과 태릉선수촌, 잠실종합운동장 등을 오가며 훈련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매일 훈련을 위해 장비를 챙겨 들고 버스를 탄 채 이동해야 했다. 여기에 태릉선수촌은 하키 등 다른 종목 선수들과도 함께 써야해 훈련 일정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런 불편한 상황이 계속되자 협회는 1993년 말 문화체육부에 건의했다. 대표팀 전용 숙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달 뒤 문화체육부가 내놓은 제안은 영 신통치 않았다. “제주도에 국가대표 축구팀 선수 숙소를 신축하는 걸 추진해 봅시다.” 한라산 지역에 부지를 확보해 1년 안에 완공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었지만 협회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문화체육부에서 인조잔디 구장은커녕 모래밭에서 훈련을 하고 한라산 등반으로 체력 훈련을 대신하자는 계획을 내놨기 때문이다. 또한 대표팀이 주로 겨울철 훈련에 이 시설을 이용하고 여름철에는 이 시설을 청소년 수련장으로 개방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훈련에 전념하기에는 시설도 부족했고 전용 훈련장으로 쓰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결국 협회는 제주도가 아닌 다른 훈련장 부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국가대표 전용 훈련장 건설은 협회의 숙원 사업이 됐다.

그들이 미사리 훈련장을 얻기까지

이 와중에도 대표팀은 A매치 직전 타워호텔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서울 각지의 훈련장을 떠도는 신세였다. 울산 강동구장과 서부구장 등을 이용하기 위해 아예 서울이 아닌 울산에 숙소를 꾸리는 일도 잦았다. 그러자 협회는 1994년 미국월드컵이 끝난 뒤 울산시 동부와 주전동 일대 5만여 평에 국가대표 전용 훈련장 및 합숙 시설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사계절 훈련이 가능한 기후조건과 주변 환경을 고려해 울산이 가장 적합한 장소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잔디구장 2면과 부대시설 등을 갖추기로 하고 부지 매입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또 다시 협회의 계획은 난관에 부딪혔다. 문화체육부에서는 협회의 이같은 계획에 협조할 뜻을 비쳤지만 이번에는 건설부에서 발목을 잡았다. 이 지역이 개발제한구역, 흔히 말하는 그린벨트였기 때문이다. 협회는 이 지역외에 마땅한 후보지가 없고 산림 훼손과 상수원 오염의 우려 또한 없을 것이라는 보완 자료를 내면서 현지 주민들의 동의서까지 첨부해 건설부의 최종 승인을 기다렸지만 결국 건설부는 승인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린벨트 지역에 이런 시설을 허용할 경우 형평성에서 어긋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타워호텔 생활은 훈련장과의 거리가 멀어 불편함 점 외에도 단점이 많았다. 1990년대 당시 대표팀 하루 운영비만 해도 300만 원씩 들었는데 이중 호텔 뷔페를 이용한 선수당 하루 식사 비용만 4만 5천 원이었고 호텔 숙박비는 할인된 가격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2인 1실에 6만 2천 원을 넘겼다. 선수들 세탁비도 1인당 하루에 1만 원씩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실과 태릉, 육사구장, 동대문운동장 등 시내에 위치한 훈련장을 이용하려면 시내 호텔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수밖에 없어 협회로서는 타워호텔 생활을 청산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2인 1실을 쓰는 성인 대표팀 선수들은 나은 편이었다. 청소년 대표팀 선수들은 4~5명이 온돌방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1997년 당시 차범근 대표팀 감독은 “호텔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타워호텔을 나와 태릉선수촌에서 생활해 예산을 무려 1천5백만 원이나 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잔디구장을 쓰는 태릉선수촌의 다른 종목 선수들이 자리를 비웠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고심을 거듭한 협회는 결국 숙식 해결이 가능한 클럽하우스 개념이 아니라도 국가대표 선수들이 마음 놓고 훈련이라도 할 수 있는 전용 훈련장 확보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웠던 제주도 훈련장 건설 제안과 울산의 전용 트레이닝센터 건립 좌절을 겪은 협회는 서울 인근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98년 10월 탄생한 게 바로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 전용훈련장이었다. 33억 원을 들여 잔디구장 2면을 갖추고 라커룸과 샤워실, 간이 스탠드 등을 설치하며 훈련을 위해 떠돌아다니는 신세를 청산하게 된 것이다. 이 훈련장은 성인 대표팀뿐 아니라 올림픽 대표팀과 청소년 대표팀 등 연령대별 대표팀도 함께 쓸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여전히 선수들은 타워호텔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미사리 전용 훈련장 건설로 그나마 여러 곳을 전전하며 공을 차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위안이었지만 서울 중구에서 경기 하남시까지 매일 버스를 타고 오가는 생활은 그대로였다. 간단한 라커룸과 샤워실 등을 갖췄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도 감지덕지였다.

부지 선정, 하지만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하다

하지만 협회는 여기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은 다가오는데 숙식과 훈련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트레이닝 센터 하나 없이 월드컵의 선전을 기원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월드컵 개최로 참가국들에 훈련장을 내줘야 하는 상황에서 미사리 훈련장 역시 대표팀이 독단적으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프랑스 ‘클레르퐁텐’과 일본 ‘J빌리지’를 보며 우리도 이런 시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은 것도 이때쯤이다. 대표선수들이 먹고 자는 건 물론 바로 숙소 앞 잔디 훈련장에서 훈련을 하고 곧바로 숙소로 들어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집약된 공간을 원했다. 협회는 2000년 국가대표 전용 훈련장 부지 선정을 위해 경기도 고양시를 살폈다. 서울월드컵경기장과 가까우면서도 한적한 곳에 훈련장을 건설해 훈련은 물론 이동도 간편하게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경기도 고양시였기 때문이다. 월드컵 본선까지 남은 시간은 2년 뿐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협회의 고양시 부지 선정은 난항이 이어졌다. 협회와 고양시의 의견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파주시가 유치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고 결국 입지 선정 평가위원 20명 중 19명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파주시가 최종적으로 낙점을 받았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지하수도 풍부해 사계절 잔디에 언제든지 풍부한 물을 공급할 수 있고 이곳의 기류 흐름이 매우 원활해 잔디가 말라죽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파주시가 부지로 내놓았던 곳이 애초 통일동산 조성 계획에 의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만남의 광장으로 사용될 땅이었기 때문이다. 1991년 정부가 약 3천억 원을 들여 한국토지공사 파주사업단을 꾸리고 야심차게 준비한 사업 안에 이 부지가 포함돼 있던 것이다. 이는 168만평에 조성하는 대규모 통일 관련 사업이었다. 이산가족 만남의 광장을 만들고 망향촌과 민속촌 등을 건설해 통일을 염원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만들겠다는 게 정부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1996년 들어 정부가 지원을 끊고 IMF까지 겹쳐 이 사업은 흐지부지됐다. 토지를 매각하려 했지만 절반만 팔리는데 그쳤고 개발 사업은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당시 1천억 원이 넘는 적자를 내 “수도권 사업 중 유일한 실패작”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하지만 협회와 파주시가 대표팀 전용 훈련장 건설을 위해 합의한 부지는 파주시를 제외하고도 토지개방공사와 통일부가 소유권을 갖고 있는 곳이었다. 파주시가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토지개발공사와 통일부가 반대하면 전용 훈련장 건설을 추진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협회는 솔깃한 제안을 내놨다. “이산가족 상봉시 잔디구장을 모두 내주겠습니다.” 협회의 설득에 결국 토지개발공사와 통일부도 전용 훈련장 건설을 승인했다. 강만 건너면 북한이라 향후 남북 축구 교류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 또한 토지개발공사와 통일부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인이 됐다. 협회가 31억 원을 댔고 정부와 국민체육진흥공단으로부터도 각각 30억과 35억 원씩을 지원 받았다. 나머지 33억 원은 2002년 월드컵조직위원회에서 지원했다. 그렇게 130억 원의 거금을 들여 공사에 착수할 수 있게 됐다. 2000년 12월 극적으로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통일동산내 2만 7000평 부지에서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월드컵 개막은 1년 반밖에 남지 않았고 대표 선수들이 사용하려면 개막 훨씬 이전에 완공해야 하는 빠듯한 공사의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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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NFC는 최신식 시설로 선수들이 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사진=파주시 공식 홈페이지)

파주NFC는 한국 축구에 축복이다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일반 훈련장 공사의 절반밖에 시간이 없었다. 공사 담당자들은 아예 집을 떠나 근처에 자취방을 마련해 놓고 매일 밤 12시까지 작업을 진행했다. 식사는 모두 현장에 있는 식당에서 해결했고 한 여름에는 소금까지 먹어가며 작업을 강행했다. 보통 2년 넘게 걸려야 정상이지만 이 대표팀 전용 훈련장은 놀랍게도 11개월 만에 완공됐다. 2001년 11월 프랑스 ‘클레르퐁텐’과 일본 ‘J빌리지’를 능가하는 세계적인 축구 트레이닝 센터를 우리도 갖게 된 것이다. 지하 1층과 지상 4층의 본관 건물에 동시에 161명이 투숙할 수 있는 객실을 갖췄고 잔디구장 7개면까지 보유한 이 곳을 우리는 파주트레이닝센터, 파주NFC라고 부른다. 파주NFC에는 인공폭포, 미니정원, 원두막 등 쉼터도 들어섰고 7개면의 잔디구장 이름은 청룡, 백호, 화랑, 충무, 새싹, 청운, 통일로 정했다. 잔디구장을 만들고 웨이트 트레이닝장과 물리 치료실, 사우나, 라커룸 등 뿐 아니라 대규모 회의실도 마련해 대형 스크린을 보면서 경기를 분석할 수 있는 공간까지 확보했다. 죽어있는 땅이나 다름 없던 이 곳은 2001년 11월 한국 축구의 요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됐고 곧바로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이 입소해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파주NFC는 단순히 성인 대표팀만을 위한 곳이 아니다. 각급 연령별 대표팀도 함께 쓰면서 경기력 향상에 힘을 쓰는 소중한 공간이다. 여기에 지도자와 심판 교육 및 각종 축구 발전을 위한 세미나도 이곳에서 개최되고 각종 국내 축구대회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 축구의 행정이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이뤄진다면 실질적으로 고민하고 연구하는 모든 건 파주NFC에서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대표팀 훈련에 지장이 없는 날이면 훈련장을 일반인에게도 개방한다. 요즘도 파주NFC에서는 일반인이 공을 차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전국에 최고급 시설을 자랑하는 축구전용구장이 들어선 것도 인상적이지만 파주NFC 또한 2002년 한일월드컵의 위대한 유산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여관을 떠돌고 불과 15년 전만 하더라도 호텔에서 생활하며 전국 각지의 훈련장을 찾아 헤매던 시대를 지나 이제 한국 축구는 파주NFC와 함께 날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모든 축구인이 염원하던 파주NFC는 한국 축구에 엄청난 축복이다. 또한 언젠가는 이곳에서 원래의 계획처럼 이산가족이 만나는 꿈만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길 바란다. 그때는 협회가 아낌 없이 잔디구장을 내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