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건국대에서 촉망받는 선수였던 어용국은 여러 프로팀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아버지의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프로에 진출하면 돈을 벌 수는 있겠지만 이 돈으로 아버지 병원비를 다 충당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당시 실업팀에서 꽤 잘 나가던 한국전력으로부터도 영입 제안이 왔다. 남들 같으면 프로팀 입단 제의가 온 와중에 실업팀의 러브콜은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어용국은 한참 고민했다. 한전 직원이던 작은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한전 재단 소속 병원이 병원비도 덜 들고 수준도 높아. 네가 한전에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 어용국은 프로의 꿈을 포기한 채 가족을 위해 결국 한전을 택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용국이 한전 입단 절차를 밟는 동안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족을 위해 프로행을 포기한 두 남자

당시 실업 축구는 프로 축구에 비해 전혀 실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꿈을 위해서는 프로로 진출하는 게 나았지만 안정적인 직장으로 실업팀을 선택하는 선수들이 꽤 있었다. 현역에서 물러나면 해당 실업팀 정직원으로 부서에 발령받아 근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전으로 간 어용국은 그렇게 실업팀에 서서히 적응해 나갔다. 어용국이 1986년 한전에 입단할 당시 유현철 감독과 송광석 코치, 그리고 배종우 주무가 팀을 맡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10년 넘게 한전에 몸담은 이들이었다. “모든 선수는 꿈이 프로팀에 가서 국가대표까지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어서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게 내 길이라고 생각하니 미련 없이 선수로서의 성공에 대해서는 포기했죠. 한전에서 축구를 하다 은퇴하면 직장 생활을 하는 게 가족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어용국은 책임감을 가지고 한전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 나갔다.

4년 뒤 한 선수가 비슷한 이유로 한전이라는 팀에 들어왔다. 바로 서보원이었다. 대학교에서 이름깨나 날리던 그 역시 부모님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프로팀에서도 입단 제의가 왔지만 부모님께서는 안정적인 직장을 원했다. “서른이면 다들 현역에서 은퇴를 하던 때인데 부모님은 그 이후를 걱정하셨어요. 길어봐야 10년도 못 하는 선수 생활인데 부모님께서는 한전에서 근무하는 걸 원하셨죠.” 결국 서보원은 여러 프로팀의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 한전을 택했다. 그가 한전에 입단했을 당시 어용국이 말했다. “그래. 반갑다. 우리 여기에서 한 번 잘 해보자.” 당시 어용국은 입단 4년차로 어느덧 팀내에서 중고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이 둘의 인연이 앞으로 길고 깊게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이들은 없었다. 이들에게는 프로 무대에 대한 도전보다는 안정적인 생활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이 둘의 인연은 시작됐다.

한전에서 지도자 생활 시작한 이들

1990년대 초반 실업 축구는 호황기를 누렸다. 철도청과 국민은행, 삼익악기, 기업은행, 주택은행 등이 좋은 선수를 수급하면서 쟁쟁한 실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이중에서도 한전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1992년 가을철실업축구연맹전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했고 1993년 대통령배 축구에서도 준우승을 거두며 실업 축구의 강자로 올라섰다. 그리고 마침내 1993년 가을철실업축구연맹전 결승전에서 할렐루야를 맞아 3-1 승리를 따낸 한전은 무려 26면 만에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감격을 맞봤다. 서보원은 이날 경기에서 1도움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을 펼쳤고 이후 대전시티즌 감독까지 역임한 김인완도 한전의 공격수로 나서 1도움을 기록했다. 이 대회에서 유현철 감독과 송광석 코치는 나란히 지도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전은 이어 벌어진 군·실업축구대회에서도 상무를 2-1로 제압하고 시즌 2관왕의 영광을 누렸다. 어용국과 서보원은 어느덧 실업 최강 한전의 주축 선수로 우뚝 서 있었다.

이때쯤 서보원은 프로팀의 입단 제의를 또 다시 받기 시작했다. 한전에서 함께 생활하던 김인완이 프로축구 전남드래곤즈에 입단하는 등 동료들의 프로행에 자극 받은 서보원도 귀가 솔깃해졌다. 국내 프로축구는 물론 J2리그에서도 서보원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프로 무대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났었죠. 함께 뛰던 동료들이 프로에 진출하는 모습을 보니 저도 몸이 근질근질했어요.” 서보원은 무려 2년 동안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한전에 남기로 결심했다. 화려한 프로 무대에서 뛰고 싶었지만 안정된 한전 정직원 신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전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기에는 가족들이 너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너무 현실에 안주하는 것 아니냐고 할 분도 계시겠지만 저에게는 가족들을 위한 안정된 일자리가 필요했어요.” 어용국도 같은 이유로 결국 팀에 남았다. 이 즈음 한전은 유현철 감독이 물러나고 송광석 코치가 새롭게 감독으로 부임했다. 1975년 한전에 입단한 뒤 이 팀에서 주무를 지낸 배종우 주무가 코치로 승격했다.

한전의 지도자 계보는 쭉 이어졌다. 송광석 감독이 물러나고 배종우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한 1999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코치 자리가 공석이 되자 어용국이 현역 일선에서 물러나 주정 완장을 반납하고 한전의 플레잉코치가 됐다. 그리고 서보원이 새롭게 한전의 주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2002년 서보원도 결국 서른네 살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어용국 플레잉코치가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서보원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89년 프로의 꿈을 포기한 채 처음 만난 이들은 이렇게 13년 뒤 같은 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함께 하게 됐다. 엇비슷한 상황에서 아쉽게도 함께 꿈을 포기해야 했던 이 둘은 코치가 된 뒤에도 꼭 붙어 다녔다. “전지훈련 가면 꼭 방도 같이 썼어요. 축구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10년 넘게 해오니까 알 거 모를 거 다 아는 사이가 됐죠.” 이 둘은 눈빛만 봐도 서로의 감정까지 읽는 사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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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용국 감독 체제 이전 37년 동안 이 팀을 위해 헌신한 배종우 감독의 모습. (사진=내셔널리그)

마흔까지 뛴 서보원, 감독이 된 어용국

하지만 한전은 2000년대 들어 부진을 면치 못했다. 한국전력에서 한국수력원자력으로 팀 주체가 바뀌게 됐지만 오히려 분위기는 더 좋지 않게 흘러갔다. 다른 실업팀들이 30여 명의 선수를 보유한 것과 달리 한수원은 모기업 규정상 딱 22명의 선수가 전부였고 모두가 똑같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었다. 당연히 선수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고 경기력은 갈수록 떨어져만 갔다. 가뜩이나 서보원 코치가 현역에서 물러난 시점에서 한수원은 2003년 시즌 전반기에 극심한 부진에 빠졌다. 부상 선수가 속출하니 22명의 엔트리 중 가용할 수 있는 선수는 13~14명에 불과했다. 그러자 2003년 시즌 K2리그 후반기 선수 추가 등록을 앞두고 어용국 수석코치가 서보원 코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보원아. 네가 다시 선수로 좀 뛰어줄 수 있겠어?” 서보원에게 플레잉코치를 제안한 것이었다. 이 팀에 15년이라는 세월을 바친 서보원 코치도 흔쾌히 동의했다. “네. 몸도 좋습니다. 임시방편이지만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서보원 코치는 다시 그라운드에 섰다. 그러면서도 ‘언제든 제자들이 돌아오면 자리를 양보하겠다’는 마음이었다. 2003년 후반기 좋은 활약을 펼친 서보원 플레잉코치는 2004년에도 전반기에는 선수 등록을 하지 않았지만 후반기 들어 부상자가 속출하자 또 다시 선수로 등록해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렇게 서보원 코치는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2008년까지 무려 6년 동안 경기장에 나섰다. 2008년 그는 마흔의 나이에도 플레잉코치로 활약했다. 한수원은 2006년 시즌 종료 후 배종우 감독이 구단에 줄기차게 요청한 연봉 책정 시스템과 선수단 정원 증가가 받아들여졌지만 서보원 플레잉코치는 이후에도 한 동안 그라운드에 서야 했다. 서보원 플레잉코치가 제자들의 지도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 건 2009년에서야 가능했다. 이때부터 한수원은 배종우 감독과 어용국 수석코치, 서보원 코치 체제를 제대로 가동할 수 있게 됐다. 1975년 한전에 입단한 배종우 감독은 이 팀에서만 무려 34년째 생활하고 있었고 어용국 수석코치는 이 팀에서만 23년째, 서보원 코치도 20년째 생활하는 셈이었다. 이제는 가족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가 됐다.

만년 하위권이었던 한수원은 2008년 내셔널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이변을 일으키더니 2010년에는 사상 첫 내셔널리그 통합 우승에도 성큼 다가섰다. 전기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4강 플레이오프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챔피언결정전까지 진출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수원시청에 패해 사상 첫 리그 우승의 꿈이 물 건너 가고 말았다. 비록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한수원 선수들은 “조금만 더 하면 우승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이때 믿기지 않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2011년 故배종우 감독이 신장암으로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무려 37년 동안 이 한 팀만을 위해 헌신했던 故배종우 감독이 하늘로 가면서 한수원은 크게 흔들릴 위기에 놓였다. 그러자 한수원에서는 어용국 수석코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이제 우리 팀의 감독을 맡아주세요. 26년 동안 우리 팀을 위해 헌신한 당신이 적임자입니다. 23년 동안 함께한 서보원 코치도 수석코치로 승격시키겠습니다.” 이 둘은 故배종우 감독이 세상을 떠난 뒤 흔들리던 한수원을 일으킬 인물로 지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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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용국 감독(왼쪽)과 서보원 수석코치는 올 시즌 경주한수원의 사상 첫 내셔널리그 통합 우승에 도전하고 있다. (사진=내셔널리그)

사상 첫 리그 우승에 도전하는 한수원

하지만 이 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故배종우 감독의 빈소를 지키는 것이었다. 고인의 가족이 있었지만 이 둘은 모든 장례 절차를 직접 해결하며 상주 역할을 했다. 서보원 수석코치는 가족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고 했다. “故배종우 감독님은 저희 아버지나 다름 없는 분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죠. 감독님의 형님과 장례 절차를 논의했고 문상객도 함께 받았어요.” 이 둘은 故배종우 감독의 장례가 끝나자 팀 정비에 들어갔다. 한수원에서만 26년을 생활한 어용국 감독과 한수원 23년차인 서보원 수석코치는 8년 동안 이 팀에서 함께 생활했던 주장 하용우를 새로운 코치로 선임했다. 가족은 끝까지 지키는 한수원과 故배종우 감독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서보원 수석코치는 이 시기 또 한 번의 유혹이 있었다. 1년 후배이자 의형제처럼 지내는 김인완 감독이 대전시티즌을 맡게 되면서 수석코치로 자신을 영입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보원 수석코치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당연히 프로팀 지도자 자리가 욕심이 난 건 사실이죠. 하지만 23년을 함께 한 이 팀을 떠날 수가 없었어요.”

어용국 감독은 과묵하게 팀을 이끌고 서보원 수석코치는 악역을 자처하며 선수들에게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 그래서 둘의 호흡이 더 잘 맞는다. 故배종우 감독이 떠난 뒤 흔들리던 팀도 점차 안정감을 찾았고 이 둘이 이끄는 한수원은 마침내 2013년 내셔널리그에서 돌풍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정규리그를 4위로 마친 한수원이 플레이오프에서 창원시청과 인천코레일을 상대로 무려 4연승을 거두며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챔피언결정전 상대는 내셔널리그의 최강자 울산현대미포조선이었다. 내셔널리그 역대 최다인 7경기 연속골을 뽑아낸 김선민을 앞세운 울산미포조선은 개막 전부터 우승 후보 0순위로 꼽히던 팀이었다. 결국 한수원은 챔피언결정전 1차전을 1-1로 비기며 선전했지만 2차전에서 1-2로 패하면서 또 한 번 리그 첫 우승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어용국 감독은 “우승의 너무나도 좋은 기회를 놓쳐 두고 두고 아쉽다”고 했다.

하지만 올 시즌 한수원은 또 다시 인상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지난 시즌 준우승이 우연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정규리그 3위를 기록한 한수원은 올 시즌 정규리그에서 1무 2패로 열세였던 강릉시청을 준플레이오프에서 2-1, 4-2로 제압하며 정규리그 2위인 울산미포조선과 또 다시 플레이오프에서 만나게 됐다. 지난 12일 안방인 경주시민운동장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울산미포조선과 1-1 무승부를 기록한 한수원은 내일(15일) 원정 2차전을 치를 예정이다. 최근 들어 투자를 이어가며 김오성(16골)과 유동민 등 훌륭한 선수들을 수급한 한수원은 올 시즌에도 울산미포조선을 상대로 2승 1무를 기록하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지만 황철환(10골 5도움)과 이동현(5골 3도움), 알렉스(5골 3도움) 등을 앞세워 리그 최다 득점을 기록하고 있는 울산미포조선의 공격력도 만만치 않다. 지금껏 리그 우승을 단 한 번도 차지하지 못한 한수원은 이번에야말로 첫 리그 우승을 놓칠 수 없다고 벼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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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한수원의 도전은 성공으로 막을 내릴 수 있을까. (사진=내셔널리그)

25년 우정 지킨 이들의 꿈은 이뤄질까

가족을 위해 프로의 꿈을 포기하고 택한 직장에서 어용국 감독과 서보원 수석코치는 어느덧 25년째 함께 생활하고 있다. 서보원 수석코치는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결혼한 지 이제 10년이 됐어요. 그런데 (어)용국이 형하고는 25년 동안 같이 지냈죠. 아내보다도 더 저를 잘 알아요. 사회 초년병 때 형을 만났는데 벌써 용국이 형은 쉰 살이 됐고 저는 마흔 여섯이 됐네요. 흔히들 어느 팀이건 ‘가족 같은 분위기의 팀’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저희는 정말 가족이에요. 금방 금방 직장을 옮기는 시대에서 저희는 25년째 함께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요. 이 팀이 저에게는 더 좋은 조건이 오더라도 떠날 수 없는 곳이죠. 제가 평생 함께한 직장에서 이번만큼은 꼭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싶어요.” 서른 정도면 현역에서 물러나 직장 생활이나 할 생각으로 이 팀을 택했던 그는 마흔 살까지 현역으로 뛰었고 지금도 사무실이 아닌 그라운드에서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고 있다.

어용국 감독 또한 25년을 함께 한 후배이자 지금은 친구 이상의 존재인 서보원 수석코치와 꼭 한 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처음 보원이를 만났을 때는 이렇게 25년을 함께 할 거라고 생각조차 못했죠. 그런데 그때 같이 운동하던 친구들 중에 지금까지 축구 쪽에 있는 사람은 몇 되지도 않아요. 보원이하고 이렇게 평생을 함께 할 줄은 몰랐어요. 집에서야 잠만 자고 나오는 거고 평생을 이 친구와 함께 하고 있네요. 보원이와 아직 리그 우승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번 만큼은 꼭 그토록 원하던 리그 우승을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이번에는 꼭 우승하자고 보원이하고도 이야기를 많이 해요. 준비도 많이 했으니까 이제는 하늘에 맡겨야죠. 우리 팀에서 37년을 일하셨던 故배종우 감독님께서도 하늘에서 돕지 않을까요.” 오늘은 온통 국가대표팀의 A매치 요르단전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겠지만 한 번쯤은 이들의 도전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게 어떨까. 25년 동안 이 팀만을 위해 헌신하고 25년 동안 미우나 고우나 함께 했던 이 두 지도자의 도전은 내일(15일) 오후 3시 울산종합운동장에서 울산미포조선을 상대로한 삼성생명 2014 내셔널리그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도 이어질 예정이다. 가족을 위해 꿈을 포기했지만 한수원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난 이 둘은 올 시즌이 끝날 때 뜨거운 포옹을 나눌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