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혹독했던 2006년 겨울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내셔널리그 고양 국민은행의 열혈 팬이었는데 내가 응원하던 이 팀이 K리그 승격의 기회를 얻고도 이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며 큰 실망감과 함께 분노에 차 있었다. 함께 고양 국민은행을 응원하던 여러 서포터스 친구들과 붉은악마의 도움을 받아 A매치 경기에서 승격을 거부한 국민은행을 성토하는 걸개를 내걸기도 했고 A매치가 열리는 경기장 밖에서 우리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뛰어 다니기도 했다. K리그 경기장을 돌아다니며 우리의 메시지를 걸개로 전달하기도 했다. 내셔널리그가 돌아가는 상황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지 않아 어떻게든 이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지만 몇몇 팬들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하다 하다 한계를 느낀 나는 이후 한겨울 국민은행 본사 앞에서 이 결정을 번복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1인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날은 몸도 마음도 몹시 추웠다.

하지만 형체도 알 수 없는 거대 단체와 싸우는 힘 없는 팬의 입장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고 아무렇지도 않게 해가 바뀌어 2007년 시즌이 시작됐다. 국민은행은 승격을 거부하고 내셔널리그에 남아 예년과 똑같이 개막전을 준비했다. 승격 거부에 대한 부당함을 알리고 싸우려는 나를 포함한 몇몇 팬들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이때 큰 결단을 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고양 국민은행의 2007년 개막전 경기 도중 그라운드로 뛰어든 것이었다. A매치 경기장에서 아무리 큰 목소리를 내도 들어주는 이가 없었고 1인시위를 해도 관심 가져주는 이도 없는 상황에서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라운드에 난입해 사고를 치는 것 뿐이었다. 나는 당시 같이 고양 국민은행을 응원하던 서포터스 동생과 함께 그라운드로 난입해 “더 이상 팬들을 기만하는 이런 경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이런 내 행동은 지금 생각해도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는 짓이다. 선수들이 뛰는 그라운드로 뛰어 들어가 경기를 방해하는 행동은 이유를 막론하고 동정을 살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이런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라운드에 난입할 당시에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더는 없었다. 형체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결정에 항의를 해봐도 돌아오는 메아리가 없는 상황에서 그라운드로 난입해 그나마 작은 이슈라도 만드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함께 그라운드에 난입한 동생과 함께 밤새 소주를 들이켜며 눈물을 흘렸다. 잘못된 행동이지만 그래도 팬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짓거리(?)를 해놓고도 더 바뀔 게 없는 현실이 너무나도 서글펐다. 나는 그때부터 그래도 조금이나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축구 칼럼니스트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아무리 경기장에 뛰어 들어 목소리를 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물론 축구 칼럼니스트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그때의 피 끓던 기질이 가끔 나와서 문제이기 하지만 말이다.

지난 주말 연이어 일어난 관중 난입 사건

지난 주말 K리그 경기장에서는 공교롭게도 두 번이나 관중이 그라운드로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광양전용구장에서 열린 전남과 서울의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2014 32라운드 경기 종료 직전 스테보가 터트린 극적인 동점골이 오심으로 인해 노골 선언이 된 뒤 한 전남팬은 그라운드로 뛰어 들어 주심에게 안경을 건넸다. “똑바로 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뒤 열린 울산과 상주상무의 경기에서도 울산이 애매한 페널티킥을 얻어내 결국 2-1 승리를 따내자 이번에는 상주팬이 경기장으로 뛰어 들었다. 평소 관중 난입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일이지만 이틀 동안, 그것도 똑같이 심판 판정에 항의하는 팬들이 그라운드로 뛰어 들었다는 건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중대한 사안이다. 2007년의 나처럼 이번에 그라운드에 뛰어든 이들 역시 아무리 심판의 오심이 있었다고 해도 정당화 될 수 없는 행동을 한 것이지만 왜 그들이 그라운드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두 경기 오심으로 결국 울산은 상위 스플릿 마지노선인 6위를 탈환하게 됐고 반대로 전남은 7위로 내려 앉았다. 여기에 공교롭게도 전남-서울전 주심과 대기심은 이튿날 울산-상주전 대기심과 주심으로 역할을 맞바꿔 연이어 사고를 쳤다. 음모론을 믿고 싶지는 않지만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다. 시즌 막판 팬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흥미로운 스플릿 시스템이라는 제도는 결국 심판의 어처구니 없는 두 차례 판정으로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게 됐다. 이 두 번의 오심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전남이 6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가운데 울산이 7위에 내려 앉아 있어야 한다. 그저 단순한 오심이 아니라 이건 한해 농사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들판에 제초제를 뿌려 버린 꼴이다. 이 오심으로 인해 전남은 남은 시즌을 하위 스플릿에서 보낼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나도 한 팀의 팬으로 골대 뒤에서 열심히 응원했던 팬의 입장에서 전남팬의 분노가 이해된다. 주심에게 안경을 건네야 했던 전남팬 입장이야 오죽했을까.

일부에서는 K리그 스폰서인 현대오일뱅크와 프로축구연맹의 권오갑 총재, 그리고 울산현대가 커넥션을 형성하고 있는 건 아니냐고 의문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음모론에 대해서는 믿고 싶지 않다. K리그가 이 정도로 타락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음모론이 자꾸 흘러 나오는 건 너무나도 명백한 오심이 이런 민감한 순간에 울산이 유리하게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K리그가 힘든 상황에서 손을 내민 스폰서 입장에서는 상당히 달갑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후원은 후원대로 하는데 홍보 효과는커녕 여기에 의심의 눈초리까지 받고 있으니 참 입장이 난감하게 됐다. 이번 두 차례 오심을 저지른 심판은 결국 K리그의 스폰서십에도 상당한 타격을 주게 됐다. 현대오일뱅크가 이렇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앞으로도 K리그 스폰서를 꾸준히 맡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일부에서 제기하고 있는 음모론은 너무 나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결국 몇몇 심판이 K리그 전체에 불신과 의심을 선물하게 된 셈이다. 여기에 전남과 상주는 오심의 결정적인 희생양이 됐다.

오심 심판에게 건넨 안경, 무언의 메시지다

연맹에서는 이번 오심을 인정해 해당 심판에게 징계를 가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내려진 결과가 뒤집어지지는 않는다. 전남은 결정적인 상황에서 승점을 날렸고 상주 역시 잔류 다툼에서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됐다. 심판의 오심과 관중의 난입을 똑같이 그라운드의 추태라고 묶어서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이 상황에서 분노하며 그라운드로 뛰어든 관중을 오심을 저지른 심판과 같은 선상에서 놓고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관중의 그라운드 난입은 반성해야 할 일이지만 이건 현재 연맹을 향해 던지는 무언의 메시지라는 걸 느껴야 한다. 그저 해외 유명 축구선수가 내한해 치르는 경기에서 스타의 손 한 번 잡아보려고 무모하게 그라운드에 뛰어든 게 아니다. 골대 뒤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오죽 답답했으면 징계도 무릅쓰고 그들은 그라운드로 뛰어 들 생각을 했을까. 요새는 안전문제가 강화돼 그라운드에 잘못 난입했다가는 해당 관중이 축구장 입장 금지라는 징계까지 당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이마저도 감수했다.

관중이 그라운드에 뛰어드는 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잘못된 행동이다. 그러면서 누군가는 관중이 어떤 문제에 불만이 있으면 정당한 방법을 통해 이의를 제기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이런 상황에서 팬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별로 없다. 전남 홈 경기에서 문제의 심판이 배정되는 게 앞으로 또 언제일지도 모르고 이 모든 상황이 갖춰지게 되더라도 팬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경기 도중 심판에게 야유를 보내는 것과 항의성 걸개를 거는 게 전부다. 나 역시 2007년 그라운드 난입에 대해 여전히 반성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심판의 오심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전남팬의 입장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오심을 저지른 심판에게는 내용도 공개되지 않는 솜방망이 징계보다는 화가 난 팬이 건네준 안경이 더 따끔한 질책이지 않을까. 오히려 이 명백한 오심으로 한해 농사를 망칠지도 모를 상황에서 주심에게 안경을 건넨 팬이야 말로 제대로 된 풍자를 한 건 아닐까. 앞으로 팬들의 이런 무모한 그라운드 난입은 없어져야겠지만 그보다 먼저 사라져야 할 건 바로 자질이 부족한 심판이다.

2007년 그라운드에 뛰어든 나는 경기장 밖으로 끌려 나가면서 구단 관계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술 먹었으면 곱게 경기나 보세요.” 나는 맨 정신에 대단한 각오와 사명감을 안고 행동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이런 행동이 취객의 추태 정도로 보인 것 같다. 이번 일 역시 누군가에게는 관중의 추태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그들의 입장을 잘 이해한다. 관중의 그라운드 난입은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없는 관중이 할 수 있는 가장 무모하면서도 가장 직접적인 메시지의 표현이다. 관중의 이런 행동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왜 그들이 관중석을 박차고 그라운드로 뛰어들었는지 곱씹어 봐야할 때다. 단순히 이걸 관중의 난동 정도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얼마 전 정치인에게 날달걀을 던지는 시민의 숨은 의도를 풀이하는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거기에서는 이런 말을 했다. “오죽했으면 날달걀을 던지겠어요. 돌을 던졌더라면 폭력적인 행동이었겠지만 날달걀을 던지는 건 힘없는 민중이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불만을 표현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에요.” 그라운드로 뛰어들어 주심에게 안경을 건넨 관중의 행동, 연맹과 해당 심판은 날달걀을 맞은 것만큼이나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