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축구인이 이틀 전인 지난 9월 1일 세상을 떠났다. 화려한 국가대표 생활 한 번 하지 못한 이 축구인을 기억하는 이들은 아마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K리그에서만큼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위대한 선수였다. 만 42세의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 故윤정춘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1990년대 후반 윤정환, 이을용, 김기동과 함께 ‘니포 축구’를 책임졌던 바로 그 윤정춘이다. 긴 무명의 터널을 벗어나 전설이 됐기에 그의 축구 인생은 더욱 아름다웠다. 늘 묵묵히 최선을 다했던 고인에게 오늘 칼럼을 바친다. 조용했지만 위대했던 고인의 축구 인생을 돌아보려 한다.

연봉 960만 원의 무명 축구선수

1992년 전남 순천고 졸업을 앞둔 윤정춘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별로 없었다. 당시 전국대회에서 4강 이상 진출해야 대학 진학 자격이 주어지는 규정이 있었지만 윤정춘이 속한 순천고는 전국대회 8강이 최고 성적이었다. 윤정춘에게는 대학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그가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프로팀에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그리 특출나지 않은 윤정춘을 선택할 프로팀도 딱히 없었다. 윤정춘은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K리그 드래프트에 원서를 넣었다. 연습생으로라도 계속 축구를 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유공이 손을 내밀었다. 비록 6순위 지명이었지만 대학에 갈 수 없었던 윤정춘은 축구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해 했다. 첫해 그의 연봉은 960만 원에 불과했다.

윤정춘은 늘 외로웠다. 어린 나이에 어울릴 동료도 없었고 모든 게 낯설었다. 실력이 뛰어나 대학을 거치지 않고 프로행을 선택한 게 아니라 당장 경기에 나설 실력도 아니었다. 워낙 말수가 적고 고독하게 생활하는 그를 보고 선배들은 ‘애늙은이’나 ‘영감’이라고 불렀다. 프로 무대 입성 후 2년 동안 단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던 윤정춘은 3년차인 1994년에는 교체로 단 한 경기에 나선 게 전부였다. 당장 은퇴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철저한 무명 선수였다. 프로 무대에서 경쟁이 전혀 되질 않자 ‘4강 제도’에 걸리지 않는 대학교 입학을 알아볼 만큼 방황하기 시작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비쇼베츠 감독에 의해 잠시 강화 선수로 대표팀 유니폼을 입기도 했지만 1994년 11월 열린 러시아와의 평가전에서 상대 공격수에게 결정적인 파울을 범해 실점을 허용한 뒤에는 올림픽 대표에서도 제외됐다. 당시 그를 대신해 올림픽 대표에 선발된 게 박성배다.

하지만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바로 운명적인 지도자와의 만남이었다. K리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으로 손꼽히는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이 유공 지휘봉을 잡게 되면서 윤정춘에게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1995년 니폼니시 감독 부임 후 9경기에 나서며 기회를 잡기 시작한 그는 이때부터 ‘니포 축구’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카메룬을 이끌고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 등을 격파하며 8강에까지 올랐던 니폼니시는 유공 감독 부임 후 윤정춘을 윤정환, 김기동과 함께 중용하기 시작했다. ‘니포 축구’와 함께 윤정춘의 축구 인생에 대반전이 시작된 것이다. 173cm의 작은 키였고 철저한 무명 선수였지만 드리블과 패싱력, 센스 등을 갖춘 윤정춘에게 니폼니시는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다. 니폼니시는 윤정환이 상대 수비에게 묶일 경우 윤정춘을 활용해 그 틈새를 노리는 전력으로 재미를 보기 시작했다.

‘니포 축구’의 중심이 된 윤정춘

1995시즌 서서히 기회를 잡은 윤정춘은 1996년 믿기지 않는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1996년 아디다스컵의 스타는 단연 윤정춘이었다. 막판까지 선두 경쟁을 펼치던 부천은 아디다스컵 마지막 경기에서 포항과 격돌했다. 이전까지 아디다스컵 7경기에서 도움 세 개를 기록하고 있던 윤정춘은 이 경기에서 전반 43분 윤정환이 수비수 틈 사이로 찔러준 공을 달려들며 왼발로 차 넣어 극적인 결승골을 뽑아냈다. 이 골로 1-0 승리를 거둔 부천은 아디다스컵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 무명의 프로 5년차 윤정춘은 아디다스컵에서만 1골 3도움을 기록하며 일약 스타로 등극했다. 윤정춘은 같은 해 9월 열린 라피도컵 프로축구 후기리그 부산과의 경기에서도 후반 종료 10초전 세르게이가 올려준 공을 오른발로 밀어 넣으며 극적인 1-1 무승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당시 부천은 비록 후기리그 2위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1위만큼이나 아름다운 2위라는 수식어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니포 축구’는 그렇게 정규리그 32경기에서 55골, 아디다스컵 8경기에 18골로 그 해 최다득점 팀이 되며 팬들을 열광시켰고 그 중심에는 윤정춘이 있었다. 당시 애틀랜타 올림픽 차출로 8월에야 합류하게 된 윤정환을 대신해 이전까지 팀을 이끈 것도 윤정춘이었다.

1996년 무명의 설움을 한 방에 떨쳐내고 ‘니포 축구’의 중심이 된 윤정춘에게 니폼니시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선수다. 올해는 일을 저지를 것이다. 나는 그를 한국의 마라도나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실제로 1997년 시즌이 개막되자 윤정춘은 더욱 무섭게 변해 있었다. 이전까지 2무 3패로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수원을 시즌 개막전에서 만난 부천은 전반 13분 만에 첫 골을 기록하며 달아났다. 바로 조셉의 패스를 이어 받아 오른발 터닝 슈팅으로 수원 골문을 가른 윤정춘 덕분이었다. 비록 이후 수원에 한 골을 내줘 경기는 1-1로 막을 내렸지만 이 경기는 지금까지도 명승부로 회자될 만큼 치열한 대결이었다. 당시 전반 13분 윤정춘의 골이 터지는 순간 엇비슷하게 전북 익산에서도 득점 소식이 전해졌다. 전북-전남전에서 노상래가 골을 기록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니 윤정춘의 골이 1분 먼저 터진 걸로 확인됐다. 윤정춘은 니폼니시 감독의 말처럼 시즌이 개막하자마자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는 1997 시즌 역사적인 리그 1호골의 주인공이 됐다.

윤정춘의 상승세는 놀라웠다. 곧이어 펼쳐진 전북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후반 13분 조성환이 찔러준 공을 침착하게 득점으로 연결하며 두 경기 연속골 행진을 이어갔다. 흔히 그를 윤정환-김기동-이을용 등과 함께 황금 미드필드 라인이라고 칭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윤정춘은 정통 미드필더라기보다는 김기동과 조셉, 윤정환 위에 배치된 공격수 역할에 더 충실했다. 그는 2선에서 침투하며 세르게이에 집중된 수비를 뚫어내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그리고 1997년 4월 12일 그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운명적인 경기를 펼쳐졌다. 윤정춘은 이날 안양과의 경기에서 전반 26분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에서 강한 왼발슛으로 첫 골을 기록하더니 4분 뒤에는 윤정환의 패스를 받아 두 번째 득점에도 성공했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후반 26분에는 한 골을 더 추가하며 해트트릭을 완성한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이날 윤정춘이 세 골만 기록한 게 아니라 두 개의 도움도 추가했다는 사실이다. 윤정춘은 이날 무려 3골 2도움의 무시무시한 활약으로 팀의 7-1 대승을 이끌었다. 한 경기 5개의 공격 포인트는 2011년 몰리나가 3골 3도움을 올리기 전까지 샤샤, 이상윤과 함께 한 경기 최다 공격 포인트 기록이었다.

부천에서 날아올라 부천에서 감독 대행까지

윤정춘은 1997년 시즌 1호 골은 물론 시즌 1호 해트트릭의 주인공이 되며 화려하게 비상했다. 당시 동대부고를 졸업하고 포항에서 맹활약하던 최문식이나 금호고 졸업 후 수원에 입단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고종수도 ‘고졸 선수’였지만 윤정춘은 이들과는 달랐다. 최문식이나 고종수가 워낙 뛰어난 실력 탓에 대학교를 건너 뛴 뒤 프로에서 맹활약한 것과 달리 윤정춘은 갈 곳이 없어 프로에 입단해 철저한 무명 생활을 5년이나 한 선수였다. 그런데 시즌 개막 전 윤정춘의 활약을 호언장담했던 니폼니시 감독의 말처럼 윤정춘은 오랜 무명 생활을 깨고 1997년 맹활약을 앞세워 올스타에도 뽑히며 날아 올랐다. 프로 입단 당시 채 1천만 원이 되지 않던 연봉도 1997년에는 무려 4천8백만 원으로 인상될 만큼 윤정춘의 활약은 대단했다. 많은 이들은 ‘니포 축구’를 논할 때 윤정환을 기억하지만 윤정환이 그라운드의 지휘자였다면 윤정춘은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윤정환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던 ‘니포 축구’의 중심이었다. 그는 공을 예쁘게 차면서도 저돌적인 움직임까지 보유한 선수였다.

사실 윤정환과 윤정춘, 김기동, 이을용으로 이어지는 황금 라인이 구축된 건 1998년과 1999년, 딱 2년뿐이었다. 또한 이 와중에 윤정환이 부상과 대표팀 차출 등으로 함께 할 수 없던 때도 꽤 많았다. 이후 윤정환이 2000년 J리그로 떠난 뒤 윤정춘은 이을용, 김기동과 함께 비록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가장 인상적인 팀을 구축하게 됐다. 당시 부천은 이들 외에도 곽경근과 이성재, 이원식 등을 앞세워 2000년 플레이오프에서 전북과 성남을 연달아 격파한 뒤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해 결국 안양에 우승 트로피를 내줬지만 지금도 당시 부천은 K리그 역사에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축구를 선보인 팀으로 기억되고 있다. 윤정춘은 2000년 무려 41경기에 나서 4골 3도움을 기록했고 이후 팀이 침체기에 접어든 상황에서도 홀로 팀을 지키며 2004년까지 고군분투했다. 구단에서 선수를 팔아 버티고 있을 때도 윤정춘 만큼은 이를 악물고 그라운드에서 투혼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2005년 시즌을 앞두고 결국 팀을 떠나 대전시티즌 유니폼을 입게 됐다. 13년간 한 팀을 위해 희생했지만 그는 팀 리빌딩을 이유로 한 순간 팀을 떠나게 됐다.

윤정춘은 대전에서 마지막 한 시즌간 뛴 뒤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의 나이 서른 세 살이었다. 하지만 그의 축구 열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2007년 재현고등학교 코치를 시작으로 지도자의 길로 접어든 그는 2009년에는 K3리그 경주시민축구단의 플레잉코치로 축구에 대한 갈증을 풀기 시작했다. 주로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지만 그는 2012년 6월 남양주시민축구단과의 경기에서는 팀의 세 번째 골을 성공하는 등 마흔 살의 나이에도 현역 못지 않은 왕성한 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2013년 K리그 챌린지에 입성한 부천FC1995의 수석코치로 다시 부천에 돌아왔다. 그와 함께 현역 시절 부천종합운동장을 누볐던 곽경근 감독의 요청을 받고 고민할 것도 없이 부천을 선택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2013년 시즌이 끝나고 곽경근 감독이 선수 영입 비리 논란에 휩싸인 채 경질되자 잠시 감독대행 역할을 맡기도 했다. 부천에서 뛰었던 전설이 부천의 감독대행이 된 것이었다. 이후 새 시즌을 앞두고 최진한 감독이 부천에 새롭게 부임한 뒤 윤정춘은 부천을 떠났다.

故윤정춘이 K리그와 부천에 남긴 것

그는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향인 순천으로 내려가 유소년 선수 육성에 힘쓰면서 한국 축구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게 됐다. 그가 지난 1일 그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결국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부족한 신체 조건과 부족한 재능을 철저한 노력으로 극복해내며 연습생 신화를 썼던 그는 이제 하늘로 떠났다. 그저 쉽게 잊혀질 수도 있는 무명 선수였지만 고인은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위해 3년 동안이나 프로 무대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한 멋진 선수였다. 그는 영광스러운 역사를 부천에 남겼고 재능이 부족해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하면 정상에 설 수 있다는 메시지를 한국 축구에 남겼다. 철저한 무명의 터널에서 벗어나 전설이 된 ‘부천의 상징’과의 작별이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다. 故윤정춘은 마지막 가는 길에도 모든 장기를 기증하며 아름답게 떠났다. 윤정환과 이을용, 김기동 등 ‘니포 축구’의 전설적인 선수들을 논할 때 꼭 빠져서는 안 될 그 이름, 故윤정춘의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