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스포츠마케팅 기업 스포티즌이 지난 4일 벨기에 2부리그 AFC투비즈라는 팀의 인수를 공식 발표했다. 스포티즌은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은 사실을 전했다. 한국 기업이 유럽 축구단을 인수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고 나는 그들의 이런 도전을 응원한다. 그러면서 여러 언론에서는 이번 스포티즌의 벨기에 2부리그팀 인수가 국내 기업 사상 최초의 유럽 구단 인수라고 앞다퉈 보도했다. 하지만 이건 잘못 알려진 일이다. 스포티즌의 과감한 투자와 도전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이미 한국 기업의 유럽 축구 구단 인수는 1997년 있었던 일이다. 오늘은 이 일에 대해 살펴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안을 모색해 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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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기아 대우 바르샤바’ 선수들이 승리를 거둔 뒤 함께 기뻐하는 모습. 그들의 가슴에는 대우 엠블럼이 선명하다. (사진=레기아 바르샤바 홈페이지)

세계 무대 진출 노리던 국내의 기업들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 폴란드에서 축구팀 하나가 탄생했다. 폴란드 바르샤바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단한 이 팀은 창단 후 얼마 있지 않아 팀 명칭을 ‘바르샤바 군사 스포츠 클럽’으로 바꿀 만큼 군대 색채가 강한 팀이었다. 그들은 이후 팀 명칭을 ‘레기아 바르샤바’로 바꿨고 폴란드 프로축구리그인 엑스트라클라사에서 가장 성공한 팀으로 성장했다. 1955년 이후 리그 챔피언에 숱하게 올랐고 폴란드컵에서도 가장 많이 우승한 팀이었다. 1995년부터 1996년까지는 프랑스 미디어 기업인 카날 플뤼스가 레기아 바르샤바를 후원할 만큼 이 팀은 폴란드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1995/96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조별예선에서 로젠보리(노르웨이)와 블랙번(잉글랜드) 등을 제압하며 유럽에서도 만만치 않은 팀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에는 한국 기업의 글로벌화 바람이 거셀 때였다. 너도나도 국제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던 상황이었다. 삼성은 중국 프로축구 텐진 팀을 인수해 ‘텐진 삼성’으로 팀 명칭을 바꾸는 등 무려 7~8개 해외팀을 직접 운영하거나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 삼성은 동유럽에서 ‘삼성컵 국제실내육상대회’를 개최했고 독일 프로축구 한자로스토크를 후원하기도 했다. 제일모직 중국 법인은 중국 탁구팀을 창단하기도 했고 금호타이어 또한 중국 텐진의 배구팀을 인수해 ‘금호 텐진’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LG 또한 마찬가지였다. LG는 북아프리카 4개국 대항 축구대회를 비롯해 파키스탄 최고 스포츠인 하키를 활용해 ‘LG배 하키대회’도 개최했다. 국내 기업이 세계 무대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스포츠를 통한 마케팅 사업이 반드시 필요했고 1990년대 중반부터 이런 바람은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우그룹 역시 원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특히 대우는 폴란드를 기점으로 동유럽 진출에 역점을 둘 계획이었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1,500만 달러(당시 한화로 약 130억 원)를 투자해 과학 문화 재단을 설립했다. 외국 기업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한 방법이었다. 대우그룹은 폴란드 정부가 추천하는 우수 연구 과제에 대해 연구 자금을 지원하는 일에도 투자하면서 대우자동차 현지 합작법인인 대우FSO 등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애썼다. 당시 대우자동차는 티코와 에스페로를 주력 상품으로 내세워 폴란드 자동차 시장에서 20만대 판매로 시장점유율 1위를 눈앞에 두고 있었고 라노스와 누비라, 레간자 등의 현지 판매도 준비 중이었다. 대우는 폴란드 시장 공략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대우자동차를 자동차 랠리에도 적극 참여시켜 스포츠 마케팅을 강화하려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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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레기아 바르샤바는 대우가 인수한 뒤에도 폴란드컵과 슈퍼컵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사진=레기아 바르샤바 홈페이지)

대우그룹, 레기아를 인수하다

또한 양국의 문화적 이질감 해소를 위해 폴란드 미술전람회를 매년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했고 프로축구팀 레기아 바르샤바가 카날 플뤼스의 스폰서 계약이 끝나자 새로운 스폰서로 레기아 바르샤바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게 1996년의 일이었다.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과 맞물려 대우도 해외로 나섰고 축구도 이들의 중요한 수단이 됐다. 당시 레기아 바르샤바는 폴란드리그에서 1위를 내달리고 있어 대단한 광고 효과를 기대했다. 레기아 바르샤바는 이때까지 폴란드 프로축구에서 5번의 우승과 리그컵 11회 우승에 빛나는 최강 팀이었다.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대한축구협회장을 지내는 등 축구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는 점 또한 대우의 레기아 바르샤바 후원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굴지의 국내 기업이 세계 무대에 뛰어 들기 위해서는 스포츠를 앞세운 마케팅이 필요하던 시점이었고 대우는 그 역점 사업으로 레기아 바르샤바 후원을 택했다.

그렇지만 폴란드 최고의 팀이 한국 대우그룹의 후원을 받자 현지 분위기는 그리 환영적이지 않았다. 이질감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우는 과감히 투자했다. 무엇보다 폴란드 대표팀 선수들이 대부분 해외에서 뛰고 있는 상황에서 레기아 바르샤바 소속이면서 대표팀의 주전으로 활약하는 체자리 쿠차르스키, 야세크 질린스키, 마르신 미에켈 등 세 명의 굵직한 스타를 내보내지 않고 모두 지켜내면서 현지 팬들의 믿음을 얻기 시작했다. 대우의 과감한 투자에 팬들의 마음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대우 역시 동유럽, 특히 폴란드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여러 투자 중 무엇보다도 레기아 바르샤바에 투자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결국 대우그룹은 대우자동차 현지 합작법인인 대우FSO와 손을 잡고 1997년 3월 아예 이 팀을 인수해 버렸다. 팀 명칭도 ‘레기아 대우 바르샤바’, 줄여도 ‘레기아 대우’가 됐다. 국내 기업 사상 최초로 유럽 축구단을 인수한 것이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인수 첫해 자국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폴란드컵과 슈퍼컵에서는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대표팀 3인방 역시 최고 대우를 약속한 구단에 그대로 남았다. UEFA컵 에서는 핀란드 하카와 그리스 파나티나이코스 등을 제압하기도 했다. 이런 성적은 꾸준히 이어졌고 대우그룹 역시 대우 엠블럼을 가슴에 크게 새기고 폴란드는 물론 유럽 무대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치는 선수들의 모습이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IMF 사태 이후 크게 흔들리던 대우그룹은 1999년 파산하고 말았다. 대우그룹의 해체 및 파산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국내에서 운영하던 프로축구팀 부산대우 로얄즈는 현대산업개발로 인수됐고 프로농구팀 인천 대우제우스 역시 신세기 통신에 인수됐다. 당연히 레기아 대우 역시 새로운 주인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레기아 대우는 약 3년 간의 활약을 멈추고 2001년 폴란드 굴지의 재벌 폴모트에 인수됐다.

폴란드 축구 역사 한 페이지 장식한 대우그룹

하지만 이후에도 현지 팬들은 대우의 과감한 투자를 그리워했다. 폴모트가 최대 주주가 됐음에도 유니폼 스폰서도 해주지 않아 구단 운영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한동안 레기아 바르샤바는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고 현재에는 다시 살아나 여전히 폴란드 프로축구에서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당시 대우가 지켜낸 레기아의 레전드 중 체자리 쿠차르스키는 현존하는 폴란드 최고 공격수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의 에이전트로 활약 중이고 야세크 질린스키는 또 다른 폴란드의 명문팀 레흐 포즈난 감독을 역임하는 등 여전히 폴란드 축구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비록 대우그룹의 운영은 3년 만에 막을 내렸지만 이이는 지금도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고 여전히 폴란드 축구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다. 아마 국내 기업이 보다 건실한 상황에서 오랜 시간 이렇게 해외 스포츠 마케팅에 투자할 수 있었다면 지금쯤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

스포티즌이 국내 기업 최초로 유럽 축구단을 인수했다는 건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이전에 대우가 먼저 추진한 일이었다. 스포티즌이 최초의 유럽 구단 인수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1997년 당시 대우그룹이 아닌 현지 법인 차원에서 레기아를 인수했다면서 그 의미를 축소한다. 하지만 당시에도 엄연히 대우그룹이 현지 법인과 손을 잡고 구단 인수 및 운영에 관여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스포티즌이 최초이고 아니고를 떠나 이번에는 보다 안정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투자를 해야 승산이 있다는 점이다. 최초만큼이나 의미 있는 건 최고라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한다. 대우처럼 현지 팬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과감히 투자를 하되 그들처럼 쉽게 무너져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