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마다 열리는 전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에서 우리는 늘 주인공보다는 조연에 가까웠다. 하지만 우리가 월드컵 시즌 때 잘하는 게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이것 만큼은 스페인이나 브라질 못지 않다는 것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물론 좋은 의미로 잘하는 것들도 있고 반대로 별로 좋지 않은 의미에서 잘하는 것들도 있다. 오늘은 한국이 월드컵 때만 되면 가장 잘하는 것들에 대해 꼽아봤다.

1. 예상 시나리오 짜기
칼럼을 통해 몇 번 언급했지만 나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첫 경기에서 멕시코를 잡는 게 당연한 일인줄 알았다. 이후 네덜란드에 선방한 뒤 벨기에를 상대로 승부를 걸면 16강 진출도 충분히 가능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니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블랑코는 가랑이 사이에 공을 끼워 넣고 우리를 농락했다.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멕시코에 완패한 건 고등학교 시절 중간고사에서 우리반 사격부 친구 만큼은 내가 성적으로 이길 줄 알았는데 그 친구보다 등수에서 밀렸던 때의 충격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늘 한국은 조추첨이 끝나면 그럴 듯한 예상 시나리오를 쓴다. 누구를 잡고 누구와 비기고 누구와 승부를 본다. 하지만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우리가 바랐던 대로 시나리오대로 월드컵에서 이뤄진 적을 본 적이 없다. 예상 시나리오만 잘 짰다. 아마 이걸 보면 영화 <타짜>의 고니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시나리오 쓰고 있네.” 예상 시나리오 짜는 건 우리가 월드컵 참가국 중 1등이다. 왜? 브라질 같은 나라는 그냥 다 이길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2. 조직적인 길거리 응원
진심으로 태극전사의 선전을 바라는 마음에서 길거리 응원을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자기들이 좀 더 재미있게 놀아보려고 거리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어찌됐건 다양한 이들이 월드컵만 되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조직적인 응원을 펼친다. 아마 응원 월드컵이 있다면 북한이 다시 출전해 수만 명이 참가하는 아리랑 축전을 보여주지 않는 한 한국이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가 아닐까. 축구 선진국이라는 유럽에서도 가볍게 맥주를 마시며 자국 팀의 경기를 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렇게 한 곳에 수십만 명이 모여서 다 같은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마치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응원하는 모습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다. 최근 텔레비전에서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그 원조도 바로 이 월드컵 길거리 응원이었다. 수많은 연예인 지망생이 거리에서 사진기자들의 오디션을 거치기 때문이다. 응원에 죽고 응원에 사는 나라다. 응원 만큼은 수십만 명이 길거리에서 티키타카를 펼치는 한국을 이길 수 없다.

3. 경우의 수 계산하기
나는 학창시절 수학과 담을 쌓고 살았지만 ‘경우의 수’ 만큼은 참 잘했다. 물론 이건 순전히 어린 시절부터 월드컵을 보며 ‘경우의 수’를 따져왔기 때문이다. 동네 어르신부터 초등학생까지 다가올 벨기에전에서 무조건 두 골차 이상으로 이기고 러시아-튀니지전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 과거에도 한국은 늘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는 16강 진출이라는 ‘경우의 수’를 놓고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깔끔하게 2연승을 거둬 일찌감치 조별예선 통과를 확정짓는 경우도 없지만 그렇다고 2연패를 당해 일찌감치 짐을 싸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 ‘경우의 수’라는 희망고문은 늘 월드컵 때마다 우리와 함께했다. ‘경우의 수’라는 분야에서 만큼은 한국 축구가 브라질 축구보다 훨씬 더 박식하다. 헷갈리면 우리에게 물어보라. 초등학생도 ‘수학의 신’ 수준이다.

4. 세트피스
한국은 월드컵에서 항상 세트피스에 강점을 보였다. 전술에 의한 득점보다는 그래도 전력에서 상대적으로 밀리는 팀도 득점 가능성이 더 높은 세트피스를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다. 1990년 황보관의 캐논슛도, 1994년 미국월드컵 스페인전의 홍명보 골도 그랬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벨기에전 유상철의 득점이나 2002년 한일월드컵 미국전 안정환의 골, 2006년 독일월드컵 토고전 이천수, 2010년 남아공월드컵의 ‘헤발슛’ 이정수와 나이지리아전 박주영의 득점 역시 세트피스였다. 적어도 우리는 세트피스에서 만큼은 늘 강점을 보여 왔고 세트피스를 통해 취약한 경기력을 보완해 왔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아직 세트피스에 의한 득점이 없지만 그래도 코너킥 상황만 되면 기대를 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어려운 코너킥이나 프리킥은 잘 넣으면서 월드컵 역사상 얻어낸 두 차례 페널티킥은 모두 실축했다는 점이다.

5. 2002년 그리워하기
한국 만큼 2002년에 대한 향수에 젖어있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2002년 이후 우리는 월드컵이 열릴 때만 되면 습관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2002년 때는 말이야.” 이번 월드컵이 개막하기 전까지 텔레비전에서는 지난 2010년 남아공월드컵이 아니라 2002년 한일월드컵 경기를 재방송 해주고 있었다. 아마 다음 월드컵 때도 브라질월드컵이 아니라 2002년 당시 영상을 계속 틀어줄 것이다. 이미 한국인 모두는 2002년 월드컵 박사가 돼 있다. 물론 나도 독자들에게 내 주장을 가장 잘 와닿게 전달하기 위해 2002년 월드컵 당시의 예를 자주 드는 편이다. 2002년 월드컵을 추억하는 걸로는 아마 한국이 당시 우승팀 브라질보다도 더 앞서지 않을까. 브라질로서는 월드컵 우승이 종종 있는 일이지만 우리에게 월드컵 4강은 앞으로 통일보다도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6. 마지막 경기 투혼
한국은 월드컵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만큼은 인상적인 경기력으로 감동을 선사했다. 특히 1994년 미국월드컵 당시 독일을 상대로 한 마지막 경기에서는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경기를 펼치며 깊은 인상을 남겼고 1998년 프랑스월드컵 때는 이미 2패를 당해 조별예선 탈락이 확정되고 차범근 감독이 중도 경질되는 충격을 겪으면서도 벨기에와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결과도 결과지만 이 두 경기에서 한국은 폭염을 이겨내고 붕대 투혼을 선보이는 등 진한 감동을 안겼다. 나는 이렇게 마지막 경기에서의 투혼을 보면서 ‘첫 경기에서부터 저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여기에는 늘 “졌지만 잘 싸웠다”, “이긴 것과 다름없는 무승부”라는 뉴스 헤드라인이 따라 붙었다. 아마 이번 월드컵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인 벨기에와의 승부 역시 이런 패턴으로 봤을 때 승패를 떠나 분명히 투혼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는다. 축구팬들은 늘 날계란을 준비했다가도 마지막 경기 투혼을 보며 날계란을 손에서 놓고 박수를 보냈다.

7. 월드컵 종료 후 토론 프로그램
이걸 해야 진짜 월드컵이 막을 내린 거다. 아마 월드컵 토론 대회가 있다면 이것도 한국이 우승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늘 월드컵에서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둘 때마다 대회가 끝나면 전문가들이 모여 <100분 토론> 같은 걸 한다. 주제는 4년마다 늘 똑같다. “흔들리는 한국 축구, 이대로 좋은가” 물론 토론 내용도 항상 똑같다. 전문가들은 국내 프로리그를 활성화해야 하고 유망주를 발굴해야 하고 외국인 감독을 선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렇게 월드컵이 끝날 때쯤 한국 축구를 걱정하는 토론 프로그램이 방송되면 진짜 쓴소리를 하는 건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전문가들이 아니라 늘 전화 연결을 한 일반 시청자들이었다. 이들이 쏟아내는 소리가 정곡을 찔렀다. 혹시 이번에도 월드컵이 끝나고 이런 토론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라면 나를 섭외해 달라. 사상최초로 ‘월드컵 각설이’인 당신네들 문제를 당신네들 방송에서 적나라하게 말할 생각이다.

앞으로는 한국이 월드컵에서 좋은 의미로 잘하는 것들만 넘쳤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한국이 다른 걸 다 떠나 매 경기 후회하지 않을 만한 플레이를 선보이는 팀으로 기억됐으면 한다. 4년 동안 흘려온 선수들의 땀이 그 결실을 맺는 월드컵이 됐으면 좋겠다. 국민들이 보내준 성원이 아깝지 않은 월드컵이 됐으면 좋겠다. 나에게는 월드컵이 4년에 한 번 계 타는 달인데 대표선수들이 브라질에서 빨리 돌아오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