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18일) 대망의 2014 브라질월드컵 한국과 러시아의 첫 경기가 열린다. 이 시점에서 어떤 칼럼을 써야할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대표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도, 그렇다고 막연하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쓰는 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고민 끝에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 한국 축구가 처음 월드컵을 발을 내딛던 그 때로 돌아가 보면 참 의미 있는 하루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을 살아가고 있고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는 요즘, 1954년 태극마크를 달고 처음으로 스위스월드컵에 나섰던 이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그리고 우리의 이 영웅들이 안타깝게도 대부분 하늘로 떠난 시점에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영웅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더더욱 없다. 60년 전 열렸던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 출전한 선수 중 유일한 생존자로 남아있는 박재승 선생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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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 나선 한국 선수들의 모습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이 앗아간 태극마크

박재승은 1923년 태어나 7살 때 처음 축구를 시작했다. 유독 운동 신경이 좋았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불안했던 시기에 그의 가족들은 박재승을 데리고 중국으로 떠나게 됐다. 유년기를 중국에서 보낸 박재승은 한국어보다 중국어가 더 익숙할 만큼 중국 생활에 적응했다. 그렇지만 그의 꿈은 오직 조국의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독립이 되면 꼭 조선으로 돌아가 국가대표 선수가 되겠어.’ 박재승은 중국 하얼빈에서 축구를 배우며 중학교를 마쳤고 베이징으로 떠나 한국교민축구회 소속으로 국가대표 축구선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어린 박재승에게 조국은 늘 그리운 존재였다. 그는 비록 중국에 살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조국을 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1942년 일본이 스포츠를 통해 한민족이 하나로 뭉칠 수 있다고 판단해 조선 땅에서의 모든 스포츠를 금지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축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축구협회 역시 일본의 압박에 결국 해산하고 말았다. 이 땅에서 축구는 점점 사라져 갔고 씨가 말라가고 있었다.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조국으로 돌아갈 경우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을 당할 수 있어 돌아가지도 못하는 신세였다. 중국 땅에서 함께 축구선수의 꿈을 키우던 한국인 동료들 역시 하나 둘 축구를 그만두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나이 22세 때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 중국으로 날아들었다. “일제가 무조건적인 항복을 해 조국이 독립을 맞았다”는 것이었다. 박재승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토록 그리던 조국의 그라운드를 밟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는 귀국한 뒤 조선전업 축구팀에 입단했다. 당시 한반도에는 일제 강점기 이후 축구의 씨가 말라가고 있던 터라 ‘해외파’였던 박재승의 존재는 든든했다. 박재승은 수비수이지만 조선전업의 에이스 역할을 했다. 비록 22세의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이대로만 실력을 꾸준히 보여준다면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빌 날도 멀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 아니 우리 민족에게 또 다른 큰 시련이 닥치고 말았다. 해방을 맞은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비록 유년기를 중국에서 보냈다고는 하지만 박재승은 조국의 전쟁을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다. 전쟁이 나자 곧바로 국군에 입대해 중국어 통역 장교로 군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고국으로 돌아와 축구로 꽃을 피워볼 시기에 그는 전쟁의 한복판에 있어야 했다.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경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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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스위스월드컵에 나선 선수 중 일부의 모습.

32세의 늦은 나이에 첫 월드컵에 나서다

“자네가 중국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고 들었네. 우리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축구팀을 창단해 줄 수 있겠나.” 전쟁통에 그에게 뜻밖의 제안이 왔다. 박재승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부대에서 국군의 사기를 위해 축구팀 창단을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통역 장교로 복무하면서 축구팀 창단까지 맡게 됐고 전쟁 중에도 1953년 육군 팀 소속으로 싱가포르 초청 경기를 떠나기도 했다. 그렇게 전쟁을 경험한 그는 1년 뒤 휴전이 된 후에도 특무대 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와 함께 축구를 시작했던 이들은 대부분 전쟁 중에 축구를 그만뒀고 그 역시 선수 생활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가 됐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선수 생활의 전성기를 대부분 날렸기 때문이다. 이미 박재승은 30세를 넘기고 말았다. 지금이어도 노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나이인데 그때는 오죽했을까. 하지만 박재승에게는 마지막 도전이 남아 있었다. 바로 한국의 사상 최초 월드컵 진출이었다.

1954년 3월 한국은 일본과의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 1차전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남베트남과 인도의 참가 신청이 거절됐고 대만은 기권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1,2차전을 치러 승자가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오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의 방한 경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국민 정서의 문제도 있었고 일장기가 경기장에 내걸리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선수단은 이승만 대통령을 겨우 설득해 1,2차전 모두 일본에서 치르기로 하고 “만약 패하면 대한해협에 빠져 죽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채 일본으로 떠났다. 1차전에서 일본을 5-1로 대파한 한국은 2차전에서도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건국 이래 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박재승 역시 당연히 이 자리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의 나이 31세 때의 일이었다.

드디어 월드컵 본선을 위해 스위스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어린 시절 함께 태극마크의 꿈을 이야기하던 친구들이 없었다. 전쟁통에 목숨을 잃은 이들도 많았고 이미 축구선수로서는 노장 중에서도 노장이 된 터라 현역에서 물러난 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은 유일한 ‘해외파’ 출신이었던 32세의 박재승은 정남식과 민병대, 홍덕영, 이종갑, 한창화 등에 이어 팀의 고참이 돼 있었다. 그렇게 박재승을 비롯한 우리의 영웅들은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가 없어 일본에서 미국 공군이 내준 군용기를 타고 스위스로 날아갔다. 더군다나 당시 비행기 자리가 모자라 선발대 11명만 먼저 출국했고 나머지 선수들은 영국인 신혼부부가 “월드컵에 가는데 항공권이 없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양보해 가까스로 스위스에 갈 수 있었다. 박재승은 한국 월드컵 도전사에 살아있는 증인이자 전설과도 같다. 전설 속에나 내려 올 법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박재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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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스위스월드컵을 위해 떠나는 대표팀이 출국에 앞서 손을 흔드는 모습.

스위스월드컵 유일한 생존자, 박재승 선생

다들 알다시피 당시 월드컵에서 한국은 헝가리에 0-9로 대패를 당한 뒤 터키에도 0-7로 무너지고 말았다.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당시 박재승은 대패를 당하고 얼마나 세계 수준이 높은지 직접 다른 팀의 경기를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버스비가 한 푼도 없었기 때문이다. 선수단 전체가 가지고 간 돈이 200달러에 불과했으니 음료수 한잔 따로 사먹을 돈도 없는 상황에서 한가롭게 다른 팀 경기를 관람한다는 건 사치에 가까웠다. 박재승은 이후에도 스위스 월드컵에 가 다른 팀 경기 한 번 보지 못하고 온 걸 아쉬워했다. 뿐만 아니라 워낙 사정이 어려운 탓에 대회에 참가한 후에도 대한축구협회로부터 단 한 푼도 받지 못했지만 태극마크를 달고 최초의 월드컵에 나선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워했다. 이후 박재승은 바로 은퇴할 것이라는 주변의 예상과는 달리 1956년 제1회 아시안컵에 34세의 나이로 주장 완장을 차고 참가해 우승을 이끌었고 이후 대표팀 코치와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거쳐 축구협회 임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직에서 물러나고 세월이 흐르자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없었다. 가끔 원로 축구인들의 모임에만 종종 나갈 뿐이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참가 후 돈 한 푼 받지 못했던 그에게 협회에서 2002년 월드컵이 끝난 뒤 감사의 표시로 500만 원을 받은 게 전부였다. 월드컵 출전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가 되고 자연스레 스위스 월드컵 영웅들은 잊혀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스위스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 무대에 첫발을 내딛었던 동료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다. 감독이었던 김용식 선생을 비롯해 푸스카스의 슈팅을 막아내다 가슴에 멍이 들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골키퍼 홍덕영 선생, 함흥철 선생, 정남식 선생, 최정민 선생, 주영광 선생 등 전설과도 같은 이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2006년 독일월드컵 이후까지 박재승 선생과 이종갑 선생, 강창기 선생 등 세 명이 생존해 있었지만 2007년 1월 강창기 선생이 투병 생활을 하다 하늘로 갔고 이후 이종갑 선생마저 작고해 박재승 선생만 남게 됐다.

현재 92세의 박재승 선생은 경기도 고양시의 아들 집에 함께 살고 있다. 이미 아내를 하늘로 보낸 박재승 선생은 이제 의사 소통도 어려울 정도로 노환으로 병상에서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겪으면서 32세의 늦은 나이에 월드컵 무대를 처음 밟았던 박재승 선생은 직항 노선이 없어 군용기를 타고 스위스로 날아갔고 현지에서도 버스비가 없어 다른 팀 경기조차 지켜보지 못했던 힘든 시절을 버텨낸 우리의 영웅이다. 그와 같은 영웅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 축구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일 열릴 러시아와의 경기 역시 쉽지 않은 승부가 되겠지만 이렇게 힘든 시기를 겪으며 지금의 한국 축구를 만들어준 선생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했으면 한다. 박재성 선생이 그런 것처럼 지금의 태극전사도 언젠가 먼훗날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기 위해서라도 후회 없는 한판 승부를 펼쳤으면 좋겠다.

60년 전 오늘, 한국은 첫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단순히 술 마시고 즐기는 월드컵이 아니라 1954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월드컵 무대에 나선 영웅들을 기억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박재승 선생을 비롯한 우리의 영웅들이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은 건 공교롭게도 지금으로부터 딱 60년 전 오늘인 ‘1954년 6월 17일’이었다. 스위스 월드컵의 유일한 생존자인 박재승 선생의 건강과 홍명보호의 러시아전 승리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또한 시대는 변했지만 60년 전 축구가 국민의 시름을 덜어준 것처럼 60년이 지난 지금도 축구가 세월호 참사 등으로 상처 받은 이들의 아픔을 치유해줬으면 한다. 박재승 선생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로지 조국의 명예를 위해 월드컵에 참가했다. 돈은 생각한 적도 없다.” 박재승 선생의 말을 곱씹으면서 60년 전 아무 것도 없던 시절 한국 축구를 맨손으로 일군 영웅이 모두 하늘로 떠나고 이제 단 한 명만이 우리와 한 공간에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