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붕카르노 경기장에서는 인상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한국 축구의 전설’ 박지성과 차범근이 제4회 아시안드림컵 자선축구 경기에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시대를 초월한 이 멋진 장면에 팬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나는 이 순간 1993년 2월이 떠올랐다. 한국 축구의 영웅이 한 어린 초등학생에게 상을 주며 격려했고 그로부터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 한 그라운드에 서게 됐다는 점은 참 아름다웠다. 오늘은 그동안 우리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바로 그 상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차범근 축구상이다. 초등학생 박지성이 1993년 한국 축구의 영웅 차범근에게 받았던 바로 그 상 말이다.

독일행 비행기에 오른 차범근의 다짐

1979년 어린 차범근은 축구선수로서는 누구나 밟아보고 싶은 독일 무대에 진출하는 비행기에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선수로서의 성공도 중요했지만 그의 목표는 그 이상이었다. ‘성공하고 돌아와 반드시 한국 축구에 이바지하자. 후진을 양성하자.’ 독일에서 유소년 선수를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모습을 본 차범근의 이런 마음은 더욱 굳어졌다. 독일에서 선수로 뛰면서 직접 한국의 유소년을 지도할 수는 없지만 장학금을 주며 그들의 꿈을 도울 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럽 무대에서 큰 성공을 거둔 그는 1988년 드디어 이 목표를 이루게 됐다. 당시 소년한국일보 김수남 사장과 연락이 닿은 것이다. 평소 고국의 아이들을 돕고 싶었던 차범근에게 김수남 사장이 말했다. “이제 현역 생활도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을 텐데 우리 한 번 손 잡고 제2의 차범근을 꿈꾸는 아이들에게 장학금과 상을 수여하는 게 어떨까요.”

차범근은 흔쾌히 동의했다. 어린 시절 가난한 환경 탓에 마음껏 먹지도 못하고 뛰던 차범근으로서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렇게 1988년 소년한국일보, 일간스포츠와 공동으로 유소년을 위한 상을 만들게 됐다. 이전까지 성인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시상식은 종종 있었지만 오직 어린이들을 위한 정기적인 시상식은 최초였다. 마음 내키는대로 주는 상이 아니라 엄정한 심사를 거쳤다. 초등학교 축구연맹과 대한축구협회의 1차 심사를 통해 한해 동안 각종 초등학교 축구대회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를 1차적으로 선발하면 차범근을 비롯해 대한축구협회 부회장과 경기국, 유소년 축구 지도자 및 연맹 관계자, 한국일보와 일간스포츠 기자 등 전문가 집단에서 최종적으로 수상자를 선발하는 방식이었다. 이들은 기량은 물론 체격 조건과 팀 공헌도, 성장 가능성 등을 모두 살폈다.

그렇게 1988년 제1회 차범근 축구상이 제정돼 울산전하초등학교 서원광이 대상을 받았고 손명길(광명광덕초)과 이용우(안동서부초)가 우수상, 박성이(숭신초)와 이동욱(인천동북초), 송정선(청주청남초) 등이 장려상을 수상했다. 이들은 기대만큼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이용우는 수원공고 시절 고교 무대를 평정한 뒤 K리그 수원삼성에 입단하기도 했다. 이용우는 수원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뒤 K2리그 수원시청으로 옮겨 잠시 활약한 뒤 은퇴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99년 제2회 차범근 축구상 대상 수상자 이범수(제천남당초)와 우수상 수상자 김범준(서울전농초)도 2000년 K리그 울산현대에 입단했다. 특히 제2회 차범근 축구상 장려상 수상자였던 정석근(마산합성초)은 이후 U-20 대표팀과 U-23 대표팀을 거치는 등 어느 정도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차범근 축구상은 점점 자리를 잡아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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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 1993년 차범근 축구상을 수상한 박지성의 모습. 한국 축구의 전설들은 이렇게 처음 만났다. 차두리가 아니다. 차범근이다.>

이동국과 박지성, 그리고 기성용

1991년 제4회 차범근 축구상을 수상한 선수 중 마침내 초대형 스타로 성장한 선수가 나왔다. 바로 이동국(포항포철동초)이다. 당시 이동국은 어린 나이에도 침착한 골 결정력으로 한국 축구 계보를 이어갈 선수로 큰 기대를 모았고 실제로 기대 만큼 성장하며 K리그 클래식 무대에서 개인 최다 득점 및 공격 포인트 기록을 세우며 전설이 됐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이동국이 장려상을 수상할 때 대상을 받은 선수는 따로 있다는 점이다. 당시 대상 수상자는 이동국이 아니라 김승현(장흥초)이었다. 김승현 역시 이후 축구 명문 금호고를 거치면서 K리그 전남드래곤즈 등에서 무려 121경기에 나서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김승현은 선수 생활 막판 승부조작에 연루돼 징계를 당했지만 이후 법정에서 무죄가 선고돼 누명을 벗고 현재는 은퇴한 상태다. 1991년 수상자 중 두 명이나 성인 무대에서 오랜 시간 활약할 만큼 성공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2년 제5회 시상식에서는 한국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선수가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바로 수원세류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박지성이다. 당시 금석배 전국초등학교대회에서 팀의 주장을 맡아 준우승을 이끌었던 박지성은 장려상을 수상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어린 박지성은 시상식장에서 자신의 우상이자 영웅인 차범근과 기념 사진을 찍으며 꿈을 키워나갔다. 아마도 훗날 이 어린 선수가 차범근의 아성과 견줄 새로운 전설로 성장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차범근 축구상은 매년 미래의 스타를 발굴하는 ‘매의 눈’이 됐다. 이듬해인 1993년 대상 수상자는 인천만수북초에 재학 중이던 최태욱이었고 1994년 제7회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은 김두현(동두천초)도 성장해 훗날 국가대표로도 활약을 펼쳤다. 1997년 제10회 시상식에서는 하대성(인천간석초)이 대상을 받기도 했다. 1993년 대회부터는 지도자상이 신설됐다.

2000년 제13회 시상식에서는 또 한 명의 새로운 미래의 스타가 등장했다. 바로 기성용이었다. 당시 순천중앙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던 기성용은 팀을 소년체전 우승으로 이끌고 MVP에 뽑히며 큰 기대감을 안겼다. 160cm의 키에 45kg의 체중으로 또래 아이들보다 체격도 컸고 미드필더임에도 초등학교 대회에서 한 시즌 동안 18득점 12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이미 초등학교 수준을 넘어선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때부터는 여자축구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초등학교 여자선수도 수상자에 포함했다. 또한 2002년 제14회 대상 수상자는 최초로 골키퍼가 선정되기도 했다. 서울 숭곡초등학교 정원식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당시 정원식은 177cm로 엄청난 신장을 이용해 골문을 지켰고 세트피스 상황에서는 공격에 가담해 골까지 뽑아내며 상상을 초월하는 활약을 선보였다. 하지만 정원식은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면서 잊혀지고 말았고 오히려 같은 시기 우수상을 수상한 서정진(대구화원초)이 이후 더 많이 알려지게 됐다.

차범근 축구상, 협회와 손을 맞잡다

잔잔한 감동을 줬던 수상자도 있다. 바로 2004년 제16회 차범근 축구대상을 수상한 서울대동초의 정찬일이 그 주인공이다. 당시 정찬일은 시상식을 마친 뒤 곧바로 관계자를 찾아가 봉투를 내밀었다. 장학금으로 받은 돈 50만 원 전부를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기탁한 것이었다. 비록 어른들이 보기에 큰 돈은 아니었지만 초등학생에게는 군것질을 하기에 적지 않은 이 돈을 성큼 낸 뒤 정찬일은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께서 좋은 일하라고 웃으며 말씀하셨어요. 축구를 하면서 이렇게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아요.” 현재 정찬일은 대학 무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후 제17회 대상 수상자 이종호(광양제철초)와 제18회 장려상 수상자 문창진, 제19회 우수상 박정빈(이상 광양제철남초) 등도 현재까지 성장하고 있다. 특히 제20회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은 당진계성초의 서명원은 역대급 수상자로 꼽힌다. 당시 칠십리배 춘계유소년연맹선수권대회 결승에서 혼자 50m를 돌파하며 수비수 세 명을 따돌리고 골을 뽑아낸 서명원은 엄청난 화제를 모으며 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고 현재 대전시티즌을 이끌고 있다.

일부에서 한국 축구계의 도움 없이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진출했다고 알고 있는 백승호와 이승우도 사실은 차범근 축구상 수상자 출신이다. 서울대동초에 재학 중이던 백승호는 제22회 대상 수상자였고 이승우(서울대동초)도 이듬해 우수상을 수상했었다. 특히 백승호는 초등학교 주말리그 18경기에 나서 30골을 넣으며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대상을 수상했다. 이렇듯 차범근 축구상은 1988년 제정된 이래 무려 25년 동안 그 명맥을 유지하며 한국 축구 꿈나무 후원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미 성공한 선수에게 상을 주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이렇게 될성 부른 떡잎을 알아보고 그들을 독려하는 상을 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범근은 처음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때 했던 그 다짐을 지금까지도 지켜오고 있다. 대상 장학금은 2백만 원에 불과하지만 금액을 떠나 초등학교 선수들에게 차범근 축구상만큼 영예로운 상은 없다. 그만큼 오랜 세월이 흐르며 차범근 축구상은 권위를 갖췄다.

2009년 시상식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막 취임한 조중연 대한축구협회장은 파격적으로 시상식 현장에 방문했다. 이때까지 협회는 차범근 감독과 관계가 소원했지만 대화합 차원에서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내년부터는 이 권위 있는 차범근 축구상 시상식을 축구회관에서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껏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국일보 사옥이나 호텔 등에서 열었던 시상식을 한국 축구의 상징인 축구회간에서 열자고 제안한 것이다. 차범근 감독은 껄껄 웃었다. “이제서야 상의 의미가 격상된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조중연 회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함께 참석한 유소년축구연맹 김휘 회장에게도 또 다른 제안을 했다. “내년부터는 유소년 축구재단 기금으로 차범근 축구상 수상자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줄 것을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이때까지 독자적으로 운영되던 차범근 축구상이 협회의 후원을 받게 된 것이다. 이듬해부터 차범근 축구상 시상은 협회 1층에서 이뤄지기 시작했고 협회는 수상자들의 해외 유학까지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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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 1993년 차범근 축구상 시상자와 수상자는 세월이 흘러 다시 이렇게 만났다. (사진=SBS 런닝맨 캡쳐화면)>

차범근과 박지성, 그들이 함께 뛴 의미

지난 2일 차범근과 박지성이 한 그라운드에서 만난 건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었다. 영웅으로부터 상을 받은 어린 학생은 이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뒤 현역에서 물러나 또 다른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는 그때 상을 건넨 영웅을 그라운드로 초대해 함께 뛰었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건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었다. 또한 그때 그 영웅은 여전히 또 다른 누군가를 도우며 응원하고 있다. 이런 게 바로 한국 축구가 돌아가는 원동력 아닐까. 차범근은 언젠가 시상식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 저에게 훗날 ‘한국 축구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을 하면 저는 ‘축구교실과 축구상을 통해 재목들을 키워 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겠습니다.” 독일에서의 활약을 꼽을 것이라고 생각해지만 의외였다. 이동국은 “차범근 축구상을 받은 뒤 축구선수로 꼭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밝힌 적도 있다. 한국 축구 꿈나무들에게 큰 힘이 되는 이 전통 있고 영예로운 시상식이 오래 오래 지속되길 바란다. 이런 영웅이 있고 이런 그의 이름을 건 상이 있다는 건 참 흐뭇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