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우리는 볼 품 없어 보이는 오래된 건물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최대한 세련되게, 최대한 멋지게 바꿔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결국 한국 축구는 물론 한국 정치사에도 한 획을 그었던 동대문운동장도 이런 변화의 바람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는 늘 왜 누 캄프 같은 역사적인 경기장이 없는지 푸념하고 있지만 우리 스스로 세련미만을 추구하며 이런 역사를 훼손하고 말았다. 오늘 동대문 디지털 플라자가 문을 연단다. 하지만 나는 이 멋진 건물의 탄생이라는 기쁨보다는 우리의 오래된 추억을 담은 동대문운동장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오늘은 한국사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동대문운동장에 대한 추억을 칼럼으로 담아봤다. 이곳은 단순히 오래된 흉물이 아니었다.

순종의 노제와 김구의 장례식

1926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세상을 떠났다. 창경궁에서 상복을 입은 백성들에 의해 순종의 시신이 당시에는 신식군대인 별기군이 훈련하던 훈련원, 지금의 동대문운동장 부지로 옮겨져 노제가 치러졌다. 이곳에 모인 수많은 백성은 노제를 지내고 대한 독립을 외쳤으니 이게 바로 6·10 만세운동의 기원이다. 또한 당시 이곳에서 거행된 순종의 노제 장면은 지금도 왕실의 장례 절차를 연구할 수 있는 역사적인 기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순종뿐 아니라 1947년 몽양 여운형 선생의 영결식도 이곳에서 열렸다. 당시 동대문운동장에서 여운형 선생의 관을 운구한 이가 바로 ‘마라톤 영웅’ 손기정이었다. 2년 뒤 백범 김구 선생의 장례식이 열린 곳도 바로 동대문운동장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후 최초로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열흘 동안 동대문운동장 주변에 무려 200만 명의 인파가 가득 몰려 애도의 물결을 이뤘다. 백성이 모일 이렇다 할 공간이 없던 시절 국가적인 행사는 늘 동대문운동장에서 치러졌다.

이우 왕자의 마지막 가는 길

대한제국 황손이자 의친왕의 아들인 흥영군 이우 왕자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과의 결혼을 강요 받았다. 하지만 그는 조선 여성과 결혼하며 조선 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지켰다. 일본군에 편입돼 1945년 일본 정부로부터 히로시마 전출을 명령받은 이우 왕자는 설사약을 먹으며 버티고 전역을 신청하는 등 전출을 거부했지만 결국 이를 거절당하고 일본 히로시마로 떠났다. 그런데 이우 왕자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20세기 인류 대재앙을 겪고 말았다. 아침 출근 도중 원자 폭탄의 투하로 피폭되고 말았고 결국 운명하고 만 것이다. 곧바로 운현궁으로 운구된 뒤 방부 처리된 왕자의 유해는 1945년 8월 15일 동대문운동장으로 옮겨졌다. 고인의 장례식이 바로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일왕 히로히토가 항복을 선언하며 독립을 맞고 세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국민들은 동대문운동장에 모여 광복을 맞은 기쁨과 함께 이우 왕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도했다. 동대문운동장에는 이렇듯 우리 민족의 한이 서려있다.

경평대항축구전

유럽축구를 보면서 우리는 왜 치열한 라이벌전이 없을까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성과 평양이 맞붙었던 ‘경평대항축구전’은 유럽의 어떤 라이벌전보다도 뜨거운 열기를 자랑했었다. 경성과 평양을 오가며 열렸던 이 경기는 2회 대회가 열린 1930년부터 경성의 홈으로 동대문운동장을 쓰기 시작했다. 2회 대회 당시 사흘 연속으로 치러진 경기에 매번 2만여 명에 달하는 관중이 몰려들었다. 해방 후 1946년 재개된 경평전이 열린 동대문운동장은 말 그대로 ‘축구 전쟁’이 펼쳐졌다. 양팀 관중이 충돌하는 바람에 경찰이 공포탄을 쏘며 진압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고 경기가 과열되면서 심판 매수 의혹까지 불거졌다. 결국 6·25 전쟁 이후 더 이상 동대문운동장에서 이 라이벌전이 열리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경평전’은 한국 축구의 전설로 남아 있다. 경성과 평양 팬들이 뜨거운 열기로 충돌했던 동대문운동장은 ‘경평전’이라는 한국 축구 최대 라이벌전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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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신탁 통치 결사반대 시민대회의 모습

찬탁, 반탁 논란 집회

동대문운동장은 우리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무척이나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1945년 12월 19일 동대문운동장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몰렸다. 독립 후 임시정부 요인을 환영하는 성대한 환영식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김구 주석을 비롯해 이승만 박사 등 요인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등장하자 군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한 달 뒤에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좌·우익의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모스크바 3상 회담에서 한반도에 대한 결정문이 발표된 직후 약 10만 명이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나뉘어 집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모여 목소리를 높이자 곧바로 ‘3상 결정 절대 지지 대회’가 열렸다. 이들은 동대문운동장을 시작으로 종로와 서대문, 광화문 등을 행진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웠다.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동대문운동장에서 북한군은 성대한 자축 행사를 열기도 했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던 시절 동대문운동장은 우리의 아픔을 모두 품은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임국찬의 실축

1960년대 한국 최고 미드필더라는 찬사를 받던 임국찬. 그는 1969년 태극마크를 달고 동대문운동장에 섰다. 1970년 월드컵을 앞두고 아시아와 오세아니아가 섞여 월드컵 지역 예선을 치르던 때였다. 일본, 호주와 한 조에 속했던 한국은 호주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면 본선 티켓을 두고 한 번 더 경기를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1-1로 호주와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던 후반 20분 이회택이 결정적인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키커는 최고의 미드필더이자 킥 능력이 뛰어난 임국찬이었다. 하지만 임국찬이 날린 회심의 슈팅은 그대로 호주 골키퍼의 가슴에 안기고 말았고 결국 한국은 이후 추가 득점에 실패했다. 1-1 무승부로 경기를 마친 한국은 1승 2무 1패로 2위에 머물며 월드컵 본선 티켓을 호주에 내주고 말았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역적이 된 임국찬은 결국 쏟아지는 비난을 이기지 못하고 현역에서 물러난 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야만 했다. 동대문운동장은 환희의 순간도 함께 했지만 이렇게 누군가에게는 통한의 장소로 기억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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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한의 실축’을 하는 임국찬의 모습. 임국찬은 이 실축 이후 엄청난 비난을 받고 은퇴한 뒤 미국으로 떠났다.

펠레와 에우제비오가 뛰었던 곳

1972년 6월 2일 오전부터 동대문운동장은 엄청난 인파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축구 황제’ 펠레가 산토스 유니폼을 입고 한국 대표팀과 친선전을 치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예매 문화가 자리 잡지 못했던 당시 펠레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던 이들이 오전부터 경기장 앞 매표소에서 진을 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경기 시작을 알리는 저녁 7시 동대문운동장은 3만 명의 관중으로 꽉 들어찼다. 심지어 국회에서 농성 중이던 국회의원들도 몰래 빠져 나와 경기장 관중석에 앉아 있을 정도였고 당시 1천 원이던 일반석 입장권은 3천 원까지 치솟기도 했다. 동대문운동장 주변에서는 손수건에 펠레 얼굴을 새겨 파는 이들도 있었다. 이보다 2년 전인 1970년 9월에는 우리가 흔히 ‘유세비오’라고 부르던 에우제비오가 포르투갈 명문 클럽인 벤피카 소속으로 동대문운동장을 찾아 40m 중거리 슈팅을 골로 연결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동대문운동장은 펠레와 에우제비오도 뛰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차범근이 보여준 ‘7분의 기적’

지금은 없어져버린 박스컵이 열렸던 1976년 9월 11일 동대문운동장에서 한국 축구사에 길이길이 전설로 남겨질 순간이 벌어졌다. 한국은 당시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후반 종료 7분전까지 1-4로 뒤지며 패색이 짙었다. 수중전에 특히 강했던 말레이시아는 비가 오던 이날 전반전에만 세 골을 뽑아내며 한국을 압도했다. 후반 박상인이 한 골을 추가했지만 이미 승부는 기울었다. 하지만 이때 등장한 영웅이 훗날 ‘차붐’으로 불리게 된 불세출의 스타 차범근이었다. 차범근은 7분 동안 내리 3골을 몰아넣으며 팀을 패배의 수렁에서 구해냈다. 사실상 경기가 끝난 것이라며 자리를 뜨던 관중도 차범근이 한 골씩 더 뽑아낼 때마다 환호를 보내더니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하자 이 믿을 수 없는 순간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료화면을 구할 수 없어 지금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다. 이 날의 주인공이 차범근이었다면 ‘전설의 무대’는 바로 동대문운동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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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동대문운동장에서는 역사적인 프로축구 개막전이 열렸다. (사진=프로축구연맹)

프로축구의 시작

한국은 프로축구가 탄생한 이후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월드컵 본선 무대에 서고 있다. 한국 축구가 발전하는 데는 프로축구의 출범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시작 역시 바로 동대문운동장이었다. 1983년 5월 8일 동대문운동장에서는 유공과 할렐루야의 슈퍼리그 개막전을 시작으로 역사의 서막을 열었다. 이날 경기에는 무려 23,000여 명의 관중이 들어차 박윤기가 뽑아낸 역사적인 프로축구 첫 골의 장면을 함께했다. 하루에 두 경기씩 열리는 등 지금으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던 시절, 동대문운동장은 꾸준히 프로축구 경기가 열렸다. 일화천마가 1989년부터 1995년까지, LG치타스가 1990 년부터 1995년까지 동대문운동장을 홈으로 사용했고 유공코끼리 또한 1991년부터 1995 년까지 동대문운동장을 누볐다. 하지만 동대문운동장은 2000년 10월 아디다스컵 결승전 수원-성남전을 끝으로 더 이상 프로축구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 이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서정원이 역사적인 마지막 득점 선수다.

붉은악마의 출발점

조직적인 응원 문화 없이 그저 축구장에서 남행열차를 부르거나 “잘한다 우리편”을 외치던 1993년. PC통신 하이텔에서는 같은 취미를 모인 이들이 모였다. 축구를 사랑하는 이들의 ‘하이텔 축구동’이었다. PC통신을 통해 한국 축구의 발전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던 이들은 고민 끝에 척박한 한국의 축구 응원 문화를 바꿔보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일본이 J리그를 출범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터라 2002 월드컵 유치전에서 한 걸음 밀린 상황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들이 ‘오프라인’에서 처음 모인 곳이 바로 동대문운동장이었다. 당시 평일 오후 5시에 열리는 적막한 분위기의 프로축구 경기장에 깃발과 북을 들고 나타난 이들이 바로 ‘하이텔 축구동’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초라하게 몇몇이 동대문운동장에 모여 어설프게 시작했지만 이는 훗날 한국 축구의 응원 문화를 뒤흔든 위대한 첫걸음이었다. 지금의 붉은악마와 K리그를 비롯한 각 구단의 조직적인 응원 문화는 이렇게 동대문운동장에서 처음 시작됐다.

한국 축구 스타의 등용문

축구선수들에게는 “동대문운동장의 잔디위에서 뛰어 보는 것이 소원”이던 시절이 있었다. 이 경기장에서 숱한 축구선수들이 더 큰 꿈을 위해 땀을 흘렸다. 2002년에 동대문운동장에서 3군 사관학교의 체육대회 마지막 축구경기가 열렸으니 추측컨대 1985년생까지의 모든 선수는 이곳에서 꿈을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경기장에서는 A매치뿐 아니라 전국체전과 소년체전, 각종 연령별 축구대회가 모조리 열렸었다. 우리가 아는 김용식부터 김호, 이회택, 차범근, 홍명보, 황선홍, 서정원, 이영표, 박지성, 박주영까지 동대문운동장 잔디를 밟지 않은 선수가 없다. 특히 박지성은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2000년 4월 라오스와의 아시안컵 1차 예선 경기에서 19세의 나이로 A매치 데뷔전을 치르기도 했다. 1967년 메르데카컵에 출전해 우승을 거머쥔 한국을 치하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우승축하 선물로 선수단이 원하는 걸 주겠다고 하자 선수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동대문운동장에 야간 조명 시설을 설치해 주세요.” 동대문운동장은 축구인들이 하나 하나 만들어 간 곳이나 다름 없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특별한 추억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축구부 생활을 했던 친구들과 함께 동대문운동장을 자주 갔었다. 흔히 ‘창갈이’라고 하는 축구화 수선을 위해서였다. 당시 동대문운동장 주변을 가득 채웠던 체육 용품점에서는 손수 축구화 창을 갈아주고 축구화를 선수 발에 맞게 고쳐주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허름한 체육 용품점 할아버지의 기술에 놀랐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당시 동대문운동장 주변 체육 용품점에서는 축구 용품뿐 아니라 스포츠에 관한 모든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동대문운동장이 2003년 풍물시장으로 바뀌면서 이런 체육 용품점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지하철역 입구에서부터 쭉 늘어섰던 김밥 파는 아주머니들도 인상적이었다. 경기 시작 전에는 1천 원이던 김밥이 경기가 끝난 뒤에는 500원에 팔리던 것도 생생한 기억이다. 지금은 유치하게 느껴질 뿔피리나 망원경도 경기장 앞 노점상의 판매 단골 품목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동대문운동장 앞에서 이런 구수한 풍경은 볼 수 없게 됐다.

우리는 옛것을 너무 하찮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한국 축구는 물론 한국 정치사에서도 엄청난 배경이 됐던 동대문운동장도 흉물스럽다며 철거해 버린 게 바로 우리다. 지금도 활발히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는 선수들부터 백발이 된 축구 원로, 이제는 고인이 된 전설들까지 동대문운동장은 한국 축구의 모든 땀방울이 머금어져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오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라는 이름으로 개관식을 연다. 물론 화려하고 웅장하고 새로운 것도 좋지만 이제는 오래된 역사에 대해서도 아끼는 마음을 가지는 건 어떨까. 잠실종합운동장이 생기고 동대문운동장이 찬밥이 된 것처럼, 서울월드컵경기장이 탄생하고 잠실종합운동장이 흉물이 된 것처럼 언젠가는 서울월드컵경기장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이렇게 새것만을 찾는다면 우리는 평생 누 캄프 같은 역사 깊은 경기장을 부러워만 할 수밖에 없다.

그저 새것이 아니라고 해서 우리의 영광스러웠던 시절과 때론 슬픈 역사까지도 모두 함께하고 있는 곳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동대문운동장은 한국 축구의 모든 걸 기억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동대문운동장을 잊은 건 아닐까. 1924년 경성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알려진 뒤 서울운동장으로, 그리고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한국 축구의 뿌리가 됐던 이곳이 최신식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로 문을 여는 오늘, 나는 쥐포 냄새 구수하던 동대문운동장이 떠오른다. 성동원두, 동대문운동장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