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맨발의 꿈’은 너무나 극적이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선 한 남자가 돈이나 벌기 위해서 희망도 없는 신생 독립국에 갔다가 여러 사건을 겪은 뒤 그곳의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쳐 국제대회에서 우승 한다는 믿기지 않는 내용을 영화에 담았다. 하지만 이는 실화다. 2010년 개봉한 이 영화는 엄청난 흥행 돌풍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줬다. 그리고 4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아직 영화는 끝나지 않았다. ‘맨발의 꿈’을 이루기 위한 이 소년들의 도전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맨발의 꿈’과 그 이후 이야기에 대해 준비했다.

전과자가 된 꿈 많던 축구선수 김신환

김신환은 나름대로 잘 나가는 축구선수였다. 한양공고 시절에는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도약한 뒤 전국대회를 제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대학 진학 시기에 문제가 생겼고 결국 고등학교 졸업 후 2년 동안 무적 신세로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기다리던 실업팀 창단도 흐지부지 되면서 김신환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결국 김신환은 소속팀을 찾는 데 2년의 시간을 보내다가 해병대에 지원했다. 그는 허정무와 김성남, 김강남 등과 해병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고 제대 뒤 실업팀 현대자동차에 입단했지만 변변치 않은 활약에 머물고 말았다. 김신환은 1987년 현역에서 물러나 현대자동차 직원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성인 무대에서 보여준 게 없는 그는 지도자 생활을 할 만큼의 인지도도 없었고 그의 축구인생은 이렇게 사실상 끝난 것처럼 보였다.

꿈을 잃은 채 적성에도 맞지 않는 사무실에 앉아 시간만 축내던 그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말았다. 결국 도박에 손을 대고 만 것이다. 사채까지 끌어다 썼더니 순식간에 도박 빚은 4천만 원으로 늘었고 건달들에게 쫓지는 신세까지 됐다. 결국 김신환은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야 했다. 그가 선택한 곳은 인도네시아였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그는 오히려 빚만 더 늘었다. 유리 가공업과 인형 납품업, 목재업 등을 번번이 실패하면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1999년 모든 걸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오자 그를 기다리는 건 다름 아닌 형사들이었다. “김신환 씨죠? 저희와 같이 가 주셔야게습니다.” 갚지 못한 돈이 많아 결국 그는 6개월이라는 시간을 교도소에서 보내야 했다. 꿈 많던 축구선수는 어느덧 이렇게 전과자가 돼 있었다.

출소한 그는 결국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하고 말았다. 반겨주는 이도 없었고 더 이상 갈 곳도 없었던 그는 인도네시아로부터 동티모르가 독립한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으로 동티모르로 향했다. 그리고 지인들에게 겨우 겨우 부탁해 빌린 돈으로 동티모르에서 축구 용품점을 시작했지만 이제 막 독립한 가난한 나라에서 축구 용품은 사치에 가까웠다. 그가 동티모르에 차린 이 가게는 결국 6개월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김신환에게는 이제 남은 돈이 한 푼도 없었다. 하지만 가게 홍보를 위해 동네 아이들을 상대로 무료 축구 레슨을 자주 연 덕분에 그를 찾는 이들은 꾸준했다. 더군다나 동티모르는 포르투갈로부터 무려 450년간 식민 지배를 당하다가 독립한 뒤 불과 9일 만에 다시 인도네시아의 침공을 받아 강제 점령 당하는 등 내전을 거쳐 21세기 최초의 독립국가가 된 가난한 나라였다. 김신환은 오로지 맨발로 축구를 하며 희망을 찾는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동티모르의 기적 같은 우승과 ‘맨발의 꿈’

이때부터 사비를 털어 아이들에게 축구화와 유니폼 등을 제공하고 훈련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단 한 푼도 받지 않고 하루에 오전과 오후 두 시간씩 아이들 지도에만 전념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정이 부족한 동티모르 정부에서 김신환 감독의 정성에 감동해 2만 평의 축구시설 부지를 제공했지만 워낙 돈이 없어 이 곳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아이들과 함께 뛰며 공을 차는 게 전부였고 아이들의 나약한 정신력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했다. 몇 번 해보다가 힘들면 그저 훈련에 빠지고 축구를 그만두려는 아이들에게 한국식 정신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김신환 감독의 축구 수업이 인기를 끌다보니 500여 명의 아이들이 테스트를 받기 위해 줄을 서기도 했다. 공 차는 것 외에는 즐길 게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김신환 감독은 희망 그 자체였다. 그의 소식을 듣고 한국의 기업과 독지가, 대사관 등에서도 후원이 시작됐다.

결국 김신환 감독이 이끄는 동티모르 유소년 팀은 영화 ‘맨발의 꿈’에 나온 것처럼 2004년 일본 히로시마 리베리노컵 국제유소년축구대회에서 6전 전승의 성적으로 믿기지 않는 우승을 차지했다. 비록 친선전 성격의 대회였지만 단 1승도 어려울 것이라던 신생 독립국이 일본과 브라질 등을 제치고 우승했다는 건 일대 사건이었다. 동티모르 현지에서는 마치 월드컵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축제가 열렸다. 동티모르 독립 이후 처음으로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우승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영화에서는 여기까지 소개됐지만 이후에도 김신환 감독의 동티모르 유소년 팀은 승승장구했다. 이듬해 리베리노컵에서 우승하며 2연패를 기록했고 2007년 중국 쿤밍에서 열린 유소년대회 우승, 2008년 말레이시아 유소년대회에서도 8전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2012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지역예선 1위에 오르기도 했고 경주화랑대기 전국초등학교 유소년축구대회에서도 7전 전승 무실점으로 우승을 거뒀다.

동티모르에서 김신환 감독은 이제 한국에서 히딩크 감독이 받는 대접을 받고 있다. 취객의 습격으로 다리를 다쳤을 때는 이 소식이 현지 신문 1면에 실리기도 했고 동티모르 대통령은 수시로 김신환 감독을 초청해 대화를 나눌 정도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2003년부터 아이들을 지도해온 김신환 감독은 싱가포르에서 거액의 연봉을 주겠다는 스카우트 제의까지 단칼에 거절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나락에 떨어진 순간 동티모르에서 아이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전 미쳤을 것 같아요. 이곳에 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됐어요. 마음을 비우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사는 삶이 훨씬 행복하죠. 저는 희망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아이들을 통해서 희망과 열정을 가지게 됐어요. 제게 희망을 심어준 윌 아이들을 저는 절대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스승의 나라에 온 동티모르 아이들

하지만 김신환 감독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이 아이들이 축구선수로 더 오랜 시간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동티모르의 아이들은 인도네시아 프로팀에 진출하는 걸 최고의 성공으로 여기고 있을 뿐 더 큰 꿈을 꿀 환경이 아니었다. 김신환 감독이 가르치던 선수이자 영화 ‘맨발의 꿈’에서 알렉숀 역할을 맡아 연기까지 선보였던 알렉스라는 아이는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축구가 아니면 인생을 바꿀 기회가 없는 이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에게 더 큰 무대를 선보이고 싶었다. 고민 끝에 2012년 김신환 감독은 개인적인 친분으로 2008년부터 동티모르에 축구화와 축구공 등을 지원했던 전북 군장대학 이승우 총장에게 다시 한 번 부탁했다. “우리 아이들이 한국에서 축구를 배울 수 있게 도와주세요.” 군장대 측에서도 김신환 감독의 부탁을 듣고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군장대학에서는 2012년 초 직접 동티모르로 날아갔다. 여건이 좋지 않아 직접 한국으로 날아와 면접을 치를 수 없는 학생들을 배려해 동티모르 현지에서 입학 면접을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동티모르 체육부 장관도 직접 군장대학 관계자를 만나 고개를 숙였다. “우리의 열악한 상황을 이해해 주세요. 이 아이들은 동티모르의 희망입니다.” 평균 월급이 우리 돈으로 채 2만 5천원이 되지 않는 가난한 나라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온다는 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결국 기적은 일어났다. 동티모르 한국 대사관은 일사천리로 유학수속을 도왔고 유학생들의 학비와 체류비, 항공료 등은 군산지역 한 건설업체가 모두 대주기로 한 것이다. 김신환 감독이 손가락질을 받으며 시작한 일이 이제는 여기저기 퍼져 긍정적인 효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2012년 동티모르에서 김신환 감독의 지도를 받던 마리아누스와 알베스는 군장대학 생활체육과에 입학해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한국 축구 유학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영화 ‘맨발의 꿈’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마리아누스와 알베스는 입국 당시 한국 나이로 만 18세라 국제이적동의서(ITC)를 발급받지 못해 잠시 경기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생일이 지난 2012년 6월 ITC가 발급돼 대한축구협회에 선수 등록을 마치고 U리그에도 다른 한국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출전할 수 있었다. 이들은 2012년 9월 꿈에 그리던 스승의 나라 그라운드를 밟을 수 있었고 군장대학에서 생활한 2년 동안 최선을 다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훈련에 임했고 한국 문화에도 빠르게 적응했다. 주말이면 한국 동료들의 집에 가 함께 생활하며 한국어를 익혔다. 무엇보다 동티모르 축구를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선수들에 비하면 기량이 눈에 띄게 뛰어난 편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언제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갈지는 모르지만 이들은 “이 귀중한 기회에 많이 배워 고국에서 우리 같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일념이 있었다.

가난하다고 꿈까지 가난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한국에서 꿈같은 대학 생활을 마친 이들에게 또 한 번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전해졌다. 4부리그격인 챌린저스리그 전주시민축구단에서 이 둘을 영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테스트를 거친 마리아누스와 알베스는 그렇게 바로 어제(19일) 그토록 꿈에 그리던 일을 이루고 말았다. 비록 4부리그지만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더 체류하며 축구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동티모르 U-15와 U-17, U-20 국가대표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동티모르 축구 국가대표로 활약하고 있는 마리아누스와 알베스는 감격적인 챌린저스리그 입단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감독님의 고향에서 이렇게 선수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꿈만 같아요. 한국에서 축구를 배워서 고국에 전하고 싶어요. 더 열심히 해서 언젠가는 K리그 클래식 무대에도 서보고 싶습니다.” 동티모르에서 시작된 ‘맨발의 꿈’이 조금씩 현실이 되고 있는 모습이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우리는 이제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한 팀에서도 동료를 향해 “저 녀석 삼촌이 우리 아버지를 총으로 쏴 죽였다”며 주먹질을 하던 혼란스럽고 가난한 독립 국가를 이제 우리가 축구로 도울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김신환 감독 혼자 시작한 이 무모한 도전은 이제 하나둘 현실이 됐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더욱 큰 꿈을 향해 하고 있다. 김신환 감독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도움을 받아 현재 동티모르 전역에 5개의 유소년 축구팀을 운영하고 있고 처음 30여 명에 불과했던 아이들은 이제 300여 명으로 늘었다. 동티모르 대통령과 함께 축구학교 설립도 구상 중이고 현지에서는 한국 축구 열풍이 불어 한국어 강의까지 개설됐다.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기적은 이렇게 점점 현실이 돼가는 중이다.

인생의 나락을 경험한 김신환 감독은 이제 동티모르 아이들의 희망이 됐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쯤 동티모르의 많은 아이들은 여전히 꿈도 없이 하루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아마 챌린저스리그에 입단해 동티모르 축구의 희망이 된 마리아누스와 알베스도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한국 축구가 우리보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이웃들에게 이처럼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감동을 자주 선사했으면 좋겠다. 또한 비록 4부리그지만 머나먼 스승의 나라에 와 도전하는 그들의 ‘맨발의 꿈’을 응원한다. 동티모르는 여전히 110만 국민 중 절반이 하루 1달러로 사는 가난한 나라지만 영화 ‘맨발의 꿈’ 주인공 대사처럼 가난하다고 꿈까지 가난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