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정말 실제 축구 경기보다도 더 살이 떨린다. 2014 브라질월드컵 본선 조추첨을 보며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한 팀씩 호명될 때마다 지구촌 어딘가에서는 탄식을 내뱉었을 것이고 또 다른 어딘가에서는 환호했을 것이다. 대학교 시절 미팅을 나가 소지품을 꺼내 파트너를 정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나는 소지품으로 붉은악마 회원카드를 내밀었었다. 그때 마음에 들지 않던 그녀가 내 소지품을 만지작 거릴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다. 특히 조추첨에서 포르투갈과 러시아, 마지막 두 개의 공이 남아 있던 순간에는 마치 여자친구가 내 핸드폰 검사를 할 때 만큼이나 떨렸다. 잘못한 게 없어도 이럴 때면 늘 긴장되는 법이다. 조추첨 두 번 했다가는 사람 잡겠다.

좋은 대진인 건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에게는 상당히 좋은 대진이다. 이미 여러 언론에서 분석한 것처럼 우리 조에는 톱시드 중 스위스 다음으로 그나마 수월한 벨기에가 뽑혔고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남미 팀도 없다. 이동거리도 짧고 미리 정한 베이스 캠프 위치도 최적이다. 조추첨을 통해 우리가 벨기에와 알제리, 러시아 등과 한 조에 속한 순간부터 ‘꿀조’냐 아니냐를 놓고 다각도의 분석이 이뤄지고 있는데 나는 이런 심도 깊은 분석은 다 집어 치우고 딱 한 마디만 하고 싶다. “그럼 나머지 7개 조 중 어디 들어갈래?” 스페인, 네덜란드, 칠FP 만난 호주가 바꿔 달라면 바꿔줄 건가? 아니면 우루과이와 잉글랜드, 이탈리아와 한 조가 된 코스타리카가 바꿔달라면 바꿔줄 건가?

* 만약 대한민국이 다른 조에 편성됐다면?
A조 : 브라질, 크로아티아, 대한민국, 카메룬
B조 : 스페인, 네덜란드, 칠레, 대한민국
C조 : 콜롬비아, 그리스, 코트디부아르, 대한민국
D조 : 우루과이, 잉글랜드, 이탈리아, 대한민국
E조 : 스위스, 에콰도르, 프랑스, 대한민국
F조 : 아르헨티나, 보스니아, 대한민국, 나이지리아
G조 : 독일, 포르투갈, 가나, 대한민국
H조 : 벨기에, 알제리, 러시아, 대한민국

위는 우리와 같은 3번 포트 국가 대신 우리를 집어 넣어본 결과다. 월드컵에서 어느 하나 만만한 팀은 없지만 그래도 지금의 H조가 가장 낫다. 국제사회에서 호주와 코스타리카가 무슨 잘못을 심하게 했는지 몰라도 참 안 됐다. 월드컵에서 동티모르나 몽골을 만나야 최상의 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인데 러시아와 벨기에 등이 우리보다 한 수 위인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다른 조에 비하면 수월한 조편성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톱시드에서는 스위스 다음으로 벨기에가 가장 수월했고 2번 시드에서는 그리스와 보스니아 다음으로 러시아가 좋았다. 남미와 아프리카 시드에서도 알제리라면 최상의 선택이다. 아마 우리가 바꿔준다고 하면 다른 3번 시드 팀들은 줄을 설 거다. 특히 호주는 샘 해밍턴을 앞세워 우리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 낮게 평가한다. “벨기에와 러시아가 있는데 조편성이 뭐가 좋다는 거야?”라는 반응도 적지 않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자. 3번 포트에서 한국 정도면 분명히 껄끄러운 상대다. 벨기에와 러시아, 알제리 입장에서는 고만고만한 상대와 맞붙게 된 걸 만족스러워 하고 있지만 그들에게도 한국은 무척 부담스러운 상대다. 3번 포트에서 코스타리카나 온두라스, 이란, 호주 등을 만나는 게 수월할까. 아니면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고 4강까지 가기도 했던 한국을 만나는 게 수월할까. 3번 포트에서 멕시코와 미국, 일본과 함께 한국은 분명히 피하고 싶은 상대다. 우리 스스로 너무 낮출 필요는 없다. H조에서 속한 네 나라 중 우리가 벨기에 다음으로 월드컵 경험도 풍부하다.

하지만 혼전으로 흐를 수도 있다

사람 욕심이란 게 끝이 없다. 우리는 굉장히 좋은 조에 편성됐지만 나는 이 상황에서도 약간의 아쉬움이 있긴 하다. 우리에게는 만족스러운 조편성이지만 아르헨티나와 보스니아, 나이지리아와 한 조가 된 이란의 상황도 나쁘지 않다. 아르헨티나라는 우승 후보와 맞대결을 펼쳐야 하지만 오히려 이게 이란 입장에서는 낫다. 차라리 아르헨티나가 독주를 하고 보스니아, 나이지리아 등 상대적으로 해볼 만한 팀과의 승부에서 결판을 내는 게 16강 도전 확률을 더 높일 수 있다. 지난 2010 남아공월드컵 당시 우리의 상황이 딱 그랬다. 한국이 이란 대신 F조에 속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대진이라고 생각한다. 독보적인 강팀 하나 뒤에서 틈새시장을 노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 H조에서는 이게 조금 마음에 걸린다. 조1위로 16강에 진출하면 좋겠지만 우리는 조2위를 노리는 게 현실적이다. 그런데 우리 조는 어느 하나 강팀도 없지만 어느 하나 약팀도 없다. 톱시드인 벨기에가 러시아나 알제리에 덜미를 잡혀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차라리 깔끔하게 한 팀이 치고나가는 게 확률적으로는 유리할 텐데 우리 조에서 벨기에의 위상이 그 정도는 아니다. 2승 1패라는 훌륭한 성적을 올리고도 16강 진출에 실패하는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실제로 한국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축구 조별예선에서 2승 1패를 거두고도 탈락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당시 한국은 첫 경기 스페인전에서 0-3으로 패한 뒤 이후 모로코와 칠레를 연이어 1-0으로 제압했지만 골득실차에서 칠레와 스페인에 밀리고 말았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에도 조별예선이 혼전으로 흐르며 결국 우리가 아픈 경험을 했었다. 당시 한국은 첫 경기에서 토고를 2-1로 잡고 2차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도 1-1 무승부를 거두며 16강 진출 가능성을 높였지만 결국 마지막 스위스전에서 0-2로 패배, 1승 1무 1패의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고도 16강 진출에 실패한 바 있다. 우리의 희망대로라면 프랑스가 독주를 하는 상황에서 토고를 잡고 스위스전에서 선전해야 했지만 프랑스가 독주를 하지 못하면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조2위가 현실적인 우리 입장에서는 오히려 한 팀이 시원하게 치고 나가는 게 훨씬 낫다. 당시 D조에서는 1승 1무 1패를 거둔 멕시코가 조2위로 16강에 올랐고 F조에서도 호주가 1승 1무 1패로 16강에 진출했다. 포르투갈과 브라질이 3전 전승으로 대기업의 횡포(?)를 부리며 골목 상인 앙골라와 이란, 크로아티아와 일본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더욱 명확해진 우리의 목표

이렇듯 이란이 속한 조가 탐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벨기에와 러시아, 알제리가 속한 H조도 꽤나 훌륭하다. 하지만 대진이 좋다고 해 이게 16강행을 보장해 주진 않는다. 카메룬이 아르헨티나를 잡는 것도, 세네갈이 프랑스를 잡는 것도 월드컵에서는 일어나는 일이다. 조추첨 이후 분위기는 좋게 형성되고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대진이 확정됐을 뿐이다. 어차피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우리에게 최상의 조라는 건 없다. 각 지역 예선을 뚫고 올라온 팀 중 우리가 아시안컵 예선을 치르듯 제압할 수 있는 팀은 없다. 조추첨 이후 너무나도 희망 섞인 분석을 내놓는 건 참 멍청한 짓이다. 벨기에가 먼저 2승을 챙기고 마지막 한국전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 따위는 전혀 쓸모가 없다.

지금 돌이켜 보면 가장 어이 없었던 게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나왔던 희망찬 분석들이었다. 당시 언론은 하나 같이 이렇게 말했다. “첫 경기 멕시코를 잡고 두 번째 경기 네덜란드전을 쉬어간 뒤 마지막 벨기에전에서 승부를 건다.” 나는 어린 마음에 멕시코 따위는 우리가 가볍게 이기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첫 경기 멕시코전에서 1-3으로 패하면서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누구를 잡고 누구와 비기고 따위의 시나리오는 결국 그냥 소설일 뿐이다. 러시아와 정면승부를 해 기선을 제압하고 알제리를 이긴 뒤 2연승으로 이미 16강이 확정된 벨기에가 최선을 다하지 않을 테니 우리에게 수월한 대진이라는 건 내가 고등학교 때 썼던 학교 짱이 돼 정의를 실현하던 내용의 3류 소설과 다를 게 없다. 여기에 적용할 명대사가 영화 <타짜>에 나온다. “시나리오 쓰고 있네.”

우리 목표는 이번 조추첨 이후 더욱 명쾌해졌다. ‘꿀조’라면서 쾌재를 부르는 게 아니라 세 경기 다 다른 것 따지지 말고 승리를 목표로 뛸 상황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 강팀도 없고 어느 하나 만만한 팀도 없는 조에 편성되면서 이제 시나리오 따위는 필요 없어졌다. 다들 해볼 만한 팀이기 때문에 훌륭한 조편성이라는 것이지 그 이상의 해석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오히려 고만고만한 팀들끼리 모였다는 건 한 순간의 실수로 16강 진출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벨기에 정도한테 잔뜩 쫄 거면 월드컵 본선 무대에 나갈 자격도 없다. 이번 조편성에서 스페인과 네덜란드,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등 대단한 강호를 피했다는 것 정도에만 만족하자. ‘꿀조’까지는 아니고 한 ‘올리고당조’쯤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감 있게 준비하는 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