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표팀과 브라질의 평가전 당시 붉은악마의 야유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나는 이게 일고의 가치도 없는 논란이라고 생각한다. 평가전이라고 해도 대표팀의 승리를 위해 뛰는 경기에서 야유 역시 응원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럽 축구 좋아하는 이들은 아마 유럽에 가 관중들의 귀를 찢을 듯한 야유를 들으면 붉은악마의 행동이 참 귀엽게 느껴질 것이다. 나도 2006년 독일월드컵 토고전 당시 경기 막판 한국 선수들이 프리킥 상황에서 공을 돌리자 수 만 명의 현지 관중이 야유하는 모습을 보고는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이들은 손을 입에 갖다대 큰 소리의 휘파람을 부는 ‘부잉’을 했는데 이후 나는 독일에서 돌아온 뒤 한 달 동안 ‘부잉’ 연습에 매달렸었다. 물론 요새는 이 ‘부잉’을 <밤과 음악사이>에서나 쓰지만 말이다.

평가전에서의 야유도 당연한데 타이틀이 걸린 경기는 오죽할까. 이번 FC서울과 광저우 헝다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결승 1차전을 앞두고 나는 팬들이 더 적극적으로 야유를 퍼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경기는 단순히 그라운드에 나서는 11명의 선수들만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경기가 아니다. 확실하게 안방에서의 응원전을 승리로 이끌어야 좋은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다. 광저우 원정 응원단이 많게는 1만 5천명까지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찾을 수도 있다는데 과거 한 차례 ‘또 다른 올드트래포드’가 되기도 했던 이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이번에는 ‘광저우의 안방’이 되는 걸 원치 않는다. 서울 팬들은 이 경기가 확실히 우리의 안방이라는 걸 쩌렁쩌렁한 응원과 야유로 보여줘야 한다. 선수들만 컨디션 관리를 잘해야 하는 게 아니다. 서울의 우승을 간절히 원하는 팬들이라면 오늘 저녁 술도 자제하고 일찍 자면서 컨디션 관리를 잘해야 한다.

2002년 월드컵 당시의 홈 어드밴티지

K리그가 깽판(?)을 치면서 AFC는 또 다시 결승 제도를 바꿨다. 일본이 자국 팀의 결승 진출을 예상하고 두 번이나 결승전 유치에 성공했지만 두 차례 모두 안방에서 K리그 팀의 우승을 구경해야 했고 이후 AFC는 결승 진출 팀 중 한 팀의 홈에서 단판 승부를 치르기로 했는데 이 역시 두 번 모두 한국에서 열렸다. 4회 대회 연속 결승에 진출한 한국 때문에 또 다시 AFC는 규정을 바꿨다. 결승 역시 홈 앤드 어웨이로 치르기로 한 것이다. 이런 대회 규정상 홈팀은 그 이점을 확실히 살려야 한다. 치사하게 숙소를 파주의 러브호텔로 잡아준다거나 자갈밭 같은 중학교 운동장을 훈련장으로 제공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경기장에서만큼은 압도적인 홈 어드밴티지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였다. 폴란드전 당일 붉은악마는 일출을 보며 월드컵 첫 승을 기원한다는 이유로 부산 해운대에 모였다. 수천 명의 붉은악마가 해운대에서 꽹과리를 치고 애국가를 부르며 행진을 했고 이는 근처의 한 고급 호텔로까지 이어졌다. 알고 보니 이 호텔이 바로 폴란드 대표팀의 숙소였던 것이다. 첫 승 기원 일출 감상은 핑계였고 이른 아침 상대팀 선수들의 단잠을 깨워 컨디션을 방해하려는 게 주목적이었다. 그런데 삼엄했던 호텔 근처 경호원의 반응이 인상적이었다. “적당히 하고 돌아가세요.” 그들은 적극적으로 붉은악마의 행동을 말리지 않고 씩 웃었다. 그들도 경호원 이전에 한국의 월드컵 첫승을 기원하는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내가 어떻게 그리 잘 아는지 궁금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그 붉은악마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를 비매너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정도는 홈 어드밴티지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남미에서는 상대팀 숙소 앞에서 총을 쏘기도 한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 역시 홈 어드밴티지가 제대로 발동했다. 당시 히딩크 감독은 경기 직전 주장인 홍명보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상대가 조금만 거칠게 나와도 주심에게 가서 항의를 해.” 파울 여부를 떠나 경기장을 가득 채운 한국 관중들은 점잖은 홍명보가 줄기차게 심판에게 항의하는 모습을 보며 흥분했다. ‘뭔가 우리가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는 곧 경기장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데 일조했고 결국 주심도 사람인지라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홈 어드밴티지는 바로 이런 데서 나오는 거다. 안방에서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건 상대팀의 시차나 식생활 등이 아닌 바로 이런 부수적인 부분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응원하는 팬들이 많은 홈 경기에서 선수들이 힘을 더 발휘한다는 건 이미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이다.

1만 5천 광저우 응원단, 서울이 눌러야

이번 경기 역시 마찬가지다. 팬들이 적극적으로 서울을 도와야 한다. 광저우 숙소 앞에서 밤새 술을 마시며 서울 응원가를 부르는 팬들도 있어야 하고 경기 도중에는 광저우 선수들이 공만 잡으면 귀가 찢어질 듯한 야유를 퍼부어야 한다. 물론 관중 개인이 이 경기를 관람하는 목적은 다를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저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아시아 최고 권위의 대회를 현장에서 즐기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경기가 그저 여가 선용을 위해 경기장을 찾은 이들보다는 우승에 목마른 이들이 전투적인 마음가짐으로 선수들의 행동 하나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기가 됐으면 한다. 그래야 광저우 선수들이 정신줄을 놓는다. 데얀 역시 어제(24일) 자신의 SNS를 통해 “1만 5,000명의 광저우 팬들이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껏 경험해 본적이 없을 정도로 많은 서울 팬들이 찾아왔으면 좋겠고 우리를 지지해주기를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이미 광저우 팬들은 적극적이다. 서울 구단으로부터 6,600장의 티켓을 구입했고 개별적으로 티켓을 구입해 입국하는 여행객과 한국에 거주 중인 유학생들 역시 넘쳐난다. 이들은 며칠 전부터 속속 서울로 입국하기 시작했다. 지난 23일부터 결승전 당일인 내일(26일)까지 광저우와 선전, 홍콩 등에서 서울로 가는 항공편은 이미 매진된 상태다. 자칫 서울 팬들이 여유롭게 생각할 경우 서울월드컵경기장은 1/4 넘는 좌석을 채운 광저우 관중의 분위기에 휩쓸릴 수도 있다. 이건 단순히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만의 경기가 아니라 누가 더 목소리를 크게 내느냐의 승부다. 더군다나 서울은 2차전을 광저우에서 치러야 한다. 훈련장 배정부터 일정까지 모든 분야에서 텃세가 상당할 것이다. 이미 1차전에서 확실히 승기를 잡아야 2차전을 수월하게 치를 수 있다.

나는 ‘서포터스’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저 잘하고 있을 때 박수를 보내거나 관심을 갖는 사람은 ‘팬’일 수 있다. 하지만 ‘서포터스’는 ‘지원하고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아무리 텔레비전 안의 유럽 축구를 동경하고 바라보더라도 ‘팬’은 될 수 있지만 ‘서포터스’는 될 수 없다. 하지만 직접 경기장에 가 내는 내 목소리가 선수들의 경기력에 아주 미세한 영향이라고 끼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서포터스’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서포터스’는 경기장 골대 뒤에서 단체 응원을 하는 이들만을 지칭하는 단어는 아니다. 광저우와의 중요한 일전에 경기장을 찾은 모든 이들이 이제는 ‘서포터스’가 되어야 한다. 응원가 몇 곡 따라 부르는 게 ‘서포터스’의 기준이 아니라 서울 선수들이 멋진 플레이를 펼치면 환호하고 광저우 선수들이 행동할 때 야유를 퍼붓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

‘어나더 텐허 스타디움’을 원치 않는다

많은 이들은 나에게 묻는다. “현장에서 경기를 많이 지켜보셨잖아요. 어떤 경기가 가장 대단했나요?” 아마 대부분은 월드컵을 염두에 두고 묻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면 조금의 고민도 없이 말한다. “2011년 AFC 챔피언스리그 전북과 알 사드의 결승전이요.” 이 경기는 내 생애 가장 잊을 수 없는 열기를 느끼게 해줬다. 특히 후반 막판 이승현의 극적인 동점골이 들어간 뒤 약 1분간 펼쳐진 응원은 어쩌면 다시는 한국에서 볼 수 없는 명장면이었다. 경기장 네 면에서 똑같은 목소리로 울려 퍼지던 응원가는 마치 유럽의 어느 빅리그 경기장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길지도 않았던 이 1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이 명장면을 휴대폰 동영상으로 담아 생각날 때마다 다시 보곤 했다. 그런데 택시에 이 휴대폰을 놓고 내린 뒤 아마 지금은 이 휴대폰이 몰래 다른 나라로 넘어가 인도나 베트남에서 누군가 이 동영상을 찾아보고 있을 것이다. 휴대폰은 분실했지만 누군가에게 동영상을 통해 한국 축구를 홍보했다는 사실에 행복하다.

AFC 챔피언스리그 사상 첫 우승을 노리는 중국 슈퍼리그와 광저우가 도전자 입장이지만 오히려 지금 분위기로는 K리그와 서울이 도전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광저우는 서울보다 훨씬 더 돈을 많이 써서 외국인 명장과 선수들을 데려왔고 해외 도박 업체에서도 광저우의 우세를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예상을 보란 듯이 빗겨가려면 2011년 전주에서 관중들이 보여줬던 그 믿을 수 없는 ‘1분의 열기’를 90분 동안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관중들이 보여줘야 한다. 그러면 충분히 그 예상을 뒤집을 수 있다. 내일 경기 90분은 단순히 선수들만 뛰는 게 아니다. 같이 뛰어야 이길 수 있다. 전투적인 분위기로 응원하자. 한국 축구의 성지인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어나더 텐허 스타디움’이 되는 꼴을 지켜보는 건 너무나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리고 오늘 저녁 국정원 대선 개입 규탄 촛불시위와 보수단체의 박근혜 대통령 지지 촛불시위를 서울 홍은동 그랜드 힐튼 호텔 앞에서 여는 건 어떨까. 북한산의 정기를 받은 이 홍은동 그랜드힐튼 호텔 앞이 우리의 정치와 국가를 위해 촛불시위를 벌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아닐까. 아,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호텔에 광저우 선수들이 묵는단다.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이 모인다는데 광저우 선수 몇 명 잠 좀 설치는 게 중요한 일은 아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