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축구선수가 있다. 이 선수는 팀의 주축 공격수다. 비록 많은 관중이 찾는 K리그 클래식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챌린저스리그 이천시민구단에서 맹활약하며 K리그 입성의 꿈을 키우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다부진 체격과 검게 그을린 피부가 팀 동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축구를 시작한 뒤 단 한 번도 자신을 응원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귀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은 청각 장애를 딛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사나이, 이천시민구단의 정준영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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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영은 올 시즌 챌린저스리그 이천시민구단에서 주전 공격수로 맹활약하고 있다. (사진=정준영 제공)

벤치 눈치 보며 뛰어야 하는 축구선수

정준영은 서산 해미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축구를 시작했다. 축구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아버지가 강력히 추천했다. “준영아, 너도 축구 한 번 해보지 않을래?” 운동 신경도 남달랐고 축구에 대한 관심도 있었던 정준영은 흔쾌히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또래들에 비해 꽤 재능이 있는 편이어서 학교에서도 기대가 컸다. 하지만 축구를 시작할 때쯤 귀에 이상을 느꼈다. 점점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고통스러워하다 병원에 가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귀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곧 청력을 잃게 될 겁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 후 정준영은 청각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축구는 발로만 하는 운동이 아니다. 관중이 가득 찬 경기장에서는 관중의 함성 소리에 묻혀 있지만 관중이 적은 아마추어 축구를 지켜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돌아 뛰어.”, “뒤에 간다.”, “붙어.”, “받으러 나와.” 90분 내내 선수들은 쉴 새 없이 동료들과 말을 하며 소통해야 한다. 그런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이가 취미도 아니고 전문적인 축구 선수 생활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정준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평소 훈련 때는 말하는 이의 입모양을 보고 의사소통을 했고 경기 도중에는 동료와 코치진의 눈빛을 보고 발을 맞췄다. 그렇게 해미중학교와 예산 삽교고등학교를 졸업한 정준영은 체육특기생 자격으로 초당대 축구부에 진학했다.

그는 경기 도중 계속 벤치를 살핀다. “저는 감독님과 선수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잖아요. 많이 불편한 건 사실이죠. 항상 벤치나 주변 선수들 눈치를 보면서 경기를 해 왔어요.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동료들에게 너무나 미안해요. 동료들도 무척 답답할 테니까요.” 하지만 그는 지금껏 축구를 포기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귀가 불편해 축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축구를 너무 사랑해서 이걸 포기하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죠.” 그렇게 정준영은 초당대에서도 좋은 활약을 하며 K리그 입성을 노리고 있었다. 부푼 마음을 안고 2008년 K리그 드래프트 신청서를 제출했다. 장애는 있지만 그의 진가를 알아줄 팀이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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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영은 농아인 축구 국가대표로도 활약하고 있다. (사진=정준영 제공)

그가 2년 동안 축구를 할 수 없었던 이유

하지만 정준영은 그 어떤 팀의 선택도 받지 못했다. 아무래도 종이 한 장 차이의 실력으로 경쟁해야 하는 프로 무대에서 그의 장애는 K리그 구단에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된 모양이다. 하지만 정준영은 축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일과 축구를 병행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초당대 코치의 말에 곧장 짐을 싸 경북 구미로 내려갔다. 구미 LG실트론 직장인 축구팀이었다. 이 팀은 그저 보통 직장인 축구팀 수준이 아니었다. 실업 무대에서 뛰던 선수들까지 스카우트해 2종클럽에서는 최강자로 꼽히는 강호 중의 강호였다. 정준영은 이곳에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훈련을 하면서 재기를 꿈꿨다. 몸은 피곤했지만 그는 축구를 계속 할 수 있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2009년 하나은행 FA컵에서 정준영은 사고(?)를 쳤다. FA컵 1라운드에서 당시 K3리그에 참가하고 있던 광주광산FC를 상대로 골을 뽑아내며 2-1 승리를 이끈 정준영은 FA컵 2라운드에서는 연세대를 맞았다. 대학 최강이라는 연세대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됐다. 하지만 정준영은 이 경기에서 결정적인 어시스트를 하며 연세대를 2-0으로 격파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FA컵 3라운드에서도 선문대를 상대로 1도움을 기록한 정준영은 후반 막판에는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승부차기 끝에 패하기는 했지만 FA컵에서 정준영이 보여준 경기력은 놀라웠다. 하지만 그에게 또 시련이 찾아왔다. 구미실트론 축구팀이 입단 1년 만에 해체되고 만 것이다.

실력은 뛰어났지만 청각 장애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결국 그는 2010년 축구와 완전히 멀어졌다. 단 한 번도 축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지만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은퇴해야 했다. 그렇게 2년 동안 정준영은 그저 일을 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 “축구가 너무 하고 싶었어요.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 와중에 2011년 후반기를 앞두고 챌린저스리그 천안FC에서 선수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정준영은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당장 천안으로 내려갔다. 입단 테스트를 실시하고 있던 천안 박윤기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준영이는 테스트에서 제외시켜.” 비록 2년을 쉬었지만 정준영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준영은 비록 챌린저스리그였지만 2년 만에 그토록 그리던 축구를 다시 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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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농아인올림픽에서 한국 축구는 사상 첫 메달에 도전할 예정이다. (사진=정준영 제공)

팀 내 득점 1위, 정준영의 대활약

공백기가 무색한 활약이 시작됐다. 후기리그에 팀에 합류했지만 펄펄 날았다. 박윤기 감독은 수비수였던 정준영을 공격수로 배치해 마음껏 그라운드를 누비게 했다. 초반 6경기에서 5골을 뽑아내는 괴력을 선보인 정준영은 챌린저스컵 4강에 오르는 동안 6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후반기에서 대활약한 정준영은 이듬해인 2012년을 앞두고 챌린저스리그의 강호 이천시민구단으로 이적하게 됐다. 2년 동안 축구를 할 수 없었던, 더군다나 경기 도중 기본적인 의사소통도 불가능한 청각 장애를 가진 선수라고는 믿기지 않는 활약이었다. 기본적인 수당 외에 수입이 없는 챌린저스리그 특성상 정준영은 낮에 물류센터에서 일을 하고 야간에 훈련하는 강행군을 펼치면서도 전혀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지난 시즌 이천시민구단에서 주로 교체 선수로 출전했던 정준영은 올 시즌부터는 완벽히 팀에 적응해 팀내 득점 랭킹 1위를 내달리고 있다. 팀 역시 5승 2무 1패를 기록하며 챌린저스리그에서 순항 중이다. 하지만 정준영은 득점 랭킹 1위의 공을 동료들에게 돌린다. “저는 아직 부족한 게 많은 선수라고 생각해요. 옆에서 동료들이 많이 도와줘서 득점을 많이 할 수 있었어요. 저와 함께 뛰는 게 불편할 텐데 불편한 내색 하지 않고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 동료들이 없었다면 골도 많이 넣지 못했을 것 같아요.” 경기장에서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그는 이제 눈빛으로 감독과 동료들의 마음을 읽고 연일 골을 뽑아내고 있다. 정준영은 주말에는 챌린저스리그에 나서고 장애인 유소년 클럽에서도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도전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오는 26일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개막하는 2013 소피아 농아인올림픽 축구 대표로 나서기 때문이다. 주심이 호루라기 대신 깃발을 사용할 뿐 비장애인 축구와 비교해 크게 다르지 않은 규칙으로 시행되는 똑같은 축구다. 이번 대회를 준비하는 정준영의 각오는 남다르다. 4년 전 처음 농아인 국가대표에 선발돼 대만 농아인올림픽에 나섰던 그는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짐을 싸야 했기 때문이다. “대만 농아인올림픽에 참가하면서 많은 걸 느꼈어요. 이후 아시아 대회를 비롯한 무대에서 많이 나서면서 경험도 많이 쌓았죠. 아직 한국 축구가 농아인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제가 꼭 그 꿈을 이루고 싶어요.” 하지만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은 우크라이나와 덴마크, 이란과 한 조에 묶이면서 소위 말하는 ‘죽음의 조’에 속했다.

유럽 국가들의 농아인 축구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이란 역시 최근 들어 농아인 축구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한국은 아직 여건이 부족하다. 비장애인 국가대표 선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환경이 열악하다. 하지만 그는 최근에 다니던 물류센터까지 그만두고 올림픽 준비에 여념이 없다. “합숙기간이 50일인데 그 걸로도 시간이 부족해요. 그래서 오전, 오후 훈련을 물론 야간에는 체력훈련까지 하고 있어요. 장난이 아니에요. 정말 힘들어 죽을 만큼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와 함께 이천시민구단 김기현과 서울마르티스 이재영, 완주중학교 코치 김종훈 등 전문적으로 대학교 때까지 축구를 배웠던 이들이 함께 농아인 축구 국가대표에서 메달 획득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K리그에 딱 1년 만이라도”

그는 당장 이번 달에 개막하는 이 대회에서 메달을 목에 거는 게 1차 목표다. 그리고 더 먼 미래에는 반드시 이루고 싶은 꿈이 하나 더 있다. “K리그 팀에 입단해 그라운드를 꼭 밟아보고 싶어요. 축구선수라면 K리그 팀에 입단하는 게 모두의 꿈이잖아요. 딱 1년 만이라도 K리그 무대에 설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청각 장애를 안고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장애일 뿐 극복할 수 없는 벽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준영은 장애를 딛고 오로지 축구에 대한 열정으로 지금의 자리에 서 있다. 비록 누군가의 응원 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만 진정 가슴으로 응원을 보내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당신은 장애를 겪으며 좌절하는 모든 이들의 희망이다. 당신은 진정한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