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7일) 포항스틸야드에서 열린 포항과 전북의 K리그 클래식 경기는 이번 라운드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끄는 경기였다. 전북으로 돌아온 최강희 감독과 포항의 선두를 이끌고 있는 황선홍 감독이 펼치는 지략 대결은 경기 전부터 관심사였다. 한 골씩 넣을 때마다 K리그 역사를 바꾸는 이동국이 고향팀에 돌아왔다는 점도 이슈였고 어느덧 대표팀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플레이를 펼칠 만큼 성장한 이명주에게도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모두가 주목하는 경기에서 다소 생소했던 한 남자를 주목하려 한다. 얼핏 보고 최코디인줄 알았던 바로 그 남자, 포항의 수비수 배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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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아버지가 지켜보는 내셔널리그 경기에서 2년 만의 데뷔골을 뽑아낸 뒤 기념 촬영한 배슬기의 모습. (사진=내셔널리그)

K리그 드래프트 최고령 지원자, 배슬기

배슬기는 지난 2011년 말 치러진 K리그 드래프트에서 반짝 주목을 받았었다. 실력과 기대감을 떠나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당시 드래프트 최고령 지원자 세 명 가운데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1985년생으로 당시 27세였던 배슬기는 이제 갓 대학을 졸업했거나 중퇴하고 K리그에 도전하는 어린 친구들과 섞여 있었다. 남들은 프로선수로의 꿈을 어느 정도 이뤘어야 할 나이에 배슬기는 막 출발 선상에 섰다. 순탄치 않은 축구인생을 돌고 돌아 K리그 무대의 문턱을 두드리게 된 것이다. 그의 이름을 K리그 드래프트 명단에서 확인한 이들은 놀랐다. “27살에 이제 프로 입성을 꿈꾼다고? 너무 무모한 거 아니야?”

배슬기가 이처럼 늦은 나이에 K리그 문턱을 두드린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광양제철초등학교와 제철중, 제철고를 졸업한 배슬기는 건국대에 진학해 수비수로 어느 정도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2008년 건국대를 졸업할 당시 K리그 드래프트에 이름을 올렸지만 결국 그 어떤 팀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갈 곳이 없어 방황하던 배슬기는 그렇게 K리그와 멀어진 채 내셔널리그 인천코레일로 발길을 돌렸다. 잠시 내셔널리그에 머문 게 아니라 이곳에서 두 시즌 동안 활약했다. 첫 시즌 9경기에 나선 그는 2009년에는 22경기에 출장하며 우주영과 함께 인천코레일 수비를 든든히 책임졌다. K리그에 입성하지 못한 한을 풀고 있었다.

하지만 2009년 시즌을 마친 배슬기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마음 속에 늘 걸려 있던 군대 문제부터 해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아직 프로무대에서 이뤄놓은 게 없으니 조금 더 노력해보거 군 입대를 결정하자고 했지만 배슬기는 확고했다. 더군다나 프로 무대 경험이 전혀 없는 배슬기는 규정상 상무 입단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눈길을 경찰축구단으로 돌렸다. 자칫하면 군 복무 이후 적지 않은 나이 때문에 영영 프로 무대 입성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배슬기는 당당히 경찰축구단 입단을 결정했다. 그렇게 그는 2010년 R리그(2군리그)에 속한 경찰축구단 선수가 됐다. 실업 축구를 거쳐 R리그에서 활약하는 평범한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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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코디, 아니 배슬기(오른쪽)가 배천석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사진=포항스틸러스)

28세에 처음 밟은 K리그 무대

2년 동안 성실히 병역 의무를 다한 배슬기는 2012년 말 27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다시 K리그 문을 두드렸다. 함께 축구를 했던 동료들은 이미 K리그에서 자리를 잡을 시기였지만 그는 4년이라는 시간을 주목받지 못했던 곳에서 보낸 뒤 다시 도전하는 상황이었다. 최고령 지원자라는 특이한 경력으로만 소개됐을 뿐 그를 경기력으로만 바라보는 곳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타 선수들이 즐비하기로 유명한 포항에서 그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번외 지명도 아닌 4순위였다. 그렇게 배슬기는 건국대를 졸업하고 내셔널리그와 경찰축구단을 거쳐 ‘명문’ 2012년 포항 유니폼을 입게 됐다.

하지만 포항은 보통 팀이 아니었다. 선수층이 두텁기로 유명했고 어린 선수들은 언제든 불러만 주면 뛸 수 있는 채비를 하고 있는 팀이었다. 김광석과 김원일이 주전 수비수로 나서고 있는 가운데 외국인 선수 조란이 백업으로 밀려날 만큼 만만치 않은 주전 경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경쟁해도 쉽지 않을 판국에 배슬기는 해를 넘겨 28세의 나이로 이제 막 그들과 경쟁해야 했다. 그와 입단 동기이면서도 무려 5살이나 어린 이명주는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문창진과 이광훈, 문규현 등은 8살이나 그보다 어렸다. 하지만 프로 경험이 없는 배슬기는 한참 어린 친구들과 같은 출발선에 서야 했다.

경기에 나서지 못하면 의기소침해 투덜거리는 선수도 많지만 적지 않은 나이의 배슬기는 이런 쓸데 없는 자존심을 버렸다. 배슬기는 특유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벤치에서도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는 지난해 K리그 경기에 단 한 번도 나서지 못하고 후보로만 이름을 올리며 벤치에만 앉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뒤에는 늘 목이 쉬었다. 벤치에서 경기 내내 소리를 지르며 동료들을 응원했기 때문이다. 배슬기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출전하지 못한다고 시무룩해 있으면 팀 분위기가 죽잖아요. 벤치에서 동료들을 열심히 응원하는 것도 제 역할입니다.” 팀에서 중고참 대접을 받아야 할 나이에 그는 벤치에서 소리를 치며 동료들을 응원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배슬기가 전파하는 긍정적인 에너지

K리그 출장 기록은 없었지만 특유의 유쾌한 성격으로 포항 팬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구단 자체 중계에 해설자로 등장해 입담을 과시하기도 했다. 해설 도중 이명주가 공을 잡자 “명주야. 넌 신인왕이잖아. 자신 있게 해”라면서 “우리 선수들 폼이 ‘이빠이’ 올라왔다”는 등 이상윤 해설위원 뺨 칠 정도의 정신 없는 해설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난 3월 열린 분요드코르와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원정경기에서는 후반 종료 직전 포항이 2-1로 이기고 있자 벤치에서 그라운드의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도 침대축구 할 수 있어. 우리는 과학이야.” 치열한 승부가 막판으로 치닫는 순간 던진 배슬기의 한 마디에 벤치는 뒤집어지고 말았다. 그는 “페어플레이는 아니지만 정말 침대축구를 써서라도 이기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다”고 전했다.

배슬기는 경기에 나서지 못했지만 그러면서도 늘 긍정적인 마음이었다. “지난 시즌부터 제가 동행한 경기는 한 번도 진 적이 없거든요.” 경기에 나서는 걸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했지만 그러면서도 팀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존재로 인해 팀이 긍정적인 분위기를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배슬기는 늘 가장 크게 동료들을 응원했다. 그러면서도 “단 1분이라도 경기에 나서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한 켠에는 자리 잡고 있었다. 올해 29세가 된 배슬기는 프로 2년차가 됐지만 공식경기에 출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유소년 육성에 강점을 가진 포항은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들이 언제라도 부름을 받으면 그라운드로 달려 나가 뛸 수 있는 상황이어서 배슬기의 도전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 배슬기는 지난 4월 잊지 못할 K리그 클래식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AFC 챔피언스리그를 병행하며 주전들의 체력 저하로 고민하고 있던 황선홍 감독은 경남과의 원정경기 선발 명단에 배슬기를 처음으로 넣었다. 김광석과 김원일 등 주전 선수들이 빠지고 배슬기가 처음으로 경기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이날 포항은 주축 선수 상당수를 제외하고도 경남과 1-1 무승부를 기록했고 배슬기 역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지난 6월 1일 제주 원정을 떠난 배슬기는 포항이 제주를 3-2로 이기고 있던 후반 종료 직전 황진성 대신 교체 투입돼 추가 시간까지 포함 5분을 뛴 게 전부였다. 그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데뷔 500일 기념 경기에서 5분을 뛰었습니다. 다음 번에는 500분 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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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슬기(가운데)가 지난 일요일 잊지 못할 K리그 홈 데뷔전을 앞두고 동료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포항스틸러스)

그의 잊지 못할 스틸야드 데뷔전

배슬기는 올 시즌 한 번의 선발 출장과 한 번의 교체 출장을 기록했지만 아직 K리그 무대를 통해 안방 팬들에게 인사한 적이 없었다. 그가 뛴 두 경기 모두 원정경기였다. 언젠가는 관중이 가득 찬 스틸야드에서 마음껏 뛰어 보고 싶다는 꿈이 강렬했다. 이제 곧 서른 살이 되는 이 수비수에게는 소박하지만 간절한 꿈이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7일) 경기를 앞둔 상황에서 주전 수비수 김원일이 경고누적으로 결장하게 되자 황선홍 감독은 고심 끝에 윤준성, 김준수 등 어린 선수들 대신 배슬기를 선발로 낙점했다. 포항 유니폼을 입고 무려 1년 반 만에 K리그 안방경기에서 처음 팬들에게 인사를 하는 순간이었다. 2년 간의 내셔널리그 생활과 2년 간의 군 복무, 그리고 1년 반의 벤치 멤버 생활 끝에 처음으로 스틸야드에 서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최강 공격력을 자랑하는 전북이었다.

처음 K리그를 통해 스틸야드 잔디를 밟은 배슬기는 경기 전부터 진지한 표정이었다. 장마철이었지만 경기장에는 이 빅매치를 보기 위해 온 관중이 꽉 들어차 있었다. 배슬기는 긴장한 탓인지 전반 초반 보이지 않는 두 번의 실수로 전북에 연속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특히나 두 번째 실점 장면에서는 노련한 이동국의 플레이에 당하며 무너졌다. 하지만 이후 배슬기는 평정심을 찾고 헌신적인 플레이로 안정적인 수비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비록 이후 포항이 추격골을 얻는데 실패해 0-2 패배로 경기가 끝이 났지만 배슬기에게는 그토록 기다려온 홈에서의 잊지 못할 데뷔전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이동국의 연속골과 포항 징크스를 깬 전북, 포항 황진성과 김원일의 부재 등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주목했지만 배슬기에게는 그 어떤 경기보다 더 기억에 남을 특별한 경기였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범한 K리그 클래식의 한 경기였을지 몰라도 이 무대에 서기 위해 대학 졸업 후 무려 5년 5개월이라는 시간을 참고 기다려온 이에게 스틸야드에서의 K리그 홈 데뷔 경기는 어떤 의미였을까. 배슬기는 이제 내년이면 서른이 된다. 남들 같으면 K리그 무대에서 이미 이름을 알리고 자리를 잡고 후배들의 도전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지만 배슬기는 이제 시작이다. 늘 벤치에서 동료들을 향해 목이 쉬어라 응원을 보내던 배슬기에게 이제는 우리가 응원을 보내는 건 어떨까. 가수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 조금씩 청춘이 멀어져 간다고 했지만 배슬기에게 서른 즈음은 성공과 가까워져 가는 시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