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남자 축구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이 이끄는 한국 올림픽팀은 가나를 1-0으로 제압하고 무려 48년 만에 올림픽 무대에서의 승리를 맛봤다. 황선홍과 최용수, 윤정환, 이기형, 하석주, 이상헌, 최성용, 서동명 등 역대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던 당시 올림픽팀은 두 번째 멕시코와의 경기에서는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유리한 상황에서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1승 1무를 기록 중인 올림픽팀은 마지막 경기에서 무승부만 거둬도 8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마지막 경기 상대는 이탈리아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마르코 브랑카와 마시모 크리파, 골키퍼 지안루카 파글리우카 등 쟁쟁한 와일드카드를 선발했지만 나머지 선수를 모두 21세 이하로 구성했고 선수 선발 과정에서 잡음까지 일며 이미 2전 전패를 당한 채 탈락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경우의 수’는 한국에 무척이나 유리했다. 무승부만 거둬도 자력으로 8강에 진출할 수 있었고 조별예선 탈락은 한국이 이탈리아에 패하고 가나와 멕시코가 비기는 경우 뿐이었다. 더군다나 이탈리아는 주전 수비수가 바로 전 경기에서 퇴장을 당해 출장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당시 언론은 사실상 한국이 8강 진출이 확정된 것처럼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국은 이날 경기에서 수비 위주의 경기를 펼쳤다. 무승부만 거둬도 된다는 마음으로 소극적인 경기 운영을 하기 시작하더니 한국은 전반 23분 브랑카에게 첫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후 다시 정상적인 경기를 펼치며 후반 16분 이기형이 페널티 에어리어 오른쪽에서 골을 뽑아내며 1-1 동점을 이뤘지만 또 다시 소극적인 경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결국 한국은 후반 10분을 남겨두고 브랑카에게 또 한 번 골을 내주며 무너졌다. 이후 총공세에 나섰지만 시간이 부족했고 한국은 똑같이 1승 1무 1패를 거둔 가나에 다득점에서 밀려 탈락하고 말았다. 나는 당시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 바보 같은 경기를 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를 소극적으로 대하다 무너졌기 때문이다.

주도권이 이란으로 넘어가면 피곤해진다

오늘(18일) 최강희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은 울산문수경기장에서 이란을 상대로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를 치를 예정이다. 상황은 무척이나 유리하다. 비기기만 해도 자력으로 브라질행을 확정지을 수 있고 설령 패한다고 하더라도 우즈베키스탄과의 골득실차가 워낙 커 본선 진출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한국과 우즈벡은 무려 골득실이 6점이나 차이난다. 우리가 세 골차로 패하고 우즈벡이 세 골차로 카타르를 이겨도 다득점과 승자승에서 우리가 앞선다. 우리가 월드컵 본선에 8회 연속 진출할 확률은 90% 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들 이 축제를 즐기는 마음으로 경기장에 갈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극히 유리한 상황에서 나는 마지막까지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와 상대하는 이란 역시 무승부를 거두면 자력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되지만 순순히 비길 마음은 없어 보인다. 우리가 소극적으로 무승부를 노리며 수비 라인을 내린 채 주도권을 이란에 내준다면 이란 공격진은 충분히 대량득점도 가능한 능력을 지녔다. 한 번 끌려가기 시작하면 종잡을 수 없을 만큼 90분 동안 힘겨운 경기를 펼쳐야 한다. 본선 진출 확률이야 무승부만 거둬도 가능한 지금 상황이 훨씬 유리하지만 경기의 승패를 놓고 본다면 반드시 이겨야 본선에 가는 ‘경우의 수’가 훨씬 더 이번 경기에는 도움이 된다. 이란은 한 번 불이 붙으면 걷잡을 수 없는 팀이라는 걸 잊지 말자.

더군다나 우즈벡은 마지막 경기에서 이미 탈락이 확정된 카타르를 상대로 경기를 펼친다. 조직력이나 집중력이 크게 부족한 ‘모래알’ 카타르라면 이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이 경기를 반드시 크게 이겨 놓고 한국-이란전 경기 결과를 지켜봐야 하는 우즈벡 입장에서는 카타르를 5-0이나 6-0으로 이기지 못하라는 법도 없다. 실제로 지난 2010 남아공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우즈벡은 카타르를 4-0으로 대파하기도 했다. 최근 세 차례 두 팀의 맞대결에서 우즈벡은 단 한 골도 내주지 않고 7골을 뽑아내며 3전 전승을 거두고 있다. 우리가 ‘경우의 수’에서 유리한 상황임에는 분명하지만 자칫 무승부에 안주하다가 경기 막판 삐끗하는 순간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한국과 우즈벡이 나란히 월드컵에 나가는 상상을 하고 있지만 우즈벡도 아직은 우리의 경쟁자다.

말리전과 포르투갈전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축구에서 가장 무서운 게 바로 비겨도 되는 경기를 치를 때다. 바로 이 경기의 대명사가 지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축구 조별예선 한국-말리전이었다. 당시 1승 1무를 기록하고 있던 한국은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말리를 만나 무승부만 거둬도 8강에 오르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한국은 말리에 연속적으로 세 골이나 내주며 급격히 무너졌다. 비겨도 되는 경기라는 점에서 방심한 결과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경기였다. 이후 극적으로 세 골을 따라 붙으며 3-3 무승부로 경기를 마쳐 8강에 오를 수 있었지만 이 경기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쉴 새 없이 추격해 기적적인 경기를 만들어 ‘명승부’라는 찬사가 이어졌지만 전반에 보여준 한국의 안이한 자세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반대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살펴보자. 당시 한국은 1승 1무를 거둔 상황에서 포르투갈과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두 팀 모두 무승부만 거두면 사이좋게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경기 도중 포르투갈 선수들이 “0-0으로 비기자”며 제안을 했지만 우리가 언제부터 월드컵에서 승리를 양보할 만큼 많이 이겨봤나. 인정사정 없는 한국 선수들은 포르투갈 선수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공격적으로 달려들었고 결국 선취골을 뽑아냈다. 만약 이 경기에서 한국이 거세게 공격하며 ‘이기지 못하면 떨어지는 것처럼’ 플레이하지 않고 설렁설렁 무승부만을 위해 뛰었다면 포르투갈은 어땠을까. 아마 당황하며 무승부를 제안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우리를 이기려 들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이기려 달려드는 팀과 무승부에도 만족하는 팀의 차이다. 단순히 무승부에도 만족하기 위해 전술적으로 수비 위주의 경기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꼭 수비 위주의 전술이 아니더라도 선수들이 방심하고 만족하는 순간 그 팀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말리전이 딱 그랬다. 전혀 수비적인 경기 운영이 아니었는데도 한국은 선수들이 방심하며 한순간에 무너졌다. 일단 한국은 오늘 경기에서 우즈벡이 카타르를 6골 차로 제압할 것이라는 걸 기정사실화하고 경기장에 들어서야 한다. 그쪽 경기에서 우리의 운 따위는 바라지 말자. 그저 울산문수경기장에서 남의 경기 결과 상관없이 우리 힘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 짓는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무승부의 유혹’을 이겨내자

이란은 경기 내용에서 밀리기 시작하면 2002년 포르투갈처럼 무승부를 제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 지금껏 이란이 저질러온 악행을 떠올려 본다면 이란은 언제든 그런 약속 따위는 나 몰라라 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이란은 17년 전 한국을 6-2로 대파한 아시안컵 경기를 아직까지 들먹이며 “식스투” 따위의 조롱을 일삼고 있다. 그때의 악몽을 6-2 대승으로 그대로 갚아줘도 좋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반드시 이겨 그때보다 더 뼈아픈 충격을 선사해야 한다. 그게 앞으로도 언제든 이란을 만나야 하는 후배들을 위해서도 지금 선배들이 해야 할 일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바레인 선수들이 경기가 끝난 뒤 엉뚱하게도 사우디아라비아 국기를 들어 기뻐하며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던 일이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당시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이란은 비기기만 해도 월드컵 본선에 나서는 상황이었고 이란의 상대 바레인은 이미 탈락이 확정돼 있었다. 하지만 방심한 이란은 이 경기에서 결국 1-3으로 패했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바레인 선수들은 자기들 덕분에 본선 진출이 확정된 사우디 국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결국 이란은 플레이오프에서 아일랜드를 만나 패해 한일 월드컵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봐야 했다. 어찌 보면 승패를 딱 무승부로 맞추는 게 이기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오늘 이란을 상대로 닥치고 공격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기려는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하라는 뜻이다. 흥분해서도 안 되고 현명하게 경기를 해야 한다. 전쟁터에 나가는데 “장수가 철수하라고 명령할 때까지만 시간 때우며 버티자”고 하는 군대는 절대 이길 수가 없다. 우리가 ‘경우의 수’에서 현저히 유리한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확률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믿음이 될 수는 없다. 오늘 우리의 상대는 자바드 네쿠남도 아니고 레자 구차네자드도 아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무승부와 싸워야 한다. ‘무승부의 유혹’만 이겨낸다면 우리는 오늘 월드컵 본선 8회 연속 진출이라는 축제를 벌일 수 있을 것이다. 이기려다 비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무승부를 위해 경기에 나서는 축구선수는 월드컵에 나갈 자격이 없다는 걸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