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8일 안양종합운동장. 삼성 하우젠 K리그 2003 안양LG와 수원삼성의 경기가 열렸다. 이 해에 수원을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안양은 전반 39분 박요셉의 첫 골로 앞서가며 감격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게 됐다. 후반 중반이 넘어가자 초조해진 수원은 에니오(현 전북의 에닝요)와 우르모브를 투입하며 막판 공세를 이어갔고 안양은 승리를 따내기 위해 수비벽을 두텁게 세웠다. 점점 시간은 후반 종료 직전까지 흘렀다.

그런데 이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수원 나드손이 후반 41분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한 것이다. 워낙 라이벌 관계로 으르렁대던 당시 동점골을 골은 넣은 뒤 상대에게 도발했다. 유니폼 상의를 벗어 안양 팬들 앞에 던져 놓고는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동작을 했다. 팀 동료 이병근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안양에서 뛰다 법적 분쟁을 일으키면서 수원으로 이적한 서정원은 그런 나드손을 돌려 세우며 전 소속팀에 대한 예우을 지키려 했다. 안양 팬들은 나드손의 동점골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동점골을 넣고 불과 2분 뒤 에니오의 패스를 받은 나드손은 또 한 번 안양 골문을 갈랐다. 이 순간 안양종합운동장에는 홈팬의 침묵과 원정팬의 환호성이 교차했다. 믿을 수 없는 역전골을 기록한 나드손은 곧바로 광고판 위에 올라가 일반석에 앉은 안양 팬들 앞에서 대놓고 포효했다. 나드손이 보여준 ‘2분의 기적’이었다. 이 경기는 지금도 안양과 수원의 명승부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가장 극적인 경기로 평가받는다. 수원으로서는 역사에 남을 짜릿한 승부였지만 안양에는 치욕의 경기였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경기장 주변에서는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여기저기에서 작은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적지에서 극적인 승리를 따낸 수원 팬들은 푸른 유니폼을 입고 당당히 활보했고 2분 만에 두 골을 내주며 어이없는 패배를 당한 안양 팬들은 복수의 칼을 갈며 다음을 기약했다.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었다. 이렇게 내년 시즌 다시 만나자던 두 팀이 다시 만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강산이 한 번 변하고 나서야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10년 만에 만난 안양과 수원

10년이 지난 2013년 4월 18일이었다. 축구회관에서 열린 FA컵 32강 대진 추첨에서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FC안양 옆에 붙어 있는 팀 이름은 바로 수원블루윙즈였다. 안양LG의 서울 연고이전 후 무려 10년 동안 만날 수 없었던 두 팀의 만남이었다. 비록 한 팀은 K리그 챌린지(2부리그)에 있고 한 팀은 K리그 클래식(1부리그)에 있어 전력에는 차이가 있지만 이 경기를 시시하다고 할 사람은 없었다. 10년 전 그토록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바로 그 두 팀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K리그 클래식에서 2위를 달리고 있는 수원은 이겨야 본전인 부담스러운 상황이었고 안양은 이전 K리그 챌린지 경기에 주축 선수를 8명이나 제외하면서 수원을 잡기 위한 총력전을 준비했다. 안양은 야간 경기가 처음인 신인이 많아 경기 전날 조명탑을 켜놓고 훈련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10년 만의 맞대결은 다가왔다. 안양 측에서는 경기장을 관중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시내에 홍보 현수막을 부착하고 홍보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서로에게 이 경기는 단순한 한 경기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10년 전 안양에서 수원으로 이적하며 분쟁을 일으킨 바로 그 서정원이 이제는 수원 감독이 돼 돌아왔다. 서정원 감독은 이날 경기장에 들어설 때부터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안양에서 뛰던 시절 익숙하게 드나들던 그 곳을 라이벌 수원 감독 신분으로 다시 찾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수원 소속으로 안양에 세 골을 기록했고 안양 유니폼을 입고는 수원에 두 골을 뽑아낸 유일한 선수였다. 그는 수원에는 영웅이었지만 안양에는 배신자였다. 서정원 감독이 안양종합운동장을 찾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이슈였다.

당시 법적 분쟁으로 법원을 들락거리며 서정원 편에 섰던 수원 사무국장은 이제 안양의 단장이 돼 경기장을 찾은 서정원 감독과 만났다. 참 얄궂은 운명이었다. 서정원 감독이 경기장에 들어서자 10년 전 자신의 인형을 불태우던 바로 그 안양 팬들이 눈 앞에 나타났다. 10년 전 바로 그 나드손이 보여준 ‘2분의 기적’을 수원 유니폼을 입고 함께 했던 서정원 감독에게 안양종합운동장은 잊을 수 없는 장소였다. 서정원 감독은 “정말 오랜 만에 안양종합운동장에 왔는데 여기는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추억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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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골을 기록한 안양 정현윤이 경기 종류 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 (사진=FC안양)

10년 전과 비슷한 점, 다른 점

경기 전 양 팀 서포터스 대표가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10년 전 폭력사태까지 일으키며 문제가 됐던 바로 그 두 단체의 수장이 나란히 마이크 앞에 서 선의의 대결을 다짐했다. 1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또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두 대표는 “양 팀 서포터스는 서로를 존중하며 충돌을 엄격히 금지한다”는 등의 약속을 전했다. 그라운드에서는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었고 관중도 서서히 들어차기 시작했다. 경기 25분 전 양 팀 서포터스 대표가 하프라인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등을 돌리자 곧바로 양 팀의 응원전이 시작됐다. 10년 만에 한 경기장에서 안양과 수원의 이름이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시시하게 끝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안양의 공세는 위협적이었다. 날카로운 공격을 여러 차례 선보인 안양은 후반 8분 예상을 뒤엎고 선제골을 뽑아냈다. 정재용이 수원 페널티 에어리어 앞에서 한 차례 수비수를 제친 뒤 날린 슈팅은 그대로 수원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경기장을 채운 관중은 물론 안양 벤치에서도 난리가 났다. ‘거함’ 수원을 상대로 유리한 경기를 펼치며 선취골까지 뽑아냈기 때문이다. 이제 새롭게 출발한 안양이 10년 만의 대결에서 수원을 잡는 이변을 일으키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안양 골키퍼 정민교는 부상을 당해 응급실에 후송되는 등 말 그대로 사투를 펼쳤다. 그렇게 시간은 점점 흘렀다.

그런데 또 다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승리를 눈앞에 둔 안양이 후반 43분 정현윤의 자책골로 한 골을 내줬기 때문이다. 1-1이었다. 다 잡은 승리를 눈앞에서 놓친 안양으로서는 연장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10년 전 바로 그 경기를 다시 돌려보는 것처럼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시계는 이미 90분을 넘은 상황에서 곽광선의 크로스를 이어받은 서정진이 골을 뽑아낸 것이다. 경기가 끝나자 수원 선수들은 부둥켜 안았고 안양 선수들은 곧바로 그라운드에 주저 앉았다. 자책골을 기록한 정현윤은 펑펑 눈물을 쏟았다. 10년 전 그 현장에 있던 서정원 감독도 당시를 떠올렸다. “2-1이 되는 순간 그 경기 생각이 나더라고요.”

10년 전 그 경기장에서 그 두 팀이 만들어낸 똑같은 결과를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한 번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10년 전과 달라진 것도 많다. 서로 으르렁대던 두 팀 서포터스는 경기가 끝난 뒤 상대에게 박수를 보낼 만큼 성숙해졌다. 안양의 원수(?)이면서 수원과 최근 들어 라이벌로 떠오른 FC서울을 향한 공감대도 형성됐다. 경기가 끝난 뒤 안양 최대호 시장이 수원 서포터스를 향해 인사하자 수원 응원석에서는 1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안!양!승!격!” 그리고 “북!패!강!등!”이었다. 선수단 버스가 경기장을 빠져 나갈 때는 상대방 팀 버스에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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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이 돌아오면서 이제 안양-수원전의 역사도 다시 시작됐다. (사진=FC안양)

안양-수원전의 힘, 스토리의 힘

억지로 만들어낸 라이벌전과는 역시나 다른 경기였다. 실력에서는 아직 많은 차이가 나는 두 팀이지만 객관적인 실력을 넘어 라이벌 의식이 바로 이런 명승부를 연출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사이 좋은 라이벌이 어디있느냐”고 하겠지만 앞으로 서로 맞붙을 기회가 몇 번 더 생긴다면 이 경기는 그 어떤 대결보다도 더 뜨거워질 것이 분명하다. 폭력 사태만 배제된다면 앞으로 이 두 팀이 써내려갈 명승부에 더 많은 스토리가 채워질 것이다. 10년 만에 다시 만나 이런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경기를 펼쳤다는 건 지켜보는 팬의 입장으로서는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다.

정말 오랜 시간 회자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안양-수원전이 바로 어제 펼쳐졌다. 전래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뻔했던 바로 그 경기가 이제 다시 현실로 이뤄졌다는 건 우리 프로축구사에서 큰 축복이자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회다. 이게 10년 전 그 경기 영상을 다시 틀어놓은 거라고 해도 추억에 젖어 행복할 텐데 앞으로도 각본을 알 수 없는 무수히도 많은 드라마가 더 만들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벅찬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아직은 속한 리그가 달라 언제 또 만날지 기약할 수 없지만 그래서 그 기다림이 더 즐겁다.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무수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두 팀의 맞대결이야말로 K리그 최고의 상품이다.

인상 깊은 게 하나 더 있다. 어제 경기를 앞두고 그 어떤 지상파 방송사에서도 단 한 번의 홍보나 보도를 해준 적이 없다. 직접 나서서 이 경기 정보를 얻지 않는 이상은 경기가 열린다는 사실도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경기 중계 역시 그 어떤 방송사에서도 해주질 않았고 경기장에는 홀랑 벗고 나와 남정네를 유혹하는 여자도 없었다. 물론 경기가 끝난 뒤에도 제대로 이 소식을 알려주는 방송사 또한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이 경기는 축구뿐 아니라 어제 열린 모든 프로스포츠 중 가장 많은 관중을 불러 모았다. 자그마치 11,724명이다. 이게 바로 안양-수원전의 힘이요, 스토리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