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탤런트 이시영이 복싱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해 태극마크를 달게 됐다는 뉴스였다. 세상에 운동선수가 연예인이 되는 건 많이 봤어도 연예인이 운동선수가 되는 건 세계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흥미로운 일이었다. 여자 복싱 시장이 그리 크지 않지만 이건 정말 기적을 일궈낸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야 하는 멋진 일이다. 하지만 뒷말이 많다. 편파 판정이라느니, 얼굴이 예뻐 국가대표가 됐다느니 수군거린다. 편파 판정 진위 여부를 떠나 얼굴이 생명인 여자 연예인이 치고 받는 복싱에 도전해 국가대표를 넘볼 정도로 남모를 땀과 눈물을 흘렸다는 건 이제 우리 안중에 없다. 온갖 음모론과 추측이 판을 친다.

어제(29일) 또 하나의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리듬체조 손연재가 '2013 FIG 리듬체조 월드컵시리즈 페사로대회' 종목별 결선 리본에서 은메달을 땄다는 낭보였다. 리듬체조 불모지에서 일궈낸 의미 있는 성과였다. 하지만 네티즌의 반응은 황당을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B급 대회였다느니, 판정 조작이 있다느니, 종합 성적은 9위인데 한 종목 메달을 따고 언론 플레이를 한다느니 말이 많다. 손연재라는 리듬체조 선수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리본이라는 종목에서 2위라는 좋은 성적을 냈는데 축하를 보내기는커녕 오히려 욕만 한 바가지다. 다들 리듬체조 전문가 납셨다. 우리나라가 참 리듬체조 강국인가보다.

판정 논란 이시영과 B급 대회 논란 손연재

오늘은 욕 잔뜩 먹을 생각하고 쓴다. 날 물어 뜯어도 좋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하고 아닌 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복싱이나 리듬체조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들이 국가대표가 되고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딸 만큼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건 비슷한 스포츠를 다루는 입장에서 잘 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들에게 온갖 음모론을 제기하고 성적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 손가락이나 까딱거리며 “B급 대회 어쩌고, 연예인이라 어쩌고”하는 이들을 위해 기성용 선생이 아주 훌륭한 명언을 남겼다.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지.” 얼굴 예뻐서 국가대표 할 수 있다면 한 번 도전해 보고 그깟 B급 대회에서 종목별 메달 딸 자신 있으면 한 번 도전해 보시라. 아무리 시장이 작아도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다.

평소 이시영과 <연예가중계>를 함께 했던 방송인 김태진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정말 독한 애야. 방송 첫 주에 좀 버벅대더니 그 다음 주부터는 아예 대본을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다 외워 왔더라고.” 이시영은 국가대표 도전을 선언한 뒤에는 고통스러운 체중 감량을 시작했고 매일 밤 10시 이전에 지쳐서 잠들 정도로 혹독한 훈련을 이겨냈다. 운동에만 전념하기 위해 연예 활동을 잠시 중단했고 디스크 수술을 받아 허리가 불편한 상황에서도 그 고통을 참으며 목표에 도전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하나도 전하지 않은 채 편파판정만 문제 삼고 이시영을 아예 실력 미달인 것처럼 헐뜯는 건 참 비열한 짓 아닌가. 상대방 관계자 역시 “판정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논란은 끊이질 않는다. 독심술을 써 상대방 관계자의 마음까지도 추측해낸다.

더 심한 건 손연재와 관련한 비난이다. 리듬체조 불모지에서 손연재는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B급 대회건 C급 대회건 우리나라 선수가 국제 무대에 참가한다는 것 자체로도 이건 대단한 도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입상을 해도 인정을 안 하려 한다. 리듬체조가 우리나라 태권도처럼 강국이라면 또 그럴 수도 있지만 언제 우리가 리듬체조 국제 대회에서 한국 선수 뛰는 거 본 적이나 제대로 있나. 아무나 언론 플레이하고 광고 찍으면서 이런 대회 나가면 다 메달 따는 줄 안다. 아니 동네에서 열리는 운동회 100m 달리기에서 1등하고 선물로 공책 한 권 받아도 축하해주는 게 마땅한데 국제 대회에서 입상했더니 이게 또 1류 대회가 아니라고 욕들을 하신다. 이게 욕 먹을 만한 일인가. 올림픽이나 월드컵 아니면 대회도 아닌가. 졌지만 잘 싸운 선수도 박수를 받는데 대회에서 입상한 선수가 왜 욕을 먹어야 하나.

‘왕따’하는 이유가 뭐가 다른가

종합 성적도 아니고 한 종목 입상했다고 이게 별 거 아닌데 언론 플레이 한다는 비난도 많다. 하지만 올림픽 무대와 단일 종목 월드컵 시리즈는 다르다. 올림픽에서는 개인전 개인종합과 단체전 딱 두 부문에 메달이 걸려 있지만 월드컵 시리즈는 그렇지 않다. 양궁을 예로 들어보자. 양궁 역시 올림픽에서는 메달 남발을 줄이기 위해, 정확히 말하면 한국의 독실을 막기 위해 70m 거리에서 펼쳐지는 남녀 개인전과 단체전만 메달을 가리지만 원래 국제양궁연맹(FITA)이 주관하는 대회는 각각 지정된 4개 사거리가 있다. 당연히 이 사거리에 따라 메달도 다양하다. 리듬체조 역시 마찬가지다. 올림픽에서는 개인 종합만 인정하지만 월드컵 시리즈에서 종목별로 순위를 따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올림픽만 보고 리듬체조 전문가가 됐다고 착각하지 말자. 월드컵 시리즈 종목별 2위를 누가 인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시영과 손연재의 사례가 똑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들의 노력을 폄하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부의 비난은 비슷하다. 이 부분은 전혀 다르지 않다. 생업까지 접어두고 국가대표에 도전하는 연예인과 제대로 된 훈련 시설도 없는 불모지에서 국제 무대에 나서는 리듬체조 선수를 놓고 뭐 이리 뒤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들을 하나. 응원하라고 강요는 하지 않지만 애써 이들의 기사까지 찾아와 로그인하고 욕을 한 바가지 하는 수고까지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들의 아름답고도 멋진 도전이 그런 하찮은 한 줄 글로 폄하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종목별 순위를 떠나 세계에서 종합 성적으로 10등 안에 드는 선수가 왜 실력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나. 소속사의 언론 플레이? 하물며 신인 가수도 홍보를 위해 별 거 아닌 걸로 보도자료를 돌리는데 세계 10위 안에 드는 선수를 소속사가 포장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내 딸 의사로 잘 키워서 돈 잘 버는 사윗감 찾는 게 문제될 일인가.

소속사의 언론 플레이 때문에 본인 스스로 비난을 자초한 것이라는 주장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학교에서 왕따를 주도한 학생들이 “쟤는 왕따 당할 짓을 했다”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저 여기저기에서 인신공격성 비난이 넘쳐 나는 상황에서 서로 죄책감까지 나눠 가진 것 같다. 이들이 광고를 찍어 돈 버는 게 그렇게도 못 마땅한가. 학생이라고 매일 공부만 하는 건 아니다. 나라고 매일 칼럼만 쓰는 것도 아니다. 이들이 1년 내내 운동만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범법도 아니고 그렇다고 편법도 아닌데 그들이 광고를 찍어 그 돈으로 집을 사건 훈련비로 쓰건 그건 상관할 바 아니지 않은가. 세계 1류 대회에서 금메달 못 따는 선수는 언론에서 기사도 나오면 안 되고 광고도 찍으면 안 되나. 광고 찍을 시간에 운동이나 더 하라고? 밥 먹을 시간에 공부나 더하라는 말과 다를 게 없다. 그리고 리본 종목에서 2위했다는 보도가 ‘언플’인가.

그냥 싫은 거라고 왜 솔직하게 말 못하나

지금은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K리그(클래식과 챌린지로 나뉘어져 있지만 오늘은 통상적인 의미의 한국 프로축구를 칭하기 위해 K리그라는 표현을 쓰겠다)도 비슷한 행보를 걸어오고 있다. 그저 비난하기 바쁜 이들은 핑계를 찾는다. 유럽 축구보다 수준이 낮아서, 승부조작이 일어나서, 카메라 앵글이 마음에 안 들어서, 스타 플레이어가 없어서, 심지어 유니폼이 안 예뻐서라는 의견까지 다양하다. 유럽 축구보다 수준이 낮다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면 두 번째 핑계가 나온다. “어차피 조작이잖아.” 여기에 대해 또 논리로 답하면 그때는 세 번째 핑계를 든다. “중계를 보는데 촌스럽잖아.” 마지막에 가서 나오는 답은 이렇다. “아, 몰라. 그냥 싫어.” 그래. 그냥 싫은 거다. 연예인이 논란 속에 국가대표가 된 것도 싫고 비난하던 선수가 국제 무대에서 입상한 것도 그냥 싫은 거다.

자기가 그냥 싫은 이유를 합리화하기 위해 그저 핑계를 대는 거다. 이시영이 체급을 올려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하면 “거봐. 편파판정 아니었으면 지난 대회 우승도 못했을 거야”라고 할 거다. 만약 이시영이 다음 단계로 또 진입할 때는 또 다른 판정 논란 등의 비난거리를 찾을 것이다. 손연재의 경우는 더 심하다. 입상을 하면 대회가 B급이었다고 하고 심판 판정에 논란을 제기하고 종합 순위가 아니라고 폄하한다. 그래도 안 되면 “소속사의 ‘언플’이 싫어서 욕한다”고 한다. 어차피 욕할 이유를 찾는 사람들한테는 그 어떤 말도 먹히질 않는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무슨 정의를 가지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인가. 아니면 남들 다 욕하니 나도 그냥 싫어져 거기에 이유를 찾는 것인가. 내가 복싱과 리듬체조 전문가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K리그에 대한 편견을 거두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서 이건 정말 잘 안다.

당연히 개선되어야 할 것들은 있다. 이시영 판정 논란에서 보듯 아마추어 복싱의 판정 공정성은 다시 한 번 논의될 필요가 있고 손연재의 소속사도 스스로 자신들의 행동을 돌아봐야 한다. 하지만 이걸로 인해 본인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껏 만난 많은 축구인들은 온갖 유혹을 참아가면서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저 비난을 위한 핑계를 찾는 이들의 단순한 한 마디 때문에 힘들어 했다. 개선되어야 할 점은 분명히 짚어야겠지만 그게 죽어라 노력하는 이들을 인신공격하는 걸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이시영이 “아, 짜증나서 복싱 안해”라고 하고 손연재가 “더러워서 리듬체조 때려 쳐야겠네”라고 선언해야 속이 후련할 텐가. 그러면 가뜩이나 저변이 약한 여자복싱과 리듬체조가 정의로워지나. 응원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냥 싫으면 관심 끊고 욕이나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