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의환향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부상으로 신음하면서 팀에 보탬도 주지 못하던 코흘리개 신인이 이제는 당당한 국가대표가 돼 전주성으로 돌아왔다. 바로 올 시즌 전북의 수비를 책임질 정인환이 그 주인공이다. 전북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전남과 인천을 거쳐 다시 돌아온 정인환은 올 시즌 ‘닥공’의 팀 전북에서 온몸으로 상대 공격을 틀어막아야 하는 중책을 떠안았다. K리그 클래식이 개막하기 전 그를 직접 만나 고향으로 돌아온 소감을 직접 들어봤다.

정인환을 전북현대 숙소에서 직접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반갑다.

나도 반갑다. 이렇게 전주까지 내려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요즘 가장 ‘핫’한 당신을 만나는데 이 정도는 고생도 아니다. 대신 오늘 솔직하게 인터뷰에만 응해주면 된다.

마음의 각오를 하고 있다. 어떤 질문이건 성실하게 답변하겠다.

전주는 전 주에 왔나. 이번 주에 왔나.

이런 질문은 못 들은 걸로 하겠다.

알겠다. 그러면 이제부터 진지하게 이야기 해보자. 당신의 어린 시절부터 차근차근 파헤쳐 보겠다. 축구를 굉장히 늦게 시작한 걸로 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태권도와 육상을 병행했다. 운동 신경도 있었고 키도 큰 편이라 높이뛰기 대회에 나가 1등도 했고 태권도 시범단으로 여기 저기 시범도 많이 다녔다. 그런데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축구 경기를 보게 됐고 김도훈이 골 넣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축구를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반대하셨다. 애들하고 그냥 동네에서 축구하면서 김도훈 세리머니를 따라했다. 워낙 키가 커 또래 애들하고 축구를 하면 내가 다 이겼다. 초등학교 시절 내 키가 168cm였다.

지금의 내 키와 비슷하다. 그런 ‘피지컬’이면 ‘짱’으로서도 충분했을 거 같다.

아니다. 평범한 학생이었다. 반장과 부반장, 회장 등 요직을 모두 거친 학생이었다. 물론 공부를 잘해서 이런 임원이 된 건 아니다. 공약으로 “떡볶이를 돌리겠다”고 해 단일화에 성공한 뒤 몰표를 받았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진학한 뒤 축구를 하고 싶어 가출을 해 부모님을 설득했다. 일주일 동안 바로 옆에 사는 친구 집에 숨어 있었다. 축구부가 없는 중학교에 가게 됐는데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중학교 2학년 때 축구부가 있는 태성중학교로 전학을 갈 수가 있었다. 그때부터 축구와 인연을 맺게 됐다.

아무리 그래도 중학교 2학년 때는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최악이었다. 다른 애들은 다 경기에 나가는데 나는 1년 동안 리프팅 연습만 했다. 경기에 나가는 건 아예 엄두도 못 냈다. 보통 3학년이 되면 어느 정도 출전 기회가 생기지만 나는 항상 벤치에 있었다. 그러다가 몰래 허정무 감독님이 연 용인축구센터 입단 테스트를 봤다. 보여줄 건 아무 것도 없었지만 큰 키 하나는 자신 있었다. 그때 내 키가 182cm였다. 그냥 키 하나로 용인축구센터에서 관리하는 백암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때 최고였던 친구들은 다 축구를 그만뒀는데 최악이었던 나는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다. 참 세상은 알 수 없다.

원래 신체 조건이 좋으면 공격수를 시키지 않나. 당신도 공격을 했으면 참 잘 했을 것 같다.

나는 처음부터 수비수였다. 아니, 김도훈을 보면서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웠었는데 수비수가 말이 되나. 그런데 당시 백암고에는 전국에서 날고 긴다는 애들이 다 스카우트돼 모여 있었고 나는 25명의 테스트 합격자 중 턱걸이 한 신세였다. 축구를 계속 하려면 수비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골키퍼 시킨다는 걸 간신히 면했다. 아마 골키퍼가 됐으면 축구를 금방 그만뒀을 것 같다. 서 있는 게 재미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코너킥이나 프리킥 때 공격에 가담해 골 넣는 재미로 살았다. 그것마저 없었으면 정말 재미없었을 것 같다.

하긴 나도 초등학교 때 배구를 했었는데 키 작아서 수비만 했다. 그래도 운동을 계속 하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더 있나. 고등학교 시절 서전트 점프가 1m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사실인가.

사실이다. 공중에 뜨면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공중에서 뭐 먹고 천천히 내려오고 그랬다. 공중에서 2단 점프도 하고 학교 농구 골대에서 덩크슛도 했다. 덩크슛하는 축구선수 본 적 있나. 그게 바로 나다. 어릴 적부터 높이뛰기와 태권도를 해서 그런지 점프에는 자신이 있었다. 떠 있는 게 그냥 신났던 때다. 축구할 때도 발은 안 쓰고 머리만 썼다. 감독님이 “축구선수는 머리를 써야된다”고 했는데 나는 그게 “생각하는 축구선수가 되라”는 뜻인 줄도 모르고 그냥 공이 오면 머리로 박았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발목을 다친 이후로는 서전트 점프가 좀 줄긴 했다.

축구선수가 덩크슛 연습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뭔가 웃기다. 그렇게 덩크슛만 하던 당신이 축구로 주목받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나.

보통 고등학교 3학년이 돼야 경기에 나설 수 있는데 백암고가 창단 팀이어서 운이 좋게도 1학년 때부터 경기에 나설 수가 있었다. 경험이 조금씩 쌓이고 2학년이 되니 기량이 부쩍 늘었다. 축구를 시작한지 3년 만에 17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에도 뽑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키빨’이었다.

인생을 사는데 키는 참 중요한 것 같다. 나도 요즘 여성들을 만나면 키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낀다. 당신은 그렇게 ‘축구 명문’ 연세대에 진학했다.

원래는 대학에 가지 않고 바로 프로팀에 가고 싶었는데 연세대에서 입학 제의가 왔고 1년만 학교에 다닌 뒤 프로팀에 가기로 학교와 약속을 했다. 그런데 입학하니 “연고전에서 이기면 프로팀에 보내주겠다”고 말을 바꾸더라. 별 수 있나. 죽기 살기로 막아서 연고전에서 2-0으로 이겼다. 그러니 학교에서도 할 말이 없는 거다. 그래서 1년 뒤 프로팀에 입단할 수 있었다.

나는 연세대에 가고 싶어도 못 갔는데 그 좋은 대학을 1년 만에 그만두다니….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내가 연세대에 못 간 거다.

나는 당시만 해도 축구선수다 다들 당연히 프로팀에 가고 당연히 대표선수가 될 줄 알았다. 그래서 ‘프로팀 가면 금방 대표팀에 뽑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면 아주 건방지고 잘못된 생각을 한 거다.

전북에 입단하고도 그 거만한 생각은 계속 이어졌나.

아니다. 그런 마음을 바로 접었다. 에이전트가 “전북에서 널 데려가기로 했다. 너한테 거는 기대가 크다”고 했고 그렇게 (염)기훈이 형, (권)순태 형, (최)철순이, (이)현승이와 함께 전북에 입단하게 됐다. 그런데 전북에 와 보니 내가 얼마나 자만심에 젖어 있었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최고라는 생각을 했는데 전북에 오니 잘하는 선배들이 너무 많았다. (최)진철이 형을 보면서 내가 아직 멀었다는 걸 느꼈다.

당신은 전북에 처음 입단할 때만 하더라도 ‘제2의 최진철’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전북에서 보여준 게 별로 없다.

부상이 너무 많았다. 특히 광대뼈가 함몰되는 큰 부상을 당해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연습경기에서 (김)형범이 형이 코너킥을 올렸는데 내가 공중에 제대로 떠 허리를 완전히 제쳐 헤딩슛을 날렸다. 그런데 공을 머리로 받으면서 나보다 키가 작았던 수비수 머리를 들이받았다. 골이 들어가고 나는 그대로 쓰러졌는데 동료들이 “골 들어갔으니 그만 아파하고 이제 일어나라”고 하더라. 그런데 얼굴을 만져보니 오른쪽 광대뼈가 없었다. 곧바로 병원에 실려 가서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다.

그래서 결국 성형 미남이 된 건가.

광대뼈에 보형물을 넣어서 그런지 이쪽 얼굴이 더 마음에 든다. 사진을 찍을 때도 이쪽으로 찍는다. 성형 미남 맞다. 지금도 이쪽 피부에는 감각이 없다.

‘성형’은 맞는데 ‘미남’까지는 잘 모르겠다.

남들이 알아서 판단할 것이다. 사실 다치기 전에 베어벡 감독님이 대표팀에도 불러주시고 홍명보 감독님도 아시안게임 선수 명단에 나를 포함시켰다. 그런데 나는 아직 내가 대표팀에 갈 실력도 아니었고 준비도 덜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방황할 때였다. 이 와중에 큰 부상을 당하니 축구하는 게 싫었고 결국 부모님한테도 축구를 그만두겠다고 통보했다. 그런데 홍명보 감독님께서 전화를 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같이 축구하자. 광대뼈가 다 아물지 않아도 널 아시안게임에 데리고 갈 거다.” 감독님의 믿음 덕분에 다시 마음을 잡았다.

홍명보 감독이 선수 하나 살린 거다. 아마 그때 축구를 그만뒀으면 당신은 지금쯤 나처럼 PC방이나 당구장을 전전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2008 도하 아시안게임에 나갈 때의 몸 상태는 어땠나.

더 쉬었어야 했는데 아파서 누워 있다가 다친지 두 달 만에 정신없이 아시안게임에 나갔다. 광대뼈가 막 덜렁덜렁 할 때였다. 파리가 내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무서워서 피할 정도로 충격도 컸고 고통스러웠다. 그 상태로 첫 경기와 3·4위전 이란전에 나갔다. 그런데 대회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운동을 할 만하면 부상을 당했다. 이전까지 부상은 나와 먼 이야기였는데 이상하게도 부상이 한꺼번에 왔다. 뛰다가 혼자 발목이 뒤틀리기도 했다. 경기에 나가면 매번 다치니까 ‘제발 안 다치게만 해 달라’고 기도도 많이 했다.

부상으로 전북에서 2년 동안 23경기에 나간 게 전부였던 ‘유리몸’ 당신은 2008년 전남으로 이적하면서 주전으로 도약하게 됐다. 이 ‘신의 한 수’는 당신의 선택이었나.

아니다. 전북에서 계속 다치고 기회를 못 잡고 있을 때 전남 허정무 감독님한테 연락이 왔다. “전남으로 불러 줄 테니 와서 기회를 한 번 잡아보라”는 것이었다. 내가 용인축구센터에 입단할 수 있도록 해주신 은사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정말 큰 마음 먹고 전남행을 확정지은 뒤 이삿짐을 싸고 있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허정무 감독님이 전남을 떠나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됐다는 것이었다. 전남 선수단 합류 이틀 전이었다. 전남에 가서는 허정무 감독님 얼굴도 못 봤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완전히 낚인 거다.

원래 미안하다는 말을 잘 안하시는 분이다. 전화 통화를 했는데 “열심히 하고 있으라”고만 하셨다. 막막했지만 새로운 팀에서 열심히 하는 수 말고 다른 방법이 뭐 있나. 전남에서도 첫 시즌에는 팔도 부러지고 피로 골절로 고생했지만 2년차 때부터는 부상 없이 뛸 수 있었다. 첫 시즌에 부상을 입고도 21경기에 나서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부상도 결국에는 실력 아닌가. 한 순간 부상의 터널에서 벗어났다는 건 나름대로의 노력이 있었을 것 같다.

그때가 삼재였다. 삼재가 지나니 부상이 사라지더라.

부활의 이유가 “삼재가 끝나서”라는 축구선수는 또 처음 본다. 그러다 2011년 시즌을 앞두고 또 다시 허정무 감독의 부름을 받고 인천에 입단하게 됐다. 허정무 감독에게 또 낚일 것이라는 걱정은 안 했나.

그때도 허정무 감독님께 전화가 왔다. “인천에서 같이 하자”는 내용이었는데 한 번 이미 당한 게 있어서 당연히 불안했다. 전남에서 주전으로 뛰고 있는데 또 불러주셔서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나는 허정무 감독님을 믿기 때문에 인천행을 굳힐 수 있었다.

거의 ‘무한정무교’ 신자 같다.

나를 어린 시절에 발탁하신 아버지 같은 분이다. 많이 혼났지만 나는 감독님을 믿는다. 엄한 성격이시지만 툭툭 던지는 말 속에 칭찬이 있다. 칭찬이 “지금 잘하고 있을 때 더 열심히 하라”는 거다. 아무 말씀 없으시다는 건 최고의 칭찬이다. 인천에 가서도 축구 못한다고 혼도 많이 났다. 나에게 ‘이순신 장군’이라는 별명도 지어주셨다. 키 큰 애가 운동장에 서 있는다면서 “네가 무슨 이순신 장군이냐”고 하시더라. 부지런히 뛰라는 의미였다.

당신은 인천에 입단한 뒤 욕을 참 많이 먹었다. 거의 1년째 욕 먹고 있는 내가 당신 기분을 잘 안다.

인천에서 데뷔한 안재준과 트레이드돼 인천에 오게 됐다. 당연히 인천 팬들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거기다가 임중용 선생님이 오래 쓰시던 등번호 20번을 내가 물려 받았다. 임중용 선생님이 플레잉 코치가 된 뒤 20번을 내놓으시면서 48번을 달았고 내가 그 20번을 달게 됐다. 그때는 동료들이 “20번은 선택하지 말라”고 하는 의미를 잘 몰랐다. 원래 수비수들이 20번을 다는 경우가 많아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다가올 불행을 몰랐다. 아니, 아끼던 선수와 트레이드 된 생판 모르는 놈이 아직 은퇴도 안 한 레전드 번호까지 빼앗은 것처럼 보이니 팬들이 얼마나 나를 싫어할까. 2011년에는 욕만 먹었다.

가장 심하게 들은 욕은 뭔가.

‘쓰레기’와 ‘버러지’였다.

저런, 나도 비슷한 욕을 많이 듣고 있다. 마음 고생이 심했겠지만 오히려 더 이를 악물고 뛰는 계기가 됐을 것 같다.

감독님이 팬들과 간담회를 했는데 팬들이 “정인환이 도대체 안재준에 비해 나은 게 뭐가 있느냐. 왜 둘을 트레이드 했느냐. 왜 20번을 줬느냐”는 말을 많이 했단다. 감독님이 간담회가 끝난 뒤 나를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욕 먹기 싫으면 똑바로 해라.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라.” 정말 악에 받쳐서 경기에 나섰다. 나를 욕하는 분들의 마음을 돌려 세우기 위해서 운동장에서 모든 걸 쏟아냈다.

2012년에는 인천 주장이 됐다. 역시 초등학교 시절 요직에 몸담았을 때처럼 선심성 공약을 남발한 건가.

그건 아니다. 투표로 주장에 선임이 됐는데 사실 그전부터 2012년에는 주장을 맡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올해 못하면 축구할 자격도 없으니 군대에 가자는 독한 마음을 먹고 책임감을 갖고 싶었다. 물론 초등학교 때처럼 주장 선거에 떡볶이를 돌리거나 뇌물을 푼 건 아니다.

2012년은 당신에게 참 의미 있는 한 해일 것 같다.

그렇다. 시즌 초반에는 경기가 정말 안 풀렸다. 이길 경기는 비기고 비길 경기는 졌다. 골도 어이없게 먹었다. 주장 완장을 차고 있으니 다 나만 보는 것 같고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선수들끼리 모여서 뭐가 문제인지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렇게 대화를 하고 이기려는 마음이 간절해지다보니 서서히 우리 경기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허정무 감독님이 그만두신 뒤 경기력이 좋아졌다고 지적하지만 인천의 전술과 선수들은 그전에 이미 허정무 감독님이 만들어 놓으신 거다. 결국 인천의 상승세를 이끈 (설)기현이 형하고 (김)남일이 형도 허정무 감독님의 영입 작품 아닌가.

아쉽게 상위 스플릿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인천의 기세는 대단했다.

상위 스플릿을 확정짓는 마지막 경기에서 결국 제주와 0-0으로 비기고 말았다. 경기 전에는 ‘경우의 수’를 따지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막상 제주전에 시작되니 그저 많은 관중 앞에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우리끼리 좋은 경기를 하자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행복했고 스플릿 경쟁 중이던 경남의 경기 결과는 따지지도 않았다. 결국 0-0으로 비기고 경남이 승리를 거둬 우리가 하위 스플릿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팀 분위기가 너무 좋아 아쉬운 마음은 덜했다. 이때부터는 경기에 나가면 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국가대표하고 붙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현이 형과 남일이 형도 “2002년 월드컵 이후 이렇게 신나고 즐겁게 축구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 두 형은 내가 전북으로 이적할 때도 "같이 인천에서 더 재미있게 축구하자“면서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설기현과 김남일이 단단히 삐친 것 같다. 전화도 안 받는 거 아닌가.

그 정도는 아니다. 전화는 받아준다. 하지만 무척이나 섭섭해 하고 있다.

정말 궁금한 게 있다. 하위 스플릿으로 떨어지면 승리 수당에도 변동이 있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덜 강한 팀과 맞붙는 하위 스플릿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거 같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때 수당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께 드렸다. 우리가 한창 못 이길 때는 QPR 같았는데 QPR도 늦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꼭 QPR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죽어라 해도 안 되는 팀도 있다. 어찌 됐건 당신은 2012년 인천 상승세의 일등공신이 됐다. 팬들의 반응도 달라졌을 것 같다.

1년 전 ‘쓰레기’, ‘버러지’라고 했던 팬들이 1년 만에 ‘네가 최고다, 인천에 남아달라’고 했다. 나를 비난했던 분들이 나를 인정하게 됐다는 점이 너무 기분 좋았다. 이전까지는 대표팀에서 나를 부르면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때부터는 대표팀 욕심도 생기기 시작했다. 부상을 당해 축구를 그만두고 싶었던 때도 있고 욕도 많이 먹던 때도 있었는데 이런 시기를 겪으니 내 스스로 성장했다는 걸 느꼈다. 태극마크를 달고 싶었다.

대표팀 발탁 소식을 접하던 그 순간을 기억하나.

물론이다. 지난해 8월이었던 것 같다. 대전과의 원정경기를 앞두고 몸을 푼 뒤 라커룸에서 선수들과 파이팅을 외치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사장님이 급하게 뛰어 오시더니 “정인환 어딨어?” 이러시는 거다. 나는 무슨 사고라도 친 줄 알았는데 “네가 드디어 국가대표가 됐다”면서 뛸 듯이 기뻐하시더라. “인천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일”이라면서 “축하한다”고 하셨다. 당연히 나도 기뻤지만 마음이 흔들렸다. 중요한 대전 원정을 바로 앞두고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너무 들떠 있어서 경기 전에 ‘집중하자’고 수도 없이 외쳤다.

전북에서 신인 시절 만났던 최강희 감독과 다시 만나게 됐다. 그때는 꼬마였지만 이제는 어엿한 국가대표가 된 것 아닌가.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다.

최강희 감독님을 만났는데 눈물이 날 뻔했다. 신인 시절 나에게 많은 기대를 하셨지만 내가 부상이나 당하고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주지 않았나. 그런데 최강희 감독님께서 딱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다. “너를 다른 팀에 보낸 걸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너를 뽑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

“뽑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에는 그만큼 잘 성장해서 고맙다는 뜻이 내포된 것 아닌가. 참 멋진 감독의 참 멋진 말이다.

평소에는 동네 아저씨 같은 분이다. 장난도 잘 치시고 엉뚱하시다. 선수들하고 미니 게임을 할 때면 직접 같이 뛰시다가 선수들과 막 싸운다. 분위기를 굉장히 좋게 만드는데 탁월하신 감독님이다. 잘하지 못하더라도 감독님이 원하는 걸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만 보이더라도 참 선수들을 예뻐하신다.

잠비아와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기분이 어땠나.

풀타임으로 경기에 나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후반 43분에 교체 투입돼 2분 정도 뛸 줄 알았다. 그런데 경기 전 미팅 때 선발 명단을 통보받고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선발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평소 롤모델로 여기던 (곽)태휘 형과 함께였다. 그 형이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면서 수비수로서의 꿈을 키웠고 그 형과 같이 경기에 나서는 게 소원이었는데 믿어지질 않았다. 무척 긴장한 채 90분을 마친 것 같다.

대표팀에서 만난 한참 어린 후배 기성용과 이청용에게 무척 깍듯하게 대한다고 들었다.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린데 축구만 잘하면 형 아닌가. 형처럼 모시고 있다. 오시기 전에 물도 따라놓고 마그네슘도 타 놓고 기다린다. 대표팀은 해외파와 국내파로 나뉘는데 그건 내가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게 그 형들도 더 편하지 않을까. 많이 친해져서 대표팀에서 같이 축구 게임도 하고 대화도 많이 나눌 수 있게 됐다.

어느 정도 친한 사이인가.

‘카톡’ 주고 받는 사이 정도다.

그 정도라면 내가 며칠 전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여자와의 사이와 다를 게 없다.

사실 전화 통화는 아직 조금 어색하다.

‘카톡’은 자주 하나.

(손)흥민이 형하고도 자주 ‘카톡’으로 이야기한다. 골 넣으면 “이번 골 기가 막혔다”고 ‘카톡’을 날린다. 지난해 말 내가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니 형들한테 “축하한다”고 ‘카톡’이 왔다. 원래 (기)성용이 형이 올림픽 대표팀 시절 먼저 전화번호를 ‘따’ 갔는데 그 이후 연락이 없었다. 그 사이 성용이 형이 너무 잘돼서 내가 먼저 연락하기도 좀 그랬고 나를 기억 못할 것 같기도 했었다. 그런데 대표팀에서 친해지고 서로 ‘카톡’이 오고 가니까 ‘아, 나를 알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부럽다. 나는 며칠 전 나이트클럽의 그녀에게 보낸 ‘카톡’의 숫자 ‘1’이 없어졌는데도 답장이 없다.

힘내라.

고맙다. 이번 크로아티아와의 평가전에서 후반에 교체로 투입됐지만 대표팀을 대패에서 구하지는 못했다. 직접 강팀과 맞붙어보니 느낌이 어떤가.

확실히 왜 크로아티아가 강팀인지 알 수 있었다. 순간적인 스피드와 공을 주고 받는 센스가 남달랐다. 사실 K리그에서 포백 수비 라인 중 한 명만 바뀌어도 수비 조직력이 흔들리는데 대표팀은 현재 포백 적임자를 찾기 위해 매번 수비 라인이 바뀌는 상황이다. 그렇게 실점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스트 멤버를 구축해 꾸준히 발을 맞추면 충분히 승산은 있다. 우리 청용이 형, 성용이 형, 흥민이 형, (김)보경이 형 등 잘하는 해외파 형들 많지 않나.

당신이 실점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앞에서 수비를 안 해주고 나와 태휘 형만 수비를 하니까 사실 경기를 하면서 어느 정도 짜증이 났다. 그래서 그냥 “다 나가”라고 했다. 어차피 평가전이니 하고 싶은 대로 공격하고 골 먹어도 마음에 담아두지 말자고 했다. 결과로 욕을 먹을 수는 있지만 경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평가전이어서 전술보다는 교체 선수만 계속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서로 안 풀렸지만 많은 걸 배운 경기였다. 이런 팀하고 계속 경기를 하고 또 져봐야 느낀다. 비록 0-4로 졌고 나도 많은 단점을 발견했지만 훌륭한 보약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정수와 곽태휘의 기량이 예전같이 않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가장 옆에서 이 둘을 지켜보는 입장으로서는 어떤가.

아직도 나한테는 배울 게 많은 선배들이다. 이 형들은 월드컵도 경험했고 후배들에게 전달할 노하우가 많다. 나는 이들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영광이지만 준비를 잘해 좋은 경쟁을 하고 싶다. 올림픽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올림픽 멤버들과의 경쟁도 더 심해졌는데 특히 홍정호하고 한 번 호흡을 맞출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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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환은 5년 만에 다시 전북으로 돌아왔다. 5년 동안 세상도 변했고 정인환도 변했다. (사진=전북현대)

이제 전북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인천에서 전북으로 이적할 때 잡음도 꽤 있었다.

상당히 예민한 부분이다. 인천에서 뛰던 지난해 시즌 중반 카타르 팀에서 이적 제의가 왔다. 금전적인 유혹도 있었지만 워낙 중요한 시기여서 거절했다. 카타르에 가면 새로운 선수들과 새로운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큰 돈의 유혹은 신경 쓰지 않는다. 대표팀에 막 뽑히는 시기에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축구를 하면서 돈 때문에 움직인 적은 없다. 나는 명예가 먼저다. 이제 조금씩 명예를 쌓아가고 있는데 이 명예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인천과의 관계는 다 말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또 말이 많아질까봐 굉장히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점이다. 나도 피해자고 인천도 피해자다. 이적 과정에서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이 기사로 나오면서 팬들이 좀 화가 났다. 하지만 나는 인천에서 축구를 할 때가 지금껏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라는 점은 꼭 말씀드리고 싶다.

전북에 입단하자마자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브라질 전지훈련장에서 기존 선수들이 준비한 몰래카메라에 당하고 말았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난처한 상황이었다.

자세히 설명을 좀 해줄 수 있나.

기존 선수들이 이미 브라질에서 전지훈련 중이었고 나와 정혁, 이규로 이 셋이 뒤늦게 브라질에 합류했다. 첫날 훈련장에 갔더니 “시차적응도 안 됐으니까 조깅 10분하고 그늘에 앉아 있으라”는 거다. 이적생 세 명하고 이미 먼저 이적해 팀에 합류한 (이)승기가 ‘바람잡이’로 같이 앉아 있었다. 참 치밀한 사람들이다. 우리 셋만 있으면 의심할까봐 ‘바람잡이’까지 뒀다. 그러면서 “감독님이 지시하면 수영장으로 가라”고 했는데 파비오 감독대행님이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는 거다. 알고 보니 감독님도 다 짠 거였다. 감독님만 그런 게 아니라 팀 닥터와 주무 등 모든 사람들이 다 연기를 하고 있었다. 인사를 해도 웃지도 않고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인사를 받으면서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연기 천재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걸 일주일을 준비했단다. 머리 박는 것부터 따귀 때리는 것까지 우리가 완벽히 속는 각도를 다 연구했다고 한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브라질에서 축구만 해 참 다들 심심했던 모양이다. 당시 돌아가던 상황에 대해 이야기 좀 해달라.

그 더운 날 우리만 그늘에 앉아 있었고 감독님은 우리를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다른 선수들은 슈팅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조금씩 우리 입장이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최)은성이 형이 우리를 보더니 “이 새끼들 오자마자 그늘에 쳐 앉아 있어?”라고 욕을 했다. 엄청 긴장이 돼 30분 동안 슈팅 연습하는 선수들 볼보이를 자처했는데 슈팅 연습 하는 동안에도 분위기가 계속 안 좋았다. 그리고 훈련 뒤 다들 모인 자리에서 감독님이 작전대로 싹 빠지고 은성이 형이 (이)강진이한테 막 욕을 했다. 그리고는 우리게에 화살을 돌렸다. “야, 이적생들 너희는 오자마자 태도가 그게 뭐야?” 그러기에 연신 “죄송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이거 참 흥미진진해진다.

은성이 형이 “주장이 알아서 해”라고 하면서 (이)동국이 형한테 넘기자 동국이 형이 머리를 박으라고 했다. “박아. 일어나”를 계속하다가 골대까지 뛰어서 선착순으로 빨리 들어오라고 지시를 했다. ‘전북에 괜히 왔다. 내가 없는 사이에 전북이 이렇게 많이 바뀌었나. 원래 전북이 이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죽어라 뛰었다. 머리를 박고 있는데 (김)신영이가 갑자기 동국이 형한테 대들더니 “국대면 다야?”라고 하더라. 순간 이런 팀 분위기에서 어떻게 생활할지 막막해졌다. 동국이 형이 신영이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둘이 하이파이브를 한 거였다. 그랬더니 신영이가 “계급장 떼고 한 번 붙자”면서 “상수야. 짐 싸서 가자”고 하더라. 나는 ‘상수’라는 선수가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주무 이름이 ‘상수’였다. 정말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 욕을 하면서 싸울 것처럼 하더니 닭싸움을 하는 순간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당신이었으면 울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진짜 짐 싸서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몰래카메라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바닥에 쓰러져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바로 시차적응이 끝났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이적생을 반겨주는 동료들이 고맙게 느껴졌다. 원래 이렇게 이적생을 챙겨주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신경써주고 준비했다는 게 감동적이었다. K리그 우승을 경험한 팀이어서 그런지 분위기가 너무 좋다. 몰래카메라 때문에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동국이 형은 신영이가 은연 중에 “국대면 다야?”라고 한 게 진심을 이야기한 것 아니냐고 하더라.

원래 은연 중에 진심이 나오는 법이다. 김신영의 그 말은 앞으로도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다시 전북에 돌아온 지금 느낌은 어떤가.

일단 환경은 예전과 비슷하다. 올 6월이면 지금 짓고 있는 클럽하우스로 옮길 예정이지만 아직 숙소는 예전 그대로다. 식당 아저씨와 아줌마도 그대로고 심지어 숙소 앞 슈퍼 아줌마도 그대로다. 과거로 돌아온 것 같다. 다들 “잘 돼서 돌아와서 너무 좋다”고 해주셔서 감사하다. 그동안 팀은 우승도 하고 늘 상위권에 머물 만큼 성장해 부담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팬들이 출정식에서 “무조건 우승하세요. 못하면 알죠?”라고 하더라. 전북이 우승하는데 힘이 되고 싶다. 죽어라 하는 수밖에 없다.

지난해 케빈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당신을 가장 싫어하더라. 그런데 이제는 같은 팀에서 뛰게 됐다.

사실 케빈하고 동국이 형이 가장 위협적인 공격수였는데 이제는 같은 팀에 있게 돼 든든하다. 특히 케빈은 지난해 인천과 대전이 맞붙었을 때 나하고 많이 부딪혔다. 나는 상대를 좀 거칠게 다루는 스타일인데 케빈이 거기에 말렸다. 전북에 와서 이야기를 해봤는데 나와 마찬가지로 “가장 까다로운 너와 한 팀이 돼 다행이다”라고 하더라.

전북에서 가장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는 선수는 누구인가.

(김)상식이 형을 따를 자가 없다. 상식이 형은 말투 자체도 웃기고 단어 선택도 굉장히 저렴하다. 가장 재미있는 형이다.

그렇다면 전북 선수 중 자신의 외모 순위를 매기자면.

글쎄, 3등 정도는 하는 것 같다. 내 앞에 두 명은 동국이 형하고 승기다.

내가 가장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이범수가 당신의 뒤라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러면 내가 4등이라고 치자.

아니다. 홍정남도 잘생겼다.

그러면 5등으로 하겠다.

임유환도 있고 심우연도 있다.

그냥 넘어가자.

알았다. 어찌 됐건 전북은 ‘닥공’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그만큼 수비수로서는 쉽지 않은 팀이다.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와 상대하는 팀들은 한껏 선수들을 내렸다가 역습 한방을 노린다. 반대로 우리는 대부분이 상대 진영으로 올라가서 플레이를 한다. 그러다보니 공격을 전개하다가 빼앗기면 그대로 역습을 허용한다. (심)우연이 형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수비에서 위기 상황도 많이 나오고 일대일 위기도 많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걸 버텨야 하는 게 전북 수비수의 임무라고 했다. 전북의 수비수로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지만 원래 강팀은 다 공격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아닌가. 우연이 형하고 짜증내지 말고 버틸 때까지 버티자고 했다. 우리가 살려면 골을 먹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다. 올 시즌 당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부상 없이 많은 경기에 나서서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것이 나의 목표다. 아직 성인 무대에서 우승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이번에는 꼭 우승을 한 번 해보고 싶다. 그리고 대표팀이 월드컵 본선 무대에 나가는 데 일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