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일을 쉽게 잊는다. 며칠 전 내가 택시를 타고 가다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직접 차를 몰고 가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는지도 헷갈리는 이들이 있다. 그만큼 우리는 머리가 나쁜 건지 일부러 잊는 건지 과거를 금새 지운다. 하지만 지난해 7월 K리그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승부조작이라는 무시무시한 폭풍이 K리그에 휘몰아 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배신감을 느꼈고 분노했다. 그런데 이때 한줄기 희망으로 등장한 이가 있었다. 바로 상주상무의 이윤의였다.

지난해 7월 상주상무는 FC서울과의 경기를 앞두고 승부조작 여파와 골키퍼의 경고 누적 출장 정지로 골문을 지킬 선수가 없었다. 일반 사병 중 골키퍼 출신을 수소문해 수원에서 뛰던 권기보가 군 복무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해병대 총기 난사 사고 여파로 차출에 실패했다. 결국 사흘 동안 필드 플레이어인 이윤의에게 골키퍼 훈련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K리그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승부조작의 아픈 현실이 고스란히 경기장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 일은 K리그뿐 아니라 이윤의에게도 무척이나 의미 있는 일이었다. 2010년 강원에 입단해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던 이윤의는 상무에 입단한 뒤에도 그라운드를 밟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디펜딩 챔피언’ 서울과의 경기에서 필드 플레이어도 아닌 골키퍼로 경기에 나선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필드 플레이어로 K리그 무대에 서는 걸 수없이 그렸던 이윤의는 팔자에도 없는 골키퍼로 K리그 데뷔전을 치러야 했다. 이윤의는 전반 11분과 27분 데얀의 오른잘 슈팅을 연달아 막아내는 등 슈퍼세이브를 선보였지만 결국 후반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며 팀의 2-3 패배를 지켜봐야만 했다. 비록 이윤의는 승리의 주역이 되지는 못했지만 필사적인 방어를 선보이며 승부조작으로 분노하고 있는 팬들에게 찡한 감동을 선사했다. 경기가 끝난 뒤에는 포털사이트 검색 순위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반응이 대단했다. 이윤의는 경기가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군인은 어떤 임무건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한다.”

이후 이윤의는 또 다시 잊혀진 선수가 됐다. 공격 포인트나 눈부신 경기력이 아닌 특수한 상황으로 잠시 주목을 받았던 그는 상주가 정상적인 상황으로 돌아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잊혀졌다. 이후 상주 소속으로 두 경기에 더 나섰지만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윤의는 혹독하지만 특별했던 군 생활을 마치고 최근 원소속팀인 강원에 복귀했다. 물론 그가 팀에 돌아왔지만 강원에서의 활약을 기대하는 이도 그리 많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이윤의가 주목받았던 건 처한 상황이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롭게 강원 지휘봉을 잡은 김학범 감독은 군대에서 제대한 이윤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잘 다듬는다면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목받는 선수는 아니지만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이윤의에 대해 평가했다. 이건 김학범 감독의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나는 어제(16일) 열린 인천과 강원의 현대오일뱅크 2012 K리그 31라운드 경기를 앞두고 양 팀 선발 명단을 확인하다가 무척이나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바로 이윤의였다. 필드 플레이어 중에서는 그 누구도 갖고 있지 못한 3실점의 주인공 이윤의가 강원의 선발 멤버에 포함된 것이었다. 물론 그의 포지션은 골키퍼가 아닌 오른쪽 미드필더였다.

최근 상무에서 전역한 선수 중에는 이윤의가 원소속팀에서 처음으로 경기에 나서는 것이었다. 군대에 가기 전만 하더라도 출장 기록이 전무했던 이윤의가 아니었다. 그는 혀를 내두를 만한 플레이는 없었지만 전반전 내내 오른쪽 측면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선보이며 골키퍼가 아닌 필드 플레이어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전반전을 마친 뒤 데니스와 교체됐지만 그가 강원 복귀 후 치른 첫 경기에서 선발로 출장할 수 있었다는 건 엄청난 변화이자 발전이었다. 측면 수비수였지만 상무에서 골키퍼까지 소화했던 그에게 측면 공격수의 임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윤의는 상무 시절 까라면 까던 선수였으니까.

경기가 끝난 뒤 이윤의를 만났다. 팀이 인천에 1-2로 패해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강원 데뷔전을 위해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감독님이 수비 가담을 적극적으로 지시하셨는데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는 그는 “상무에서 나온 뒤 바로 강원에 복귀해 또 다른 단체 생활이 시작됐기 때문에 아직 제대가 실감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제대한 뒤 아직 군대에 가지 않은 동료들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한결 마음이 편하다”면서 웃었다. 제대 후 주전 경쟁이 남아있지만 강원에서 의미 있는 데뷔전을 치렀다는 사실은 무척 즐거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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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의는 어제(16일) 열린 K리그 경기에서 강원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출장했다. (사진=BITPHOTO)

이윤의는 그러면서 상무 시절 힘겨웠던 골키퍼 데뷔전을 떠올렸다. “골키퍼 데뷔전이 너무 성대(?)했다. 그래서 지금 필드 플레이어로 나서는 건 부담감이 없진 않지만 조금 여유가 있다. 아마 골키퍼로 나선 경기가 없었다면 오늘 무척이나 긴장했을 것이다. 상무에서의 경험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하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손에 제대로 맞지도 않는 골키퍼 장갑을 낀 채 허무하게 들어가는 골을 보며 무릎을 꿇고 좌절하던 이는 시간이 흐르고 이제 제자리로 돌아와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1년 전 승부조작 사건으로 휘청이던 K리그가 다시 제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이윤의는 그저 어설픈 몸짓으로 어떻게든 한 골이라도 막아보려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의 원래 모습은 이런 게 아니다. 이윤의는 다른 필드 플레이어와 마찬가지로 잘 달리고 공 잘 차는 그런 선수다. 골키퍼 데뷔전을 임팩트가 워낙 강렬했지만 이 모습을 지우고 필드 플레이어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그래서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어제 열린 그의 강원 데뷔전은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해보였다. 역시 그에게는 골키퍼 장갑이 아니라 필드 플레이어 유니폼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이렇게 잘 뛰는 선수를 골문에 묶어 두어야 했던 지난해 K리그의 현실이 슬프면서도 이윤의가 지금이라도 다시 달릴 수 있게 됐다는 점이 무척 기쁘다.

이윤의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왜 중요한 스플릿 시스템이 시작된 이 시점에서 이제 막 K리그에서 5경기에 나선 게 전부인 선수를 칼럼으로 소개하는지는 그의 이 마지막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상무에서 제 포지션이 아닌데도 헌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강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독님이 어떤 역할을 맡기던 최선을 다해 팀을 위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겠습니다. 저는 까라면 까는 선수입니다.” 1년 전 원치도 않는 관심을 받으며 홀로 골문 앞에 서 있던 외로운 이 선수는 이제 원소속팀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비상을 꿈꾸고 있다. 이윤의가 날아올라 ‘땜빵 골키퍼’의 전설을 써내려가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