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개인적으로도 무척 힘든 시기였다. 축구 대표팀이 졸전을 펼치면서 “축구장에 물 채우라”는 말이 유행했다. 올림픽 축구와 관련 없는 다른 축구 기사를 써도 돌아오는 건 싸늘한 반응 뿐이었다. “됐고. 축구장에 물이나 채워.” 축구는 민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축구가 다른 종목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세금을 지원 받는 다는 근거 없는 낭설이 떠돌아 현실을 바로 잡는 칼럼을 써도 돌아오는 반응은 똑같았다. “됐고. 축구장에 물이나 채워.” ‘김현회 축협 직원설’도 있었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홍명보호는 며칠 앞으로 다가온 2012년 런던올림픽에 나설 예정이다. 4년 전의 아쉬운 결과를 갚아줄 기회다. 그런데 요새 사실 좀 걱정되는 게 있다. 올림픽 축구 대표팀이 메달을 따지 못할 경우 이는 곧 실패로 치부될 것만 같은 분위기 때문이다. 개막을 앞두고 자신감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눈높이가 너무 높아져 있다는 점은 우려스럽다. 아무리 감동적인 경기를 펼쳐도 결국 메달이라는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면 거센 비난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축구 대표팀의 메달 색이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껏 올림픽에서 거둔 최고 성적은 8강이었다. 이번 홍명보호의 선수 구성을 높고 보면 과거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선수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긍정적이다. 과거 8강 이상의 성적을 거둘 수 있는 충분한 재능을 지녔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껏 올림픽 축구에서 단 한 번도 메달을 딴 적이 없다. 도전 그 자체가 쉽지 만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언론과 팬들이 메달 획득을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는 건 불안하다. 지금까지 매번 메달 사냥에 실패했던 올림픽 대표팀은 절반 이하의 확률에 도전하고 있는 셈이다.

메달 색은 나중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홍명보호가 지난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3·4위전 이란과의 경기와 같은 투혼을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당시 금메달을 노리던 한국은 준결승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한 뒤 동메달을 놓고 이란과 격돌하게 됐다. 병역 혜택이 대회 참가 전 지상과제였던 한국으로서는 사실 동메달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아시안게임은 금메달이 아니면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반전을 0-2로 마칠 때만 하더라도 김 빠진 홍명보호의 완패가 예상됐다. 축구장에 물 채울 준비를 해야 했다.

하지만 한국은 후반 들어 역사에 남을 명승부를 펼쳤다. 후반 4분 구자철이 첫 골을 기록한 뒤 한 골을 더 내줘 1-3으로 패색이 짙었지만 후반 35분부터 믿을 수 없는 골 퍼레이드를 펼치며 극적인 4-3 역전승을 거뒀다. 후반 35분 박주영이 한 골을 기록한 뒤 지동원이 후반 43분과 44분 거짓말 같은 두 차례의 헤딩골을 뽑아내며 명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사실 병역 혜택만 따지면 의미 없는 경기였지만 홍명보의 아이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 유종의 미를 거뒀다. 아마 경기 내용으로만 따지면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승부는 한국 축구사에 몇 번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 경기에서 패했다면 한국 축구가 또 다시 긴 침체기에 빠졌을 수도 있다. 성인 대표팀은 아니라지만 아시안컵보다 아시안게임을 더 높이 쳐주는 국민 정서상 3·4위전에서도 졸전을 펼쳤다면 전국의 축구장에는 물이 가득 찼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무너져 가는 한국 축구를 투혼으로 구해냈다. 경기가 끝난 뒤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펑펑 눈물을 쏟으며 부둥켜 안았다. 개인적으로도 선수들이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경기의 비중을 떠나 홍명보호가 보여준 경기력은 선수들 스스로 감동할 정도로 대단했다.

아직도 구자철은 이 경기를 생애 최고의 승부로 꼽는다. 그는 “정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이제까지 축구를 하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라면서 “내 축구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구자철 뿐 아니라 당시 경기에 나섰던 선수들은 여전히 이란전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다. 표정 변화 없는 홍명보 감독도 경기가 끝난 뒤 눈물을 흘릴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축구팬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기울어진 승부를 후반 막판 뒤집는 이들의 저력을 보면서 금메달 획득 실패에 대한 노여움을 걷어냈다. 만약 이란전이 아니었더라면 축구에 대한 여론은 2010년 베이징올림픽 때와 마찬가지로 차가웠을 것이다.

이번에 올림픽에 나서는 선수들 대부분은 이란전의 감동을 기억하는 이들이다. 구자철을 비롯해 지동원, 김영권, 윤석영, 박주영, 김보경, 지동원, 오재석 등 이란전의 주역들이 이번에도 런던에 간다. 나는 메달 획득 여부를 떠나 이들이 이란전에서 선보였던 투혼을 발휘한다면 그 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명분도 부족하고 실리도 없던 경기에서 최선을 다해 승부를 뒤집은 정신력이라면 뭐가 돼도 될 것이다. 메달이 목표가 아니라 감동적인 경기를 펼치는 걸 첫 번째 목표로 세운다면 메달은 그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돼 있다.

어떤 종목이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게 쉽지는 않다.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전세계에서 즐기는 축구라는 종목에서 메달을 따는 일 역시 그 어떤 종목에서의 도전만큼이나 어렵다. 더군다나 와일드카드로 세계 정상급 프로 선수들이 출전하는 마당에 한국 축구의 도전은 쉽지 않을 것이다. 홍명보호가 메달을 따면 정말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낙담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청소년대표 시절부터 끈끈한 우정으로 뭉친 이들의 멋진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행운을 얻지 않았나. 우리 스스로 메달이 아니면 실패한 대회라는 부담감을 쥐어줄 필요는 없다.

이제 개막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에서 실력을 키워도 얼마나 키울 수 있겠나. 지금부터 중요한 건 정신력을 가다듬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홍명보호는 이란전의 투혼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올림픽 본선 무대에서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한들 이란전 만큼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릴까.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거짓말 같은 역전승을 거둔 경험이 있다. 책으로 아무리 배우고 말로 아무리 배워도 느끼지 못할 감동을 직접 몸으로 겪은 선수들이니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팬들 역시 이 축제를 즐겼으면 좋겠다. 전세계 스포츠인의 축제에 참여한 태극전사에게 부담이 아닌 응원 정도면 딱 적당하다. “꼭 메달 따세요”가 아니라 “꼭 멋진 경기하세요”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축구뿐 아니다. 우리는 지금껏 금메달을 따지 못한 은메달리스트에게 “아깝다”고 했고 동메달을 따지 못한 4위에게는 “아쉽다”고 했다. 은메달에 ‘머물고’ 아쉬워서 눈물을 흘리는 한국 선수와 은메달이나 ‘딴’ 외국 선수의 환호는 참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스포츠는 결과가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과정을 통해 감동과 즐거움을 느끼면 그 걸로도 충분하다. 메달은 이 과정을 가장 잘 즐긴 선수에게 얻어지는 부상일 뿐이다. 침대축구로 금메달을 따는 것보다 이란전과 같은 감동의 경기로 동메달을 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이번에 올림픽에 나서게 된 한국 선수들 모두 메달 색과 상관없이 즐기자. 또한 홍명보호는 축구장에 물이 아니라 감동을 가득 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