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헌절이다, 대한민국 헌법 공포를 기념하는 날이다. 초등학교 시절 제헌절을 맞아 학교에서 단체로 국회 견학을 간 적이 있었다. 나는 63빌딩이 가고 싶었는데 내가 탄 버스는 63빌딩을 지나 국회로 갔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의사봉을 탕탕탕 칠 때 우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렇게 다 같이 의회에서 모여 의논을 하고 법을 만들어요. 이 분들은 국민의 편에 서서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의회에서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지만 20여년이 흐른 지금에야 알게 됐다. 우리 선생님의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말이다.

신데렐라가 된 시의원들, 12시에 집에 갔다

안양시민구단 창단이 사실상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안양시 추경예산안을 논의하기 위해 어제(16일) 열린 안양시의회 제188회 정례회에서 결국 안양시민구단 창단 준비금 3억 원의 예산이 통과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제 오전 내내 고성을 높이며 다툼만 벌이던 안양시의회는 결국 자정이 넘을 때까지 이 문제를 논의하지 못한 채 산회하고 말았다. 다음 정례회는 9월에 열리지만 2부리그 가입 신청서 마감은 오는 7월말까지다. 믿기 싫지만 안양시민구단의 연내 창단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다.

역사적인 안양시민구단 창단의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40여 명이 넘는 이들이 아침부터 시의회로 몰려들었다. 지난달 추경예산 상정 실패로 시간이 촉박해졌지만 어제 시의회에서 반전의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있었다. 예산안이 표결에 부쳐질 경우 반대 입장의 의원 측에서 소신껏 찬성표를 던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양시민구단 창단에 반대하는 새누리당과 통합진보당 의원들은 아예 이 안건 상정 자체를 거부했다. 연이은 정회로 시간을 질질 끌더니 결국 밤 12시를 넘겨 의결정족수 미달로 의회가 마무리되고 만 것이다. 이건 뭐 신데렐라도 아니고 12시가 넘어 이들은 LTE급 속도로 집에 갔다.

어릴 적 내가 배운 의회 민주주의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의원들이 합리적으로 법과 조례를 재정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안양시의회 일부 의원들은 현 시장이 추진 중인 역점 사업에 딴지를 걸고 아예 의회에 모습도 나타내지 않았다. 분노한 안양시민들이 의장실에 가 항의를 하자 결국 이들은 경찰을 불러 신속히 자리를 빠져 나갔다. 시민을 혈세를 월급으로 받으면서도 시간을 끌어 안건 논의 자체를 무산시킨 게 두렵긴 두려운 모양이다. 하필이면 제헌절 바로 전날 보여준 이런 모습에 화가 난다. 이건 3·1절 전날 신사 참배하고 식목일 전날 산불 내는 꼴이다.

3억 원 아껴 40억 원 손해 본 안양

딱 3억 원이었다. 300억 원도 아니고 30억 원도 아니고 딱 3억 원이었다. 안양시의회에서 논의되는 예산이 8천8백억 원인데 그 중 딱 3억 원이다. 나한테는 3억 원은커녕 30만 원도 없지만 안양시의회가 예산안을 통과시켜 3억 원 지원하면 안양시민들이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축구단 창단을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연맹은 내년 2부리그 참가 구단에 7억 원의 스포츠토토 수익과 경기장 개보수 비용 30% 지원, 신인선수 선발 때 15명 우선지명, 자유계약선수 5명 선발 권한 등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었다. 올해가 아니라 2014년에 창단하는 팀은 40억 원 이상의 손해를 보는 셈이었다.

하지만 안양시의회는 시민들의 외침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반대하는 의원들은 창단 준비금 3억 원 지원 후에도 연간 20억 원 이상의 운영비가 시민의 세금으로 충당될 것이라고 했지만 안양시민구단은 확실한 운영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기존의 시민구단은 주식회사로 운영됐지만 안양은 재단법인의 형태로 시작해 창단 후 2~3년이 지나면 주식회사로 전환, 적은 예산으로 투명한 운영을 약속했었다.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어 창단 하나로도 한국 축구사에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안양으로서는 시의회의 반대로 3억 원이 없어 아예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무너지게 생겼다. 젠장, 내가 돈 있으면 3억 원 주고 싶다.

안양시민구단은 창단 후 자금 조달과 구단 운영 계획 등을 세부적으로 준비해 향후 5년간의 플랜까지 제시했다. 그냥 시민구단 창단해 달라고 떼쓰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시의원들은 “운영 방안을 믿을 수 없다”면서 “공청회도 없이 어떻게 계획을 준비할 수 있느냐”고 했다. 안양시민구단은 이에 공청회를 준비했고 무려 900여 명이 참석해 성원을 보냈다. 그렇지만 정작 창단에 반대하는 새누리당과 통합진보당 의원들은 뭐가 그리도 바빴는지 아예 공청회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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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민구단 창단 궐기대회 후 행진하는 팬들의 모습. (사진=A.S.U RED)

82.5%의 찬성 의견은 어디로?

안양시민의 82.5%가 시민구단 창단에 찬성하고 37.8%는 시민공모주 모집에 참여할 의지를 내비쳤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의원들은 이번에도 “절대 다수 의견이 정답은 아니다”라고 했다. 당신들도 절대 다수의 의견으로 의원이 된 걸 잊은 모양이다. 5년간의 운영 계획서도 못 믿고 공청회도 못 믿고 설문조사 전문 기관의 조사 자료도 못 믿는다는 입장이다. 안양시민구단 창단 궐기대회와 공청회에 참석한 수많은 안양시민의 목소리를 듣지도 않고 의회에서 밤 12시까지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이들은 퇴근을 했다. 찬성하는 측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승리한 셈이다.

안양시의회가 한 일은 안양에서 끝나지 않는다. 현재 여러 지자체에서 시민구단 창단을 추진하고 있는데 안양의 사례는 창단을 위해 물밑 작업을 펼치고 있던 다른 지역도 추진력을 잃게 만들었다. 당신들이 밤 12시까지 의회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숨어서 버티며 한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 한 번 봤으면 좋겠다. 1조 원의 예산이 들어가는 초호화 안양시청사를 포함한 100층 복합건물 건립을 추진했던 안양시의회가 보도 블럭 몇 번 뒤집지 않으면 아낄 수 있는 3억 원 때문에 참 훌륭한 일을 하셨다.

안양시민들은 할 만큼 다했다. 시민들의 의견을 모으라면 모으고 공청회를 열라면 열고 운영 계획을 세우라면 세웠다. 그런데도 현 시장의 역점 사업에 힘을 실어주길 거부하는 몇몇 이들 때문에 결국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안양시민의 82.5%가 원하는 일을 몇몇 정치적 논리 따지는 이들이 그르쳤다. 아마 이런 식으로 일이 돌아간다면 안양 구단 창단을 위해 손을 걷어 올리고 달려드는 대기업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무슨 수를 써도 안 된다. 82.5%가 찬성해도 안 되는데 99%가 찬성한다고 될까.

안양은 죽지 않는다

안양 팬들은 참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다. 전국 어느 K리그 경기장이건 달려가 자신들의 메시지를 담은 걸개를 내건다. 특히 이 걸개 중 나는 ‘안양은 죽지 않는다’라는 걸개가 마음에 와 닿는다. 비록 이번에는 일부 의원의 반대에 막혀 실패했지만 안양은 여기서 죽지 않을 것이다. 또 다시 먼 길을 돌아가야 하지만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지금까지 7년도 기다렸는데 조금 더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주제 넘게 당부하자면 그 열정을 유지하면서 시민구단 창단을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더 힘을 실어줬으면 좋겠다.

언제든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우고 공청회를 열어 의견을 모아도 시의회가 거부하면 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요새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추적자>를 보면 투표의 힘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특정 정당 지지와 반대를 선동하는 것 같아 더는 자제하겠지만 어느 당이 안양시민구단 창단에 더 적극적이고 어느 의원이 반대하는지도 분명히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다가올 선거에서는 시민구단 창단과 관련한 공약을 꼼꼼이 살펴보자. 하늘을 찌르던 지지율의 대통령 후보가 불미스러운 일로 떨어지는 게 드라마 속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안양은 다시 길고 긴 싸움에 들어가야 한다. 7년 간의 노력이 예산안 상정으로도 이어지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간절히, 정말 간절히 원하는 걸 얻을 때의 기쁨이 고통 없이 얻는 것의 기쁨보다 훨씬 더 크다는 걸 잊지 말자. 이렇게 돌고 돌아 갈수록 다시 안양종합운동장에서 펼쳐질 언젠가의 첫 경기가 더 눈물 나게 감동적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감동의 극대화를 위해 주인공이 모진 고통을 당하는 영화의 한 장면에 와 있다. 이렇게 당하고 당한 뒤에 우뚝 서야 마지막 장면이 더 짠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이거 적당한 악역도 있고 딱 좋지 않은가.

오늘은 제헌절이다. 그런데 슬프다. 제헌절이 더 이상 공휴일이 아니어서 슬픈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시의회에서 시민들의 의견을 나 몰라라 하고 아예 자기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앉지도 않은 의원들 때문에 더 슬프다. 그러라고 달아준 의원 배지가 아니다. 나는 언젠가 안양시의회가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들의 염원인 안양시민구단 창단의 출발점이 됐으면 좋겠다. 20년 전 우리 선생님이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점을 깨닫고 싶다. 그렇게 밤 12시까지 자리 비우고 직무유기하면 아니 아니 아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