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건 딱 두 가지다. 내셔널리그 강릉시청에서 뛰던 김인성이 ‘러시아 명문’ CSKA모스크바에 입단했다는 사실과 김인성이 유럽 챔피언스리그 16강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 엔트리에 포함됐다는 게 전부다. 그 이후 김인성에 대한 보도는 뚝 끊겼다. 하지만 이 ‘신데렐라’의 감동 스토리를 단 두 가지 사실로 함축할 수는 없다. 어찌 이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를 짧게 몇 문장으로 소개할 수 있을까. 그래서 김인성을 직접 만나 숨겨왔던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인성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감동적이고 흥미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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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9일) 다가올 시즌 준비를 위해 모스크바로 떠나는 김인성을 만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믿는 건 스피드뿐이었던 ‘소년 김인성’

김인성은 초등학교 시절 발이 무척 빨랐다. 안산 고잔초등학교 4학년 때 육상부 감독의 추천으로 안산시 육상대회에 나가 1등을 휩쓸었고 이후 경기도 육상대회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너 우리 학교에 와서 축구 한 번 해볼래?” 그런 김인성을 이웃 학교 축구부 감독이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축구를 무척 좋아하던 김인성은 단번에 이를 승낙하고 축구부가 있는 안산 화랑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돈이 없어 할아버지의 반대로 축구선수의 꿈을 포기해야 했던 아버지께서도 흔쾌히 아들의 도전을 허락했다.

그가 속한 화랑초는 강했다. 한 해에 5관왕을 하면서 감독과 선수가 그대로 같은 중학교로 옮겨 축구를 계속할 수 있었고 중학교 시절에도 빠른 발을 앞세운 김인성은 돋보였다. 하지만 그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허정무 감독이 창단한 용인축구센터를 찾은 김인성은 충격을 받았다. “김보경과 이승렬이 제 또래인데 그 친구들 공 차는 걸 보고 기겁했어요. 같은 나이인데 저렇게 공을 잘 찰 수 있는 게 놀라웠죠.” 믿는 건 스피드뿐이었던 그는 기술이 없으면 점점 뒤처진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매일 새벽 혼자 운동장에 나가 훈련을 시작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FC서울에서 산하 유소년 팀으로 수택고등학교 축구부 창단을 준비하기로 했었고 김인성은 수택고 입학을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막판에 창단이 틀어졌다. FC서울이 수택고가 아닌 동북고에 축구부를 창단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가 속한 중학교 선수들은 다같이 보인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구자철이 그의 보인고 1년 선배였고 서정진이 동기였다. 수준급 실력을 자랑하는 이들이 모인 보인고에서 김인성은 기술을 가다듬었고 성균관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장밋빛 미래가 펼쳐진 것처럼 보였다.

K리그 문턱에서 좌절하다

김인성은 대학교 생활을 1년만 경험하고 빨리 프로 무대에 진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그가 일찌감치 프로 무대에 가는 걸 반대했다. “1년만 더 같이 있자”고 학교에서 프로 입성을 만류하는 동안 2년이 더 흘러 대학교 3학년이 됐다. 웬만한 학생이면 1년만 더 버텨 대학교 졸업장을 땄겠지만 김인성의 선택은 무척 단호했다. “저는 졸업장은 필요하지 않았어요. 1년이 아쉬운 상황이었거든요.” K리그 드래프트를 위해서는 학교의 동의서가 필요한데 결국 그는 자퇴를 하면서 2010년 K리그 드래프트 동의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 그에게는 빨리 프로 무대로 가야할 이유가 있었다.

바로 집안 환경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간이 좋지 않아 집에서 몇 년째 쉬어야했고 대신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어 조금이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어머니께서 식당일을 하시면서 고생을 무척 많이 하셨어요. 쉬지 않고 일만 하셨죠. 한 달에 한 번 미리 날짜를 정해놓고 쉬는 거 말고는 매일 일만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밖에서 돈을 버는 동안 몸이 좋지 않으신 아버지께서 집안 일을 하셨어요. 하도 오래 전부터 이런 상황이어서 어릴 적부터 빨리 이 가난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참고 또 참고 운동에 매달렸어요.” 그가 축구를 하게 돼 적지 않은 돈이 들어 동생은 학교 다닐 때 그 흔한 과외 한 번 받지 못했다. 김인성에게 프로 무대 입성은 반드시 이뤄야 할 꿈이었다.

“너를 원하는 팀이 세 군데 정도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에이전트가 긍정적인 소식을 알려왔다.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래프트에서 번외지명 선수를 뽑을 때까지 그는 호명되지 않았다. 그대로 탈락이었다. 몸 상태는 최상이었지만 자퇴를 하면서 대학 무대 마지막 대회에 나서지 못해 K리그 스카우트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게 치명적이었다. 춘계대회 득점왕이 그의 마지막 경력이었다. 이미 대학교까지 자퇴하고 나온 마당에 갈 곳이 없었다. “저는 최악의 상황이어도 일말의 희망이 있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그때는 진짜 눈 앞이 캄캄했어요.” 어찌나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스트레스성 원형 탈모 증세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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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리그 강릉시청에서 뛰던 김인성의 모습. (사진=내셔널리그)

먼 길을 돌고 돌아 강릉시청으로

K리그 입성에 실패한 그는 방황할 여유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친구들을 만나 술로 시간을 보낼 법도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것조차 사치였다. “어머니가 매일 아침 일찍 일을 하러 나가시고 집안 형편은 여전히 어려운데 어떻게 방황을 할 수 있겠어요. 저에게는 방황할 여유조차 없었어요.” 그는 드래프트 문턱을 넘지 못한 뒤 에이전트의 말만 믿고 일본 J2리그 문을 두드렸다. 자스파 쿠사츠라는 팀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이런 테스트에는 일본어가 되는 에이전트가 동행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김인성을 포함한 선수 세 명만이 달랑 테스트를 받으러 떠나야 했다.

문제는 더 있었다. 일본에 도착해 한참 시골로 내려가 보니 이건 테스트가 아니었다. 그냥 오전에는 일하고 오후에는 축구하는 J2리그 2군 선수들 훈련을 사흘 동안 함께한 것이 전부였다. 구단에서는 김인성을 잡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어보였다. “계약은 할 수 있지만 연봉은 최소한만 지급하겠습니다. 6개월 후에 1군에 입성할 수 있을지 그때 판단하죠.” 감독도 아닌 2군 코치의 말은 ‘아쉬우면 남으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구단에서 제시한 연봉은 비행기 티켓값도 되지 않는 극히 적은 돈이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그래서 계약을 하지 않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죠.”

“강릉시청 입단 테스트가 있어. 한 번 가보자.” 에이전트를 다시 믿고 내셔널리그 문을 두드렸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일단 연봉이 적어도 축구를 계속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꼭 강릉시청에 가야했다. 적은 돈이지만 집에 보탬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강릉에 도착하자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몇몇 선수만 불러 입단 테스트를 하는 줄 알았는데 70여 명을 불러 놓고 입단 테스트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김인성은 단거리 달리기와 체력 테스트, 실전 경기 등에 나서 최선을 다했다. 그에게는 이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뒤 강릉시청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정식으로 계약하고 같이 운동하자.”

한 달 용돈 20만 8천 원

턱없이 부족한 급여였다. 한 달에 1백만 원을 받는 선수가 된 것이었다. 다른 내셔널리그 선수들은 이보다는 상황이 나았지만 입단 테스트를 통해 강릉시청 유니폼을 입게 된 그에게는 월 1백만 원뿐이었다. 그마저도 세금을 떼면 남는 돈 90만 8천 원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그는 이 중 70만 원을 부모님께 드리고 20만 8천 원으로 한 달을 보냈다. 하지만 김인성은 그래도 행복했다. “팀이 있어야 제가 있는 거잖아요. 뛸 수 있는 팀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무척 감사했어요. 적은 돈이지만 부모님께 제 능력으로 번 돈을 드릴 수 있다는 것도 뿌듯했죠.” 내셔널리그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비록 선수들의 나이가 적지 않은 편이라 활동량은 다소 적지만 프로 출신들이 많아 공 차는 실력은 대학교보다 확실히 위에 있었다.

김인성은 내셔널리그에서 많은 걸 배웠다. 특히 무엇보다 마음대로 플레이 할 수 있다는 게 김인성에게는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빼앗기고 실수해도 되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 강릉시청 박문영 감독은 김인성을 절대적으로 믿었고 경기 도중 여러 번 실수를 해도 오히려 더 격려해주고 응원해줬다. 비록 내셔널리그지만 고양국민은행이나 울산현대미포조선처럼 K리그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팀들과 맞붙으면서 배울 게 많았다. “힘들어도 재미있었어요. 특히 감독님께서 빠른 선수를 좋아하는데 저는 스피드에는 자신 있었거든요. 정말 신나게 플레이했습니다.” 김인성은 2011년 내셔널리그에 25경기에 나서 4골 3도움을 기록하며 훌륭한 플레이를 선보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유럽 무대에 도전해 보고 싶은 더 큰 꿈이 있었다. 남들은 내셔널리그에서 유럽으로 날아가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김인성은 일단 부딪혀 보고 싶었다. 새로운 에이전트를 만난 김인성은 그렇게 유럽 무대로 눈을 돌렸다. 러시아 명문 CSKA모스크바에서 세 명의 한국 선수를 입단 테스트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미 지원자 세 명이 모두 뽑힌 상황이었다. 아쉽게도 기회가 없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테스트를 며칠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희망적인 이야기가 들렸다. “간곡히 이야기해서 너도 같이 테스트를 볼 수 있게 됐어.” 그렇게 김인성은 이른바 ‘꼽사리’로 지난해 11월 러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팀도 아니고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CSKA모스크바였다. 김인성도 사실 99%는 실패할 것이라고 각오하고 떠난 테스트였다. CSKA모스크바는 김인성에게 너무 대단하고 높은 팀이었다. 이곳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은 뒤 러시아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네덜란드 아약스의 문도 한 번 두드려 볼 예정이었다. 첫 날 구단에 도착해 테스트를 준비하고 훈련장에 가보니 기가 찼다. 김인성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CSKA모스크바 유소년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튿날에는 세 살 어린 선수들이 훈련장에 나와 있었다. 그렇게 함께 한 시간이 사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구단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정도 실력을 봤으면 됐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부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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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내셔널리그 선수의 유럽 무대 도전기는 무척이나 극적이었다. (사진=스포티즌)

믿을 수 없는 꿈을 이루다

탈락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 같아 낙담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두 달이 훌쩍 흘러 새해를 맞이했다. 그런데 CSKA모스크바를 잊고 있던 지난 1월 드디어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CSKA모스크바 2군 동계훈련 캠프인 터키 안탈리아에 와 다시 한 번 테스트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1월 9일부터 1월 22일까지만 함께 훈련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티켓도 미리 끊어 놨다. 그렇게 터키로 날아가 2군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사흘 전 구단 관계자가 김인성을 불러 손에 무언가를 꼭 쥐어줬다. 봉투를 열어보니 놀라웠다. CSKA모스크바 1군 동계훈련 캠프인 스페인행 비행기 티켓이었다. 2군 감독이 성실하고 발 빠른 김인성을 1군 감독에게 추천한 것이었다.

부랴부랴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 스페인으로 가 1군 선수단에 합류해 같이 훈련을 시작했다. 1차 동계훈련과 2차 동계훈련 사이에는 잠깐의 휴식기가 있는데 구단 측에서는 놀라운 이야기를 전했다. “그 사이 독일로 가 메디컬 테스트를 받고 오라”는 것이었다. 김인성은 이 순간이 꿈인 줄로만 알았다. “메디컬 테스트를 받고 오라는 건 계약을 하겠다는 의미잖아요. ‘아, 이거 잘하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곧바로 부모님께 전화해 이 사실을 알렸더니 부모님께서 너무 기뻐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전화비가 너무 비싸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전화를 끊어야 했죠.” 김인성은 그렇게 메디컬 테스트를 마친 뒤 정식으로 러시아 명문 CSKA모스크바 선수가 될 수 있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갈 곳 없이 방황하다가 내셔널리그 입단 테스트를 봐 90만 2천 원을 받고도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하던 그가 1년 만에 연봉 2억 원의 유럽파가 된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깜짝 스타’의 등장에 난리가 났다. 언론에서는 연일 정보도 없고 이름도 생소한 김인성에 대한 소식을 전하느라 바빴고 잊고 지내던 초등학교 친구들까지 김인성에게 축하 전화를 했다. KBS 스포츠뉴스에서도 그를 취재하러 올 정도였다. 하지만 김인성은 이 거액의 연봉을 모두 부모님께 드렸다. “집에 빚이 좀 있거든요. 이번에 번 돈으로 그 빚 갚았어요. 큰 돈은 어느 정도 이번에 다 갚았는데 아직도 빚이 조금 남아 있긴 해요. 빚 갚고 나니 별로 남는 것도 없더라고요.”

김인성은 CSKA모스크바에서의 입단 테스트가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했다. 소속 선수들은 훈련을 하면서 실수를 해도 어차피 연습 과정이니 괜찮지만 김인성은 실수 하나가 바로 평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금껏 이렇게 심리적 부담을 안고 축구를 해본 적이 없던 김인성은 결국 그 부담을 이기고 ‘신데렐라’가 될 수 있었다. CSKA모스크바 감독은 “100년이 넘는 우리 구단 역사에 너처럼 낮은 리그에서 뛰다 온 선수는 없다”면서 “너를 보면 ‘신데렐라’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 능력이 뛰어난 선수인데 너는 도대체 왜 대표팀 경력이 없느냐.” 김인성의 등장은 CSKA모스크바로서도 무척 신선한 모양이다.

“가장 편한 선수는 혼다”

“이봐, 나 박지성 잘 알아.” 김인성이 팀에 합류하자 한 선수가 다가와 반가운 듯 말을 걸었다. 얼떨떨한 김인성은 생전 처음 본 선수가 말을 걸어오자 그냥 인사라고 생각하고는 “아, 그래?”라면서 대충 받아 넘겼다. 하지만 김인성에게 말을 걸었던 선수는 민망한 표정으로 뒤돌아갔다. 그의 등에는 이런 이름이 써 있었다. ‘ZORAN TOSI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박지성과 함께 뛰었던 세르비아 국가대표 조란 토시치였다. 조란 토시치는 김인성이 당연히 자기를 알아보고 반가워 할 줄 알았지만 자기를 알아보지 못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게 그 친구였는데 나중에 알고 나서 상당히 미안했어요.” 김인성은 아직도 이 일을 잊을 수 없다.

또한 일본 국가대표 혼다 케이스케도 그를 팀 동료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혼다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혼다를 건방지고 생긴 것도 비호감이고 이적설로 세계일주를 한다면서 비아냥거렸잖아요. 저도 물론 처음에 혼다를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실제로 만난 혼다는 그렇지 않았다. 먼저 다가와 “너 참 인상 좋다”며 말을 건넨 혼다는 지금도 김인성을 보면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잘 지내?”라고 장난을 친다. “처음에는 대하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많이 친해졌어요. 혼다가 팀에서 가장 편해요. 구단에서 집은 제공해줬지만 저는 아직 자동차가 없거든요. 훈련장 가려고 집 앞에 서 있으면 혼다가 자기 차를 세우고 ‘같이 가자’면서 먼저 말을 걸어요.”

김인성은 혼다의 프로 의식을 무척이나 존경한다. “혼다는 네덜란드에 3년 있어서 영어를 꽤 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영어를 더 유창하게 하고 싶어서 자기 부인하고도 일부러 영어로 대화를 하더라고요. 그리고 원정경기 때 비행기에서 영화를 보다가 모르는 영어 자막이 나오면 보던 영화를 멈추고 영어 사전을 찾아봐요. 그리고는 다시 영화에 집중하죠. 정말 배울 게 많은 선수라고 생각해요. 축구로만 놓고 본다면 사실 외모 때문에 무척 빠른 선수 같은데 스피드는 생각보다 떨어지지만 패스와 킥이 너무 좋아요. 시야도 훌륭하고요.” 김인성에게 있어 혼다는 같이 포지션 경쟁을 하는 사이지만 그러면서도 외로운 곳에서 함께 의지하는 동양인 친구이기도 하다.

챔피언스리그에 올린 그의 이름

김인성은 정식 계약을 체결하자마자 인생에 단 한 번 오기 어려운 놀라운 경험을 또 했다. 지난 2월 비록 실제 경기에는 나서지 못했지만 CSKA모스크바와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홈 경기에서 18명의 엔트리에 든 것이다. 갑자기 국내에 알려진 선수가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 맞붙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국에서는 축구계 전체가 들썩였다. 경기를 앞두고 김인성은 지인들로부터 “너 정말 그 경기에 나가는 거냐”라는 연락을 수도 없이 받았다. 하지만 김인성도 경기 당일까지 엔트리 포함 여부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18명 안에 들면 그 자체로도 영광’이라는 생각뿐이었다. 혼다를 비롯해 두 명의 선수가 이 경기를 앞두고 부상에서 복귀했기 때문에 가능성은 사실상 ‘0’에 가까웠다. 엔트리에 들지 못하면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봐야 했다.

경기를 앞두고 감독이 선수들을 미팅룸으로 불렀다. 그런데 느낌이 묘했다. 한국에서는 경기 전 선수단 전체가 미팅룸에 모이지만 김인성을 포함해 18명만이 미팅룸에 모였기 때문이다. ‘아, 이거 이 팀은 엔트리에 든 18명만 모아놓고 따로 미팅을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순식간에 스쳤다. 그렇다면 레알 마드리드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 엔트리에 드는 기적이 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독 이야기는 귀에 하나도 안 들어오고 속으로 선수들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열 일곱, 열 여덟, 나까지 열 여덟….’ 정확히 18명이었다. 다시 세어 봐도 18명이었다. 말이 통하질 않고 창피해 “저 엔트리에 든 건가요?”라고 물을 수도 없었고 그냥 눈치만 보고 있었다.

경기장으로 이동하는 내내 머리가 복잡했다. 엔트리에 든 것 같기는 한데 확실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동료한테 손짓 발짓 다 해가면서 “나 지금 엔트리에 든 거 맞아?”라고 물어보고 싶지만 창피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갸우뚱한 표정으로 경기장에 도착해 라커룸 문을 연 뒤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KIM’이라고 새겨진 그의 유니폼이 라커룸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김인성이 CSKA모스크바와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엔트리에 포함된 것이었다. ‘기적의 사나이’ 김인성이 또 한 번 기적을 일으켰고 한국에서도 이 사실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몸을 풀러 경기장에 들어가니 이미 8만 관중이 꽉 들어차 있었다. 이건 꿈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내셔널리그 고양국민은행과의 마지막 경기에 나서면서 이기려고 죽을 힘을 다했는데 이제 제 눈 앞에 레알 마드리드가 있었어요. 말로 표현 못할 만큼 대단했습니다. 몸 풀 때 옆에 카카가 지나가는데 속으로는 ‘우와, 카카다. 실물이 정말 더 잘생겼다’라고 신기해하면서도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많이 뛰었던 경기인 척 표정 관리하면서 한 번 쓱 쳐다보고는 일부러 안 쳐다봤어요. 그런데 다리가 정말 막 후들거리더라고요. 경기 시작하고 그라운드 옆에서 몸 푸는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공 이리 줘’라면서 소리치고 있고 마르셀루가 내 눈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정말 얼이 빠졌어요. 안에 있는 선수보다 제가 밖에서 몸을 더 열심히 풀었죠. 뛰었으면 좋겠지만 그 경기를 바로 앞에서 보고 배운 것도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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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성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진=CSKA모스크바)

네 명이서 훈련하는 팀?

챔피언스리그 엔트리에는 들었지만 경기에 나서지 못했던 그는 지난 3월 3일 안방에서 열린 정규리그 제니트와의 경기에 후반 45분 교체 투입되며 데뷔전을 치렀다. 하지만 워낙 출전 시간이 짧았던 탓에 김인성 스스로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내셔널리그 경기에 교체 투입된 것처럼 무덤덤했어요. 2~3분 정도 뛰었는데 계속 몸 풀다가 들어갔으면 설렜을지도 모르지만 벤치에 앉아 있다가 막판에 잠깐 몸 풀고 투입됐거든요. 축구화 끈도 제대로 못 묶고 나갔어요. 뭘 보여줄 시간이 부족해서 그게 데뷔전이었다는 걸 나중에 느낄 정도였죠. 데뷔전 같지 않은 데뷔전이었어요.” 하지만 김인성은 이후 훈련 도중 동료가 점프를 한 뒤 내려오면서 스터드로 발가락을 밟아 부상으로 더 경기에 나서지 못한 채 시즌을 마감했다.

2군 경기에서 꽤 많은 시간을 뛴 김인성은 종종 1군에 올라가 경기에는 나서지 못하더라도 리저브 멤버로 7경기 정도를 따라다녔다. 2군 감독은 “처음에는 다 2군을 거친다. 여기에서 인정받고 1군으로 올라간 경우가 많다”면서 김인성에게 조급해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물론 경쟁자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김인성과 같은 포지션에만 무려 7명이 경쟁하고 있고 이들은 대부분 현역 국가대표다. 김인성은 한국과 쿠웨이트, 일본과 우즈베키스탄 등이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지역 3차예선을 치르던 지난 2월 다른 나라들 역시 대대적으로 A매치를 소화할 때 얼마나 팀내 주전 경쟁이 심한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이날 CSKA모스크바는 대부분이 국가대표 차출로 팀을 떠나고 단 네 명만이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상으로 당시 A매치에 나서지 못해 훈련장에 나온 혼다까지 포함한다면 김인성을 포함해 세 명만 국가대표가 아닌 셈이다.

김인성은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고 ‘MILK’도 못 알아 들을 정도로 영어를 아예 못하는 러시아의 환경도 불편하지만 역시 주전경쟁이 가장 험난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독한 마음으로 다가올 시즌을 벼르고 있다. “다른 경쟁자들은 다 거액의 이적료를 지불하고 데려왔지만 저는 이적료도 없이 왔어요. 당연히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기회를 잡는 게 쉽지는 않죠. 하지만 저에게도 한 번은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해요. 그 한 번의 기회가 왔을 때 후회 없이 부딪히려면 몇 달이 됐건 항상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기회를 반드시 살리고 싶어요. 올 시즌 목표요? 다른 건 다 필요 없습니다. 일단 팀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죠.” 더 험난한 도전이 기다리고 있지만 지난 시즌 기적을 연출한 김인성이라면 올 시즌에도 못할 게 없다.

‘신데렐라 스토리’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졌다. 비단 축구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직접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현실로 만든 이의 말이니 한 번 귀 기울여 보자. “아무리 돈이 많거나 배경이 좋아도 그걸 이기는 건 실력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실력만 있으면 적어도 축구로 밥 벌어 먹고 살 정도로 어느 팀에서나 대우받을 수 있어요. 아무리 힘든 순간이 와도 내 실력만 있으면 이겨낼 수 있어요. 신세한탄만 하고 있기에는 너무 시간이 아깝죠. 힘들 때일수록 더 빛나게 갈고 닦는다면 분명히 좋은 날이 온다고 믿어요.”

김인성은 반드시 잘 되어야 한다. 누군가는 그를 ‘벼락스타’라고 하지만 나는 어려운 환경을 딛고 정면으로 현실과 부딪혀 이만큼의 성과를 일궈낸 김인성을 진정한 노력파라고 생각한다. 이런 선수가 잘 되는 게 세상이 올바르게 가는 길 아닐까. 김인성은 반드시 잘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식당일을 하며 그를 키워낸 부모님께도 효도하고 자기 때문에 과외 한 번 받지 못한 동생한테도 멋진 형이 되어야 한다. 그를 응원하는 수많은 이들에게도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줘야 한다. 김인성은 반드시 잘 되어야 한다. 또 반드시 잘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