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12년 6월 4일이다. 무슨 날일까. 짜증나는 월요일? 아니면 카드값 빠져 나가는 날? 그저 어제와 똑같은 하루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역사상 무척 큰 의미를 지닌 날이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역사적인 첫 승을 거둔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48년 동안 무려 15경기를 치른 끝에 거둔 소중한 첫 승이었다. 시계를 10년 전으로 되돌려 보자. 2002년 6월 4일은 부산에서 열린 한국과 폴란드전으로 한반도가 들썩였다.

10년 전 나는 지금 칼럼을 쓰고 있는 새벽 5시 부산으로 가는 붉은악마 원정 응원 버스에 올라 타 있었다. 직접 한국-폴란드전을 보기 위해 전날 밤 부산으로 출발했다. 머리 속에는 온통 ‘한국이 정말 월드컵에서 첫 승을 거둘 수 있을까’라는 복잡한 생각 뿐이었다. 48년 동안 이루지 못한 월드컵에서의 승리가 우리와는 참 먼 단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 부산에 아침 일찍 도착한 붉은악마는 가장 먼저 해운대로 가 뜨는 해를 바라보며 출정식 비슷한 의식을 치렀다.

사실 비장한 각오의 출정식도 아니었다. 꽹과리를 치고 응원가를 부르면서 난리 법석을 떠는 게 우리의 의도였다. 바로 옆에 폴란드 선수들 숙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그들의 숙면을 방해하는 게 본래 목적이었다. 폴란드 숙소를 지키고 있던 안전요원들도 말리는 시늉만 하고 붉은악마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그들도 한국이 폴란드를 꺾고 월드컵에서 첫 승을 거두길 바라는 똑같은 한국 사람이었다. 10년 전 오늘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한국을 응원하고 있었다.

행진을 한 뒤 경기장에 들어가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경기장 전체가 붉은색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팬들이 경기장을 오렌지색으로 물들이는 걸 본 적은 있지만 이런 장관이 우리나라에서 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저 축구에 열광하는 유럽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10년 전 오늘은 우리도 붉은색으로 경기장 전체를 물들일 수 있다는 걸 직접 확인한 날이었다. 지금이야 대표팀 경기를 보러 갈 때 붉은색 옷 입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10년 전만 해도 우리의 응원 문화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옷장 어딘가에는 ‘BE THE REDS’ 티셔츠가 있을 것이다. 아마 이 티셔츠 한 벌 없는 집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10년 전 우리는 이 티셔츠를 입고 경기장에서, 시청 앞에서, 호프 집에서, 학교에서, 아니면 가족들과 집에 모여서 간절히 한국의 월드컵 첫 승을 위해 응원하고 있었다. 10년 전 이 티셔츠는 최신 유행 아이템이었고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신기한 옷이었다. 그렇게 한반도는 이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로 붉게 물들었다.

지금이야 별로 새로울 것 없는 길거리 응원도 10년 전에 정착됐다. 이전부터 붉은악마가 주도해 시청 앞에서 A매치 응원전을 펼친 적은 있지만 극히 일부만이 참여하는 행사였다. 하지만 2002년 5월 프랑스와의 평가전을 통해 대중화 된 길거리 응원은 폴란드전이 치러지면서 본격적으로 정착됐다. 수십 만 명이 대형 전광판을 통해 경기를 지켜보며 하나된 목소리로 응원하는 모습은 외신에서도 무척 신기하게 바라봤다. 10년 전 오늘은 시청 앞 광장 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광장이 꽉꽉 들어찼다.

엠마누엘 올리사데베. 추억의 이름일 것이다. 우리는 10년 전 경기를 펼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선수가 무시무시한 선수일 것이라고 겁부터 먹었다. 언론에서는 연일 ‘올리사데베 경계령’을 내렸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니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고 한 동안 밀리는 플레이를 했지만 홍명보의 중거리 슈팅 한 방 이후 자신감을 찾고 폴란드를 몰아 치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도저히 10년 전의 일이라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어제 점심 때 뭘 먹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10년 전의 일을 아직도 까먹지 않고 있다. 아마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을 것이다.

결국 한국은 황선홍과 유상철의 골에 힘입어 폴란드를 2-0으로 제압하고 역사적인 월드컵 첫 승을 거뒀다. 이 감격스러운 장면은 한국 축구 역사상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축구 역사는 2002년 6월 4일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 10년 전 오늘의 월드컵 첫 승은 큰 의미를 지닌다. 나는 꽤 많은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봤지만 아직도 10년 전 오늘 부산아시아드 경기장에 있었다는 것만큼 자부심을 느낀 적은 없다. 아마 이 글을 보고 있는 독자들도 폴란드전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과 감동이 다 특별할 것이다.

2002년 6월 4일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의미를 지닌 날이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고 우리의 눈높이는 높아졌다. 10년 전에는 없던 축구전용구장이 이제는 전국에 즐비하고 10년 전만 하더라도 간절히 바라던 월드컵 1승을 이제는 매 대회 때마다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간절한 우리의 꿈이었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도 좋지만 한 번쯤은 과거를 돌이켜 보고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꼈으면 좋겠다. 10년이 지난 오늘, 다시 떠올려도 기분 좋아지고 설레는 그 날을 선사해 준 모든 이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더불어 우리는 참 행복한 시대에 태어났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세대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의 젊은이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경험했고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다. 누군가는 평생 한 번 경험해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이런 일들을 혈기왕성하고 에너지 넘치는 젊은 나이에 경험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다. 이 시대에 태어난 걸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 오늘 하루는 10년 전 자랑스러웠던 한국 축구의 월드컵 첫 승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으면 좋겠다. 독자들은 10년 전 오늘 어떤 추억이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