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전북과 수원의 현대오일뱅크 K리그 2012 14라운드가 열린 전주월드컵경기장. K리그에서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한 수원 팬들이 S석에 모여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 걸려야 할 서포터스 메인 걸개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는 낯선 걸개 하나가 내걸렸다. 한 눈에 보기에도 무척 큰 이 걸개에는 이런 글귀가 써 있었다. “故김태훈 그는 이곳에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한다.” 이날 경기에서는 이 걸개가 메인 걸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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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팬들이 내건 고인의 추모 걸개. 이날 만큼은 이 걸개가 수원 팬들의 메인 걸개였다. (사진=수원블루윙즈)

고인은 열정적인 수원 팬이었다. 누구보다도 수원을 사랑했던 그는 장거리 원정도 마다하지 않는 열혈 팬이었다. 지난 2010년 수원의 강원 원정 응원에도 함께한 뒤 소모임 회원들과 밤새 축구 이야기를 나누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고인은 원정 응원을 다녀온 뒤 사흘 만인 5월 5일(양력) 갑작스러운 심근경색 증세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45세의 젊은 나이에 두 자녀와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먼저 하늘로 떠난 것이었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한 팬의 안타까운 죽음이 잊혀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수원 팬들은 고인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음력으로 오는 31일이 고인의 기일이지만 경기 일정이 맞지 않아 고민이던 수원 팬들은 전북 원정 경기에서 고인을 추모하기로 결정했다. 수원 팬들은 항상 걸리는 메인 걸개를 포기하고 고인의 추모 걸개를 원정 응원석 1층의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걸었다. 고인을 잘 몰랐던 이들도 걸개를 걸면서 한 열정적인 팬의 기일을 추모했다.

더군다나 이 경기는 수원 팬들에게 무척 의미 있는 원정이었다. 2009년부터 분열돼 따로 응원하던 두 서포터스 단체가 하나로 통합돼 치른 첫 원정 응원이었기 때문이다.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홈에서 골대 뒤와 본부석 건너편 2층 구석으로 갈렸던 그랑블루와 하이랜드는 오랜 진통 끝에 통합하고 ‘프렌테 트리콜로’라는 새 이름을 내건 단체로 재탄생했다. 그리고 화합을 이룬 뒤 떠난 첫 원정 응원이 바로 이번 경기였다. 이런 의미 있는 응원전에서 거창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었지만 한 팬의 기일을 추모하는 건 더욱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전주월드컵경기장에 내걸린 고인의 추모 걸개를 보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수원에서 뛰었던 선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단 역사에 혁혁한 발자취를 새긴 이도 아니지만 진심으로 수원을 사랑했던 단 한 명의 팬을 위해 이런 멋진 퍼포먼스를 펼칠 수 있다는 건 감 감동적인 일이다. 수원 팬들의 이 같은 행동은 서포터스가 ‘응원단’이 아닌 ‘가족’이라는 걸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흔히 K리그 서포터스라고 하면 폭력적이고 거친 이들로 생각하기 쉽지만 가족처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슬퍼하는 든든한 내 편을 얻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강원FC 관중석 분위기를 좋아한다. 이곳에 가면 손수 떡을 해오고 김치전을 만들어 오는 이들이 무척 많다. 얼마 되지 않는 양이지만 강원FC를 함께 응원한다는 사실 하나로 이들은 가족이 돼 서로 음식을 나눠 먹고 어깨동무를 한다. 강원뿐 아니라 다른 K리그 서포터스 역시 마찬가지다. 공통된 관심사를 가지고 전국 어디든 함께 하는 이들이 결속력이 강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는 K리그 서포터스 문화가 무척 폐쇄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언제든 그들의 문은 열려있고 언제든 그들과 가족이 될 수 있다. 그들과 가족이 되는 건 나의 선택에 달렸다.

나는 경기도 파주에서 살다가 일산으로 이사를 왔다. 학교를 일산에서 다닌 것도 아니어서 동네에는 친구 한 명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고양종합운동장에 가 내셔널리그 고양국민은행 경기를 지켜봤다. 몇몇 팬들이 골대 뒤에서 응원을 하고 있었는데 함께 응원을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서성이고 있자 그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같이 응원해요. 여기 맥주 한 잔 받으세요.” 나는 이때부터 빠지지 않고 경기장에 갔다. 고양국민은행이 좋고 축구가 좋았지만 동네에서 함께 맥주 한 잔하고 축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다는 사실이 더 좋았다.

이번 라운드에는 이야기거리가 참 많았다. 데얀이 100호골을 돌파했고 대전은 광주를 잡고 꼴찌에서 탈출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 만큼이나 순수한 한 팬의 기일을 잊지 않고 챙기는 팬들의 감동적인 모습도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좋아하는 걸 함께하고 누군가를 함께 욕하고 같은 목표를 향해 손을 맞잡는 이들은 비록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함께 슬픔까지 나눌 수 있는 이들을 나는 가족이라고 부르고 싶다. 고인을 기리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생전 그토록 좋아하던 수원 선수들의 등 뒤에 자신의 이름이 걸려 있다는 사실에 고인은 아마 하늘에서 이 모습을 무척 흐뭇하게 지켜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