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조작으로 K리그가 큰 슬픔에 잠겼던 지난해 칼럼으로 한 선수의 영화 같은 스토리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바로 수원에서 뛰었던 골키퍼 권기보였다. 선수 생활을 접고 일반 사병으로 군에 입대한 그는 주전 골키퍼의 경고누적과 나머지 골키퍼들의 승부조작 혐의로 상주상무의 골문을 지킬 선수가 없어진 상황에서 한줄기 희망으로 떠올랐었다. 60만 육군 중 K리그에서 골키퍼로 나설 단 한 명으로 지목된 것이었다. 전출이라는 명목으로 군대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권기보 상병의 K리그 귀환 작전이 시작됐다.

하지만 결국 그 꿈은 실패로 돌아갔다. 프로축구연맹에서도 선수 등록에는 문제가 없다는 해석을 내놓았지만 전출이 이뤄지기 직전 해병대 총기 난사 사고로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하는 그의 K리그 입성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고 6개월 뒤 그는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했다. 당시 군인 신분으로 인터뷰에 응할 수 없었던 권기보를 만나 시간이 흐르고 이제 당시 심정에 대해 들어보고자 한다. 기적적으로 K리그 복귀를 노렸지만 결국 실패하고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한 예비역 병장 권기보와의 인터뷰를 지금부터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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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보와 만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는 누구보다도 할 말이 많은 선수다.

반갑다.

나도 반갑다. 부대에 있을 때 당신 칼럼 잘 봤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나에 대해 다뤄줘서 고맙다.

고맙긴…. 잘 봤다니 다행이다. 현재 근황부터 알려 달라.

지난해 12월 6일 제대하고 2주 쉰 뒤 바로 보인고등학교 골키퍼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골키퍼 레슨도 따로 하고 있는데 K리그 2군에 있을 때보다도 월급은 적다. 하지만 내가 벌써 축구만 20년째다. 나름대로 전문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제대하고 컴퓨터 관련 쪽 일을 해보려고 했는데 서투르고 적성에 맞지 않아서 포기했다.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어 어느 정도 수입이 있어야 공과금도 내고 할 텐데 여자친구가 운영하는 꽃집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제대하고 이틀 정도 골키퍼 코치를 해봤는데 이거다 싶은 마음이 들어 곧바로 취직했다.

요즘같이 직장 구하기 어려운 시기에 취직 축하한다. 할 만한가.

아침 8시에 나와서 밤 11시나 되어야 집에 간다. 요새 학원 축구가 새벽 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 추세다. 주말 리그로 바뀌면서 오전, 오후 수업을 다 받는다. 그래서 주로 오후와 저녁에 운동을 할 수 있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애들 밥도 먹여야 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모두 맡고 있는데 주말에도 잘 쉬지 못한다. 이번 주에는 고등학교가 금요일에 경기를 하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쉰다. 하지만 중학교 시합이 토요일에 있어서 나는 또 나와야 한다. 자주 못 쉰다. 그래도 일이 있다는 게 어딘가.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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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보는 좋은 체격 조건과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 차범근 감독의 부름을 받고 수원에 입단했었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축구 인생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상무에 지원해서 떨어졌다고 들었다. 어떻게 된 건가.

경찰청은 한 번 군대 영장이 나오면 못 간다. 무조건 연기를 해서 영장이 나오는 걸 막아야 경찰청에 지원할 수 있다. 나에게 경찰청에서 5년 동안 콜이 왔었다. 그런데 사실 K리그에 있는 상무가 더 매력적이지 않나. 타이밍을 보고 있다가 상무 지원서를 넣으려고 했는데 같은 팀 골키퍼 후배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하셨다. “이번에는 네가 좀 양보를 해라.” 그 후배 아버지가 축구계 쪽에 상당히 힘이 있어서 후배의 상무 입단은 기정사실화 됐었다. 한 팀에서 골키퍼가 두 명이나 상무에 지원하는데 나보다 경력이 적은 후배만 붙으면 모양새가 이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내년에는 붙여줄 테니 이번에만 양보해 달라”고 해서 상무 입단을 한 해 미뤘다. 그러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보통 한 해에 골키퍼 두 명을 뽑는데 그 해에는 골키퍼 세 명이 상무에 붙었다. 그리고 1년 뒤 나와 성경일이 지원서를 넣었는데 어차피 다 뽑아놓고 테스트하는 거라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두 명 지원했으니 정황상 둘 다 합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명만 뽑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해 겁이 났다. 걔는 올림픽 대표 출신인데 나는 그런 경력이 없지 않나. 수소문해봤더니 골키퍼 형들이 “아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 그런데 발표가 나고 나는 떨어졌다. 이 전 해에 세 명을 뽑아서 한 명만 뽑은 것이었다. 이때가 상무에 갈 수 있는 마지막 나이였고 이미 영장이 나온 상태여서 경찰청에도 못 가게 됐다.

저런…. 더 이상 군대 문제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건가.

사실 예전에 적발되기는 했지만 어깨를 빼 군 입대를 피하는 선수들도 많았다. 그런데 골키퍼가 다른 선수들처럼 어떻게 어깨를 빼나. 그러면 몸을 날려야 하는 순간마다 다칠 것 아닌가. 골키퍼는 드래프트에서 1,2순위에 뽑지 않는다. 3,4순위쯤 되어야 뽑아서 저연봉 선수를 키우는 게 보통이다. 한 번에 고액 연봉자를 뽑는 무리수를 두지는 않는다. 나는 연봉도 적었고 수원에서 발 맞춰온 시간이 오래된 편이라 수원에서도 군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알아보라고 했지만 더 이상 해결할 수가 없었다. 2008년 말에 그렇게 수원에서 나왔다. 더는 축구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수원에서 그전에 다른 팀으로 이적해 K리그 출장 경력을 쌓았으면 상무에 갈 수 있지 않았을까. 사실 당시 수원은 이운재는 물론 박호진, 김대환 등 쟁쟁한 경쟁자가 너무 많았다. 이들은 어느 팀에 가도 다 주전으로 뛸 만한 선수들이었다.

좌절하기 바로 전 에이전트가 다른 구단이 나를 원한다면서 이적을 제안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솔직히 말해 위에 있던 형들이 다 아저씨라고 생각했다. (이)운재 형은 나하고 9살 차이고 (박)호진이 형과 (김)대환이 형도 나하고 7~8살 차이가 나는데 금방 나한테 기회가 올 줄 알았다. 내가 서른한 살이면 운재 형은 마흔 아닌가. 운재 형은 배도 많이 나왔고 나는 몸매가 좋았을 때다. 한두 명 나가고 형들 중에 한 명만 남아 있어도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건방졌다. ‘내가 지금은 이 형들한테 장점을 배우고 있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상황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한 번 온 이적 기회를 못 잡은 게 결국 최악의 상황으로 흘렀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때 다른 팀으로 가 조금 더 출장 기회를 늘렸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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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시절 2군경기에 나선 권기보의 모습.

갑자기 군대를 갈 생각을 하니 암담했을 것 같다. 나이도 적지 않았는데.

운동을 그만두고 한참 방황했다. 몸무게가 110kg을 넘었다. 매일 치킨과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술만 마셨다. 당구장에서 살았고 술집에 가면 바로 서비스가 나올 정도로 술집을 드나들었다. 그랬더니 여자친구가 이 모습을 보고 어느 날 나를 불러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너한테 내 미래를 맡길 자신이 없어.” 둘이 붙잡고 울었다. 사실 내가 원래 허리 디스크 때문에 4급 공익근무요원 판정을 받았는데 집에서 걸어서 2분 거리인 구청으로 발령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자친구에게 정신 차리겠다고 약속하고 현역으로 간 거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다.

현역으로 군대에 간 뒤 후회했나. 나는 입소대에서 부모님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곧바로 오리걸음을 할 때부터 후회하기 시작했다.

신병교육대에 가자마자 후회했다. 29살의 나이로 군대에 가 신병교육대에서 소대장 훈련병을 했는데 애들이 부모님하고 통화하면서 막 우는 거 아닌가. 나는 창피해서 죽어도 안 울겠다고 다짐했는데 여자친구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고 말았다. 몰래 화장실에 가 또 울고 그랬다. 더 후회되는 건 공익 근무하면서 장모님하고 치킨집을 차리려고 했었는데 결국 내가 군대에 가면서 그걸 못했다. 그런데 그 집이 지금 대박이 났다. 후회가 안 될 수 있겠나.

벌써 몇 번이나 성공의 기회를 놓친 것 같다.

지금은 내 여자친구가 나에게는 마지막 기회다. 잘해야 한다. 내가 10원 한 장 없어도 삼시 세끼 밥 챙겨주는 사람이다.

축구하다가 온 사병은 군대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당신도 그랬나.

신병교육대 소대장이 엄청난 축구 마니아였다. 축구 에이전트를 준비하는 분이었는데 당직을 서는 날이면 나를 불러 새벽 네 시 반까지 축구 이야기를 했다. 3-5-2 포메이션은 어떻고 4-4-2 포메이션을 어떻고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 밤새 한다. 그러면서 전화를 쓰게 해줬는데 끝까지 전화는 안 썼다. 애들하고 똑같이 상점 따서 전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혜택 받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음날 행군을 해야 하는데 잠도 안 재우고 축구 이야기만 해 미칠 뻔했다.

저런…. 참 안 됐다.

입소하고 사회 생활 경력을 적어 냈는데 그게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5주 훈련 끝난 다음날 바로 4~5군데에서 나를 데려가겠다고 신병교육대로 찾아왔다. 특히 의장대에서는 “우리가 지금 선수 출신으로 구성된 강팀인데 골키퍼 자리만 비었다. 자네가 우리의 마지막 퍼즐이다”라면서 강력한 영입 제의를 했다. 그런데 거기는 신체검사에서 2급이상이어야 갈 수 있었지만 나는 신체검사에서 4급을 받았다가 재검을 통해 3급을 받은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의장대의 마지막 퍼즐이 되지 못했다.

메디컬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해 입단이 좌절된 건가.

그렇다. 그래서 경기도 파주 적성에 있는 25사단 국사봉대대로 배치 받았다.

내가 또 파주는 잘 안다. 내 고향은 파주 문산이다. 외박 나오면 문산으로 나왔나.

그렇다.

거기는 정말 주말에 군인들이 외박을 많이 나와서 여관 잡는 게 전쟁이다. 당신과 같은 군인 때문에 나와 친구들이 피해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는 외박 나오면 아침에 여관을 잡기 때문에 당신들이 여관을 선점할 수가 없다.

앞으로는 나도 파주에 갈 때면 아침에 여관을 잡겠다. 그런데 축구선수 출신이 왔으니 자대에서도 난리가 났겠다.

자대에 배치 받고 소대장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아까 그 신병교육대 소대장하고 동기였다. 축구를 또 엄청 좋아하더라.

 

권기보는 군대에서 골키퍼는 물론 최전방 공격수로까지 나서는 진정한 멀티플레이어로 거듭났다.

그래도 그 정도면 풀린 거 아닌가. 축구선수라고 좋은 대우 받았을 거 같은데.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 연대장님과 대대장님께 수원에서 뛰다 온 골키퍼가 있다고 나를 소개하는데 얼굴을 들이밀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라. 관등성명 대는데 민망할 정도였다. 그리고 특별히 축구선수 출신이어서라기 보다는 나이가 많아서 군대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할까봐 많이 걱정하셨다. 나는 나이가 있다 보니 이등병 때 대대장님과 맞담배를 피웠다. 그러면서 걱정하시기에 “제가 단체생활을 18년 하다가 왔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겠습니다. 어린 선임이 때려도 참겠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라고 했다.

우리 부대에는 프로야구 넥센 히어로즈 김시진 감독 아들이 전입을 와 혜택을 많이 받았다. 야구 용품을 전부 보내줘 몽골 야구 대표팀보다도 좋은 조건에서 야구를 했다. 당신도 부대의 축구 인프라 정착을 위해 공헌을 좀 했나.

(이)현진이가 수원에서 (조)원희와 같은 방을 썼었는데 원희가 중국으로 진출할 때 용품을 많이 놔두고 간 모양이다. 그래서 방에 남은 축구화를 싹 담아서 택배를 보내줬다. 몇 번 신지도 않은 아디다스 축구화 12켤레가 배달됐다. 또 (홍)순학이 형은 뜯지도 않은 축구화를 보내줬다. 중대장님과 행보관님, 소대장님께 드리고 나머지 축구화는 우리들이 신었다. 다른 소대나 다른 대대하고 축구하면 애들이 다 놀랬다. 아니 무슨 허접해 보이는 애들이 축구화는 프로선수들 신는 걸 맞춰 신고 나오니 얼마나 황당했겠나. 수원 동료들이 도움을 많이 줬다. 수원은 유니폼을 원래 밖으로 못 가지고 나오는데 (조)원희, (이)상호, (하)태균이 유니폼도 아래 위로 싹 다 보내줬다.

원래 골키퍼 출신도 일반인하고 축구를 하면 메시가 된다. 당신도 공격수로 활약했나.

공격도 하고 수비도 했다. 원래 군대 가기 전부터 조기회 나가면 매번 공격을 맡았었다. 기본기와 킥력이 있어서 일반인보다는 낫다. 중요한 시합 때 잠깐씩 골키퍼를 맡기도 했는데 군대 축구는 워낙 변수가 많다. 돌이 너무 많아서 다이빙을 할 수가 없고 공도 자기 마음대로 휜다. 자블라니 저리 가라다. 내가 봤을 땐 (이)운재 형이 와도 안 된다.

축구로 휴가증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휴가증도 휴가증이지만 다른 혜택도 많이 받았다. 원래 부모님이 면회를 오셔야 청원 외박을 나갈 수 있는데 나는 부모님이 안 계셔서 여자친구가 면회를 와도 청원 외박을 허락해줬다. 그런데 행보관님이 내가 평소에 축구로 좀 잘 보였더니 엄청난 혜택을 또 줬다. 여자친구가 운전한 자동차가 위병소를 뚫고 내무실 앞까지 나를 데리러 오도록 해준 것이었다. 그렇게 외박을 나왔는데 다음날 낮에 부대에 확인 전화를 했더니 지금 3소대하고 축구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하더라. 오후 6시 복귀인데 2시에 축구하러 부대로 들어갔다.

여자친구에게는 최악의 남자친구다. 그런데 면회 온 동료는 없었나.

(박)호진이 형 밖에 없다. 그 형은 형수님하고 아이를 데리고 두 번이나 면회를 와서 용돈까지 주고 갔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형이다. 인간성도 좋고 장난도 잘 치고 정말 얼굴도 잘 생겼다. 그리고 이건 당신한테만 하는 말인데 호진이 형은…. (속닥속닥)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

알았다. 나만 알고 있겠다. 그렇게 안 봤는데 박호진 참 의외다.

그 형의 러브스토리도 대박이다.

러브스토리도 말해달라.

호진이 형이 서른살 때 나하고 같이 수원에 집을 보러 갔다. 그런데 공인중개사 아주머니가 호진이 형한테 관심을 보이면서 여자친구는 있는지, 몇 살인지, 직업은 뭔지 자꾸 물어보시더라. 그리고는 “우리 딸이 지금 독일에 유학 가 있는데 참 괜찮다. 한 번 만나보라”고 하는 걸 그냥 웃어 넘겼다. 그런데 이사를 하고 집에 냉장고를 열어보니 김치하고 밑반찬이 다 세팅돼 있는 거 아닌가. 공인중개사 아주머니가 준비해 놓은 거였다. 그래서 전화번호를 받고 그 여자 분과 얼굴도 못 보고 국제전화로 6개월 동안 연락을 했다. 6개월 후에 그 여자 분이 잠깐 귀국해서 닷새 동안 호진이 형을 만났는데 호진이 형 말로는 마지막 날에 뽀뽀를 했다고 하지만 이건 믿을 수 없으니 넘어가고 그 여자 분이 다시 독일로 갔다. 그리고 4개월 더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오자마자 결혼했다. 호진이 형은 참 대단한 사람이다. 인간적으로도 존경스러운 사람이고 여자 문제에 있어서도 참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수원 시절 형들한테는 배울 점이 많다. 형들의 몸 관리도 배워야 한다. 아, 운재 형은 빼자.

박호진의 러브스토리는 참 재미있다. 당신이 아니라 박호진을 인터뷰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우리 인터뷰는 이만 여기에서 끝내자.

나도 아직 할 이야기가 많다.

알았다. 장난이었다. 지금도 박호진과는 자주 연락하나.

그렇다. 내가 이제 막 제대해서 ‘카카오톡’을 잘 모른다. 신기해서 이걸로 자주 연락한다. 어린 골키퍼 친구들은 골키퍼 장갑 사기가 쉽지 않은데 벌써 5개는 가져다 준 것 같다. 후배인 전북의 (김)민식이한테도 몇 개 얻고 대환이 형이 정성룡 선수 장갑도 얻어다주고 호진이 형도 보내준다. 그래서 우리 애들이 “장갑 안 사도 선생님이 다 가져다 준다”고 아주 기고만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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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보는 가슴 아픈 시절 이야기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나하고는 동갑인데 형이라고 부를 뻔했다.

승부조작 소식을 군대에서 접했을 텐데 승부조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다 내 동료들이고 후배들이다. 승부조작에 연루된 한 후배는 지금 2년 자격정지를 당하고 우리 보인고등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감독님한테 매일 혼난다. 정신교육 받고 구박받는다. 애들 운동하는 거 뒤에서 봐주거나 심부름하는 게 일이다. 그런데 얼마 전 대표팀에도 발탁돼 활약한 (서)정진이는 어깨를 당당히 펴고 모교로 찾아온다. 중학교 애들이 모여들어 사인을 받다가 승부조작으로 봉사활동 중인 후배를 보고 이런 말을 한다. “선생님, 저 사람은 뭐에요? 축구선수에요?” 극과 극이다. 한 후배는 국가대표가 돼 돌아오고 한 후배는 승부조작으로 하루에 네 시간씩 봉사활동하고 사진 찍고 확인 도장 받아간다. 참 안타깝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분노하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프다. 승부조작으로 상무에 골키퍼가 없어 당신이 상무에 차출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언제 처음 들었나.

당신 칼럼이 나온 뒤 부대로 전화가 엄청나게 왔다. 제초 작업을 하다가 지인들의 전화를 7~8통은 받은 거 같다. 어안이 벙벙해 인터넷에 접속해 봤더니 칼럼에 내 이야기가 쭉 소개됐고 미니홈피에도 벌써 몇 백 명이 다녀갔더라. 당신이 내 이야기에 대해 너무 잘 알기에 당신의 이름을 검색해 봤다. 그런데 나하고 동갑이더라. 나하고 친한 사람한테 물어봐야 알만한 것들에 대해서 써서 어디서 나하고 같이 축구를 했던 선수인줄 알았다. 그거 다 어떻게 알았나. 나는 군대에 있어서 당신과 인터뷰도 못했는데.

나에게는 다 정보통이 있다. 그 정도 캐내는 건 일도 아니다.

칼럼을 보고 바로 호진이 형한테 전화를 했다. 호진이 형이 상무에 다녀와서 상무 골키퍼 코치인 임종국 선생님하고 잘 아는 사이다. 들어보니 임종국 선생님이 호진이 형한테 전화해서 내 상태가 어떤지, 몸무게는 얼마나 나가는지, 운동은 계속 했는지 물어보셨다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다. “부르면 당장 가겠다. 솔직히 지금은 살지 좀 쪘지만 잘할 자신은 있다고 전해달라.” 며칠 몸 만들면 체중도 뺄 수 있고 당장 몇 경기는 힘들겠지만 없는 거 보다는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날 밤 침상에 누워 무슨 생각을 했나.

상무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상주가 당시 서울전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더 짜릿했다. 수원에 있을 때 후보로 가서 이긴 적은 많지만 내가 직접 서울전에 나섰던 적은 없었다. 일단 내가 속했던 팀의 라이벌이니 얼마나 흥분이 될까. 서울월드컵경기장에 가 몇 만 관중 앞에서 뛰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당신 칼럼을 보고 “저런 쓰레기 같은 선수가…”라는 반응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응원글이 너무 많아서 자신감도 얻었다. ‘승부조작으로 슬픔에 빠진 K리그의 한줄기 희망’이라는 표현이 참 기분 좋았다. 혼자 침상에 누워서 ‘얘가 차면 내가 이렇게 막아야지’, ‘끝나고 멋지게 경례해야지’ 뭐 이런 생각으로 밤을 지샜다.

하지만 결국 당신의 기적적인 K리그 복귀는 물거품이 됐다. 무척 아쉬웠을 것 같다.

프로축구연맹에서도 선수 등록에 문제가 없다는 해석을 내렸다고 전해 들었다. 그런데 부대 간부들이 쉬쉬하는 거다. 결국 해병대 총기 난사 사건으로 최전방 분대장을 빼 갈 수 없다는 통보가 내려졌단다. 간부들한테 “혹시 알고 있었느냐”고 나중에 물었더니 간부들도 차출 가능성이 99%여서 깜짝 파티를 해주고 ‘짠’하고 보내주려고 나한테 말을 안 했었는데 마지막에 틀어져 나를 볼 면목이 없었다고 하더라. 중대장님이 나하고 동갑이었는데 무척 미안해했다. 처음부터 말이라도 안 나왔으면 모르겠는데 괜히 한 번 들떴다가 물거품이 돼 나도 마음이 아팠다. 나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여자친구와 친구들에게 다시 한 번 그라운드에 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무척 아쉬웠다.

나도 당신의 기적적인 복귀를 바랐던 사람 중 한 명이다. 제대를 앞두고의 심정은 어땠나. 다시 한 번 현역 생활에 도전해 볼 생각은 없었나.

마지막까지 현역 복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실제로 제대를 앞두고 한 챌린저스리그팀과 내셔널리그 한 팀에서 영입 제의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장 이 몸으로 어디에 가서 선수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눈앞에는 일단 돈이 가장 중요했다. 2년 동안 월급 10만 원 받고 오히려 여자친구한테 용돈 받고 생활했는데 더는 그럴 수 없었다. 여자친구가 꽃집 문 닫으면 2년 동안 새벽에 아르바이트를 했다. 군대에 있을 때도 눈 치우기 싫어서 면회 오라고 하면 두 시간씩 걸려 면회 와서 라면이라도 끓여주고 가는데 더는 그런 고생을 시키기 싫었다. 일단 돈이 되는 걸 해야 했고 보인고등학교 골키퍼 코치로 오게 됐다. 내가 한 번 하면 ‘올인’하는 스타일이어서 여기 몸 담은 뒤에도 선수 복귀 제의는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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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부임 후 첫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제자들과 기념 촬영을 한 권기보.

지금도 K리그 경기는 챙겨보나. 뛰고 싶은 생각이 날 것 같은데.

축구밖에 아는 게 없어서 그런지 지금도 챙겨보게 된다. 골 먹는 장면을 보면 ‘저건 먹지 말아야 할 골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도 나한테 물어본다. “선생님, 저건 위치를 잘못 잡은 거 아닌가요?” 물론 그 선수들은 프로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는 훌륭한 이들인데 당연히 경기를 하다보면 약간의 실수는 할 수 있다. 경기에 나서는 이들은 모르지만 보는 사람은 그걸 잡아낸다. K리그 개막전 경남-대전전을 봤는데 (김)병지 형님이 프리킥을 막은 뒤에 한 번 더 일어나서 리바운드된 슈팅까지 막아내는 장면을 보고는 대단하다고 느꼈다. 스피드가 전성기 때와 다르지 않다. 경기를 보다보면 나도 1년 몸 만들면 몇 년은 더 할 수 있을 텐데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지도자로서의 생활에는 만족하는 편인가.

애들 가르치는 보람이 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애들을 다 지도하는데 고등학교 애들은 오래된 습관이 있어서 지적해도 버릇을 잘 고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중학교 애들은 금방금방 알아듣는다. 하루 하루 기량이 느는 모습에서 뿌듯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번에 문화체육부장관기 대구MBC 대회에서 전국 우승을 차지했다. 첫 시합에서 바로 우승을 해 학부형들과 학교에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행복하다. 하지만 애들한테 공을 차주다보면 내가 그 공을 잡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100% 만족한다면 거짓말이다.

이번에 우승한 이야기를 해달라. 첫 우승의 기쁨이 남다를 것 같다.

8강전에서 승부차기로 이겼는데 결승전에서 포철공고를 만나 0-1로 지고 있다가 후반 5분 만에 2-1로 역전했다. 그런데 후반 2분을 남기고 우리 수비수가 자책골을 넣어 연장전에 갔고 결국 또 다시 승부차기로 이어졌다. 8강에서 상대팀 3,4번 키커의 슛을 막아낸 우리 골키퍼가 결승에서는 상대 1,2번 키커의 슈팅을 막아내 우승을 차지했다.

승부차기에서 골키퍼의 능력이 발휘됐다니 이거 권기보 코치님이 잘해서 그런 거 아닌가.

그런 말을 주위에서 해주는데 말이라도 고맙다. 우승을 확정지은 뒤 너무 기뻐서 그라운드로 달려 나가 우리 골키퍼 아이를 안고 뽀뽀해주고 좋아했다. 그때는 눈물이 안 났다. 그런데 한 명이 이렇게 좋아하고 있으면 다른 한 명은 울고 있을 거 아닌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대팀 골키퍼를 보니 눈물이 나더라. 그 친구를 일으켜 주는데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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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의 현역 생활은 끝났지만 그는 이제 지도자로서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당신은 참 인간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

수원에서 아무리 잘해도 경기에 못 나갈 때는 정말 힘들었다. 방황도 많이 했고 외박을 받으면 무조건 술을 마셨다. 나도 유망주였고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 워낙 쟁쟁한 형들이 많아서 내 자리가 없었다. 호진이 형하고 대환이 형도 10년차가 넘었는데 100경기 출장이 간당간당했다면 말 다 한거 아닌가. 그리고 뭔가 잘 될 거 같으면 부상으로 주저 앉을 때가 많았다. 손가락이 부러졌었는데 지금도 다 안 펴진다. 몸이 괜찮을 만하면 다치고 경기에도 못 나가서 참 힘들었다.

반대로 가장 즐거웠을 때는 언제인가.

에두가 수원에 있을 때 그 친구는 훈련 도중에도 강슛을 날린다. 운재 형이 바로 앞에 있다고 해서 가볍게 슈팅하는 걸 못 봤다. 훈련할 때도 골키퍼 2m 앞에서 후린다. 골키퍼 얼굴에 맞건 상관 안한다. 자기는 프로페셔널이라 골 넣는 연습하는 거라는 데 뭐 할 말이 있겠나. 그래서 형들이 에두가 슈팅할 때는 아무도 안 나섰다. 그러면 내가 막내니까 나가야하지 않겠나. 그냥 웃으면서 그렇게 훈련했던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나는 내가 형들보다 훨씬 더 오래 운동을 할 줄 알았는데 지금도 나만 빼고 이 아저씨들은 다 운동을 하고 있다. 슬프다.

비록 선수 생활을 일찍 마쳤지만 지도자로서 멋지게 성공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앞으로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은가.

나는 절대 손찌검이나 욕을 안 한다. 요즘은 이런 운동하라고 설명해주면 “이 운동은 저하고 안 맞는데요”라면서 당돌하게 말하는 애들이 많다. 우리 때는 그런 거 없었다. 그냥 시키면 무조건 해야하는 거고 제대로 하지 않으면 주먹 날아오고 ‘빠따’ 맞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요즘 애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우리 골키퍼가 동계훈련 때 10골을 먹으면 80~90%는 자기 실수였다. 능력은 있는 친구인데 기술보다는 심리 상태를 잘 다듬었더니 대회에 나가서는 선방도 하고 우승도 이끌었다. 친구처럼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선수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수원에서 함께 했던 형들보다는 먼저 선수 생활을 마쳤지만 지도자로서는 내가 형들보다 먼저 시작했다. 그 형들보다 선수로서는 부족했지만 지도자로서는 더 높은 자리까지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