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지하철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들이 있어 화제였다. 가난한 젊은 연인의 이 결혼식에 감동한 이들이 무척 많았다. 하지만 이는 곧 대학 연극동아리 학생들의 창작 상황극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록 연극으로 밝혀졌지만 아름답고 특별한 결혼을 꿈꾸는 이들에게 이 일은 잠시나마 감동을 전해줬다. 일생에 한 번 뿐인 결혼식을 특별하게 꾸미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을 것이다. 오늘은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결혼식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축구장에서 인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이들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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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재섭은 구단 직원의 딸과 홈 경기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전북현대)

구단 직원 딸과 결혼한 변재섭

1998년 전북 소속이던 변재섭은 2군 버스기사와 친했다. 어색할 수도 있는 선수와 구단 직원 사이였지만 같이 저녁도 먹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였다. 그러던 중 2군 버스기사는 성실한 변재섭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 사촌동생 한 번 만나볼래? 너하고 참 잘 어울릴 것 같아.” 이렇게 변재섭은 2군 버스기사의 소개로 한 여성을 만났고 서로 첫 눈에 반해 사랑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열애 도중 변재섭은 여자친구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 아버지께서도 우리 구단에서 근무하신다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전북 구단 수송담당 이영철 반장이었다. 축구선수와 구단 직원의 딸이 만난 것이다.

1년 넘게 사랑을 이어간 이 둘은 결혼을 결심했다. 처음에는 딸이 자기 몰래 선수와 사귄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던 이영철 반장도 딸의 남자친구가 평소 성실하게 축구에 전념하던 변재섭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결혼을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게 이 둘은 양가 부모님의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그러자 변재섭이 예비 신부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우리 축구장에서 결혼하자.” 축구를 통해 만나게 됐고 많은 팬들 앞에서 축하를 받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버지와 사촌 오빠가 전북현대에서 일해 평소에 축구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던 예비 신부도 흔쾌히 이에 동의했다. 이 둘은 2001년 9월 24일 전주종합운동장에서의 결혼을 약속했다.

이날은 전북과 울산의 정규리그가 열리는 날이었다. 부상으로 경기에 나설 수 없게 된 변재섭은 유니폼이 아닌 턱시도를 차려 입고 전반을 대기실에서 지켜봤다. 전북이 전반에 2-0으로 앞서나가자 결혼식 분위기도 무르익었고 하프타임이 됐다.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신랑, 입장하세요. 어서 그라운드로 입장하세요.” 변재섭이 턱시도를 입고 등장하자 관중들은 환호를 보냈지만 신부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변재섭이 대기심판석 앞 대형 풍선을 향해 강슛을 날렸고 이 공은 정확히 풍선을 맞춰 터뜨렸다. 풍선 뒤에 있던 신부가 모습을 드러냈고 변재섭의 등번호 11번을 상징하는 모형 비둘기 11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지금까지 선수들의 수송을 담당해온 이영철 반장, 아니 장인어른이 딸을 사위에게 수송(?)했고 주례사가 이어졌다. 보통 주례사는 끝도 없이 이어지지만 하프타임을 이용한 결혼식이라 주례사는 1분여 만에 끝났다. 이 둘은 무게차를 타고 불꽃놀이로 분위기가 달아오른 경기장을 한 바퀴 돈 뒤 관중들, 아니 하객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축구장에서 결혼했으니 당연히 선물도 축구공이었다. 이렇게 15분 동안의 멋진 결혼식은 막을 내렸다. 국내 최초로 축구선수가 축구장에서 올린 이 결혼식은 15분 만에 끝났지만 참 아름다웠다. 전북 구단 모기업이 자동차를 생산하는 회사답게 꽃으로 치장된 웨딩차량과 스포츠카를 지원하고 결혼식 비용 일체를 부담하면서 앞날의 행복을 빌었다.

박건하, 한복 입고 그라운드에 서다

같은 해 11월 수원 ‘레전드’ 박건하도 축구장에서 결혼했다. 2년 간 사랑을 키워오던 박건하는 결혼을 결심하고 평범한 예식장에서의 결혼식을 구상했다. 시즌이 마무리 되는 12월 9일 결혼식을 위해 한 호텔의 예약까지도 마쳤다. 하지만 수원 구단과 결혼 이벤트 업체 측에서 깜짝 제안을 했다. “월드컵 경기장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이제 막 건설을 마친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일생에 단 한 번뿐인 특별한 결혼식을 올리자는 제안이었다. 박건하와 예비 신부도 이에 동의했다. 11월 4일로 결혼식 날짜를 바꿨다가 FA컵 일정과 겹치자 11월 10일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확정했다.

이날 결혼식은 전통 궁중예식으로 치러졌다.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귀빈들로 가득 차던 귀빈실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박건하가 대기했고 경호원 대기실은 하객 대기실로 탈바꿈했다. 폐백실은 1층 VIP 대기실에서, 피로연은 경기장 연회실과 중앙 로비에서 진행됐다. 경기장 입구에서부터 결혼식장 중앙 무대까지는 양탄자가 깔렸고 장군 1명, 문관 4명, 내금위 6명, 가마꾼 4명의 호위 속에 신랑과 신부가 꽃가마를 타고 입장했다.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지인들과 수원 서포터스는 평소 골을 넣은 뒤 깃을 세우는 세레모니로 유명한 박건하가 한복을 차려 입고 그라운드에 등장하자 열광적인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 결혼식은 월드컵 개최를 200일 앞둔 상황에서 2002월드컵 수원경기추진위원회가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다. 결혼식장 사용료는 물론 경기장 전광판 사용료까지도 모두 무료였다. 프로 생활을 수원에서만 하며 선수 시절 16차례나 각종 대회 우승컵을 들어 올린 박건하는 결혼식도 경기장에서 치르는 등 수원의 ‘레전드’로 불릴 완벽한 요소를 갖췄다. 박건하가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은 10년 뒤 2011년 8월, ‘빅버드에서 잊을 수 없는 명장면 10선’으로 선정돼 경기장에서 다시 한 번 상영되기도 했다. 홈 경기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이 팀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한 박건하는 무척 행복한 축구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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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관이 하프타임을 이용해 결혼식을 치르고 서포터스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이장관)

전반에는 총각, 후반에는 유부남

축구장 결혼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는 또 있다. 바로 부산에서 뛰던 이장관이다. 2002년 3월 24일 부산구덕운동장에서 올린 이장관의 결혼식은 정말 특별했다. 부산과 울산의 아디다스컵 경기에 열리던 이날 이장관은 언제나 그렇듯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팀의 주축 선수인 이장관이 빠지면 전력에도 큰 손실이 있기 때문에 그를 선발에서 제외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이장관은 전반전 내내 특유의 활동량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결혼식을 올릴 신랑이라면 며칠 전부터 피부 관리를 받고 결혼식 당일에는 미용실에 가 꽃단장을 하는 게 보통이지만 이장관은 이 시간에 상대팀 선수에게 태클을 하고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결혼식 전 아리따운 신부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이장관은 전반전이 끝나자 쏜살 같이 라커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2분 뒤 땀에 젖은 머릿결을 휘달리며 그라운드에 다시 등장했다. 유니폼을 입고 있던 이장관은 신랑으로 변신해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팬들은 “이장관 선수의 결혼을 축하합니다”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그를 반겼다. 전반전 45분을 뛰고 결혼식을 올리는 축구선수가 또 있을까. 더 놀라운 건 이장관이 짧은 결혼식을 끝내고 다시 유니폼을 갈아입은 채 후반전에 또 나서 후반 9분 교체되기 전까지 경기에 나섰다는 점이다. 전반전에는 총각으로, 후반전에는 유부남으로 경기에 나선 세계 최초의 선수가 바로 이장관이었다. 1만 6천여 하객 앞에서 축복을 받으며 결혼하는 기분은 어떨까.

이장관은 구덕운동장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나를 키워준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당연히 팬들에게 결혼 소식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족과도 같은 팬들의 축하를 받고 싶어 홈 개막전에 맞춰 결혼식을 올렸다.” 땀에 젖은 채 소감을 말하는 이장관의 모습은 비록 다른 신랑들에 비해서는 흐트러져 있었지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신랑이었다. 주례를 맡았던 이의 주례사도 무척 인상 깊었다. “행복의 문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열리는 게 아닙니다. 부지런히 노력을 하고 같이 호흡을 맞춰야 합니다. 신랑과 신부가 완벽한 팀을 이뤄 행복의 문에 골을 넣길 바랍니다.” 이장관의 결혼식은 그 어떤 결혼식보다도 특별하고 아름다웠다.

결혼은 일생에 한 번 뿐인 특별한 이벤트다. 그런 결혼식까지도 축구장에서 치를 정도로 축구가 일생의 전부인 K리그 선수들이 있다는 게 참 행복하고 고맙다. 피와 땀을 흘린 그라운드에서 일생의 동반자와 미래를 약속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일이다. 또한 축구장에서의 결혼식은커녕 주말에 만날 여자친구도 없는 내 입장에서는 이런 특별한 결혼식이 부럽기 짝이 없다. 나도 언젠가는 축구장에서 아리따운 여성과 결혼하고 싶다. 지나, 보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