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레전드' 임중용이 팀을 떠날 가능성도 있다. ⓒ인천유나이티드

인천유나이티드의 역사와도 같은 선수가 이번 주 일요일(30일) 정든 그라운드를 떠난다. 2004년 인천의 창단 때부터 함께 한 ‘영원한 주장’ 임중용은 상주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현역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알파이부터 유병수까지, 로란트 감독부터 허정무 감독까지 인천의 모든 걸 겪은 그는 이제 인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작별한다. 은퇴경기를 앞두고 있는 그와 마지막으로 현역 생활을 정리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인천의 창단 멤버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임중용은 오는 30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물러난다. 그를 만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진=인천유나이티드)

반갑다.

나도 반갑다. 작년까지 <비바! K리그>에도 나오고 잘 나가던데 얼굴도 더 핀 것 같다. 요새 돈 좀 많이 버나.

에이, 별로 못 번다.

우리 구단 매치데이 매거진도 쓰던데 지난 번에 ‘임중용이 숭의에서 은퇴식을 하면 의미가 더 클 것 같다’는 글도 잘 봤다.

그냥 그렇다. 그건 넘어가고 이번 주말 은퇴 경기를 앞두고 준비는 잘하고 있나.

지난 시즌 마지막 경기인 제주전을 끝으로 1군 경기에 나선 적이 없다. 올 시즌부터는 플레잉 코치라는 직함을 달고 2군에서 훈련을 했다. 사실 같이 훈련한 게 아니라 거의 애들 보조 맞춰주는 수준이다. 선수 부족하면 머리수 채워주고 뭐 그런 역할이다. (우)성용이 형이 2군 코치라 그 밑에서 지도하는 법도 배우면서 2급 지도자 자격증을 땄다. 올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허정무 감독님께서 의미 있는 은퇴경기를 준비해 주셔서 지난 주부터 1군 훈련에 합류했는데 거의 1년 동안 쉰 탓에 몸이 안 따라준다. 허리가 안 돌아 간다. 아주 죽겠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후반 막판 10분 정도 시간이 주어질 거라고 하던데.

감독님께서 올 시즌을 앞두고 팬들과의 만남에서 “임중용 은퇴경기를 올 시즌에는 꼭 치를 수 있도록 하겠다. 5분이 됐건 10분이 됐건 반드시 은퇴경기를 치러줄 것”이라고 하셨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더 오래 뛰고 싶지만 요새 팀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고 시즌 마지막 경기라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하기 때문에 내 출전 시간이 중요한 건 아니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인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만족할 생각이다. 5분이면 5분, 10분이면 10분 감사하는 마음으로 뛰겠다. 우리가 3-0 정도 크게 이기고 있으면 내 출전시간이 더 늘어날 수 있으니 경기 내내 우리 후배들을 열심히 응원할 생각이다.

은퇴에 관한 이야기는 천천히 들어보자. 일단 당신의 첫 프로 시절부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당신은 ‘초호화 군단’ 부산대우 출신이다. 그것도 르네상스였던 1999년, 그것도 주전으로 대우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시작이 참 좋았다.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실업팀 한일생명에 입단했었다. 실업에서는 최강 팀이었다. 당시 1년 동안 우승을 세 번하고 준우승을 두 번했다. 결승에만 다섯 번이나 진출한 것이다. 대회란 대회는 모조리 입상했다. 그런데 IMF가 터져서 팀이 사라졌고 이미 K리그 드래프트도 끝난 상황이라 갈 수 있는 팀이 없었다. 당시 한일생명을 지휘하던 신윤기 감독님께서 부산대우 스카우트로 가시면서 나를 불러주셨다. 드래프트를 거치지 않아 연습생으로밖에 갈 수 없었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내 프로 인생이 시작됐다.

연습생 신분이면서 일약 주전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나.

처음에는 경기에 나서지도 못하고 2군에만 있었다. 그때 안종복 사장님께서 “언젠가는 기회가 한 번은 올 테니 준비를 잘 하고 있으라”고 하셨다. 때마침 우리 2군 선수들이 실업과 프로가 나란히 출전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 모습을 사장님께서 지켜보셨다. 그래서 이 중 나를 포함한 2군 두 명이 1군으로 올라갔다. 1군에서 훈련하고 있는데 막강했던 우리 팀이 3연패를 당한 상황에서 분위기 반전용으로 내가 정규리그 경기에 투입됐다. 지금은 중앙 수비수지만 당시에는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아직도 기억난다. 수원과의 경기였는데 ‘이 경기에서 못하면 나는 끝이다. 한번 밖에 기회가 없다’는 생각으로 몸을 사리지 않고 경기에 임했다. 경기에서 패하고 다시 2군으로 내려갈 줄 알았는데 다음 경기에서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졌다. 이때부터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면서 7연승을 내달렸다. 그때 기회를 잘 잡아서 주전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계약도 제대로 다시 하고 계약금도 받았다. 일이 잘 풀렸다.

당시 부산대우는 K리그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팀에 속한다. 그 일원이 된 게 무척 뿌듯했을 것 같다.

국가대표 선수만 6~7명이었다. (안)정환이를 비롯해 (정)재권이 형, (우)성용이 형, (신)범철이 형, (이)장관이 형, 샤샤, 뚜레 등 대단한 선수들이 많았다. 거기에서 경기에 나설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척 큰 영광이었는데 연승을 기록하다보니 자신감도 하늘을 찔렀다. 당시 내 월급은 연습생 신분이어서 세금 다 떼면 83만 원이 고작이었는데 부모님한테 보내드리고 30만 원으로 한 달을 생활했다. 사 먹을 거 사 먹고 형들하고 놀러도 자주 다녔다. 적은 돈이지만 그래도 할 건 다 했다. 돈 잘 버는 형들이 더 많이 내지 않느냐고? 후배라고 나도 많이 냈다.

당시 대우의 인기는 대단했다. 직접 겪은 인기는 어느 정도였나.

경기 시작하기 전에 암표상이 경기장 주변에서 극성을 이뤘다. 몸 풀러 나가면 경기 한참 전인데도 이미 관중석이 반은 넘게 차 있었다. 유럽 축구장 분위기라고 보면 된다. 선수 입장을 할 때면 관중석은 꽉 들어차 있었는데 ‘행복하다’는 생각이 절도 들 정도였다. 경기가 끝나면 팬들이 숙소로 몰려왔고 평소 훈련장에도 50명이 넘는 팬들이 와서 구경을 했다. 선물도 몇 박스씩 왔다. 행복한 시기였다.

에이, 다 안정환 팬 아니었나.

무슨 소린가. 내 팬도 좀 있었다.

부산 시절 임중용의 경기 모습. 하지만 그는 부산에 김호곤 감독이 부임한 뒤 그라운드에 서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당신의 행복했던 시기는 딱 1년 만에 끝났다. 김호곤 감독이 부임한 뒤 주전 경쟁에서 아예 밀렸다.

1999년에 연습생으로 골키퍼를 제외한 선수 중에 가장 많은 경기에 나섰다. 그러면서 중간에 다시 계약을 해 계약금도 받고 인정도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내가 가는 팀은 이상하게 해체가 잘 된다. 한일생명도 해체됐었고 부산대우도 현대산업개발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김호곤 감독님이 새로 부임하셨다. 감독님이 연세대 시절 제자들을 대거 데려오셨는데 그러면서 내가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처음에는 개의치 말고 운동에만 집중하자고 생각했는데 교체 명단에만 이름을 올린 채 한 시즌 동안 무려 27경기나 따라 다녔다. 27경기 중 실제로 뛴 시간이 얼마였는지 아는가. 딱 1분이었다. 아직도 기억한다. 포항전에서 후반 추가 시간에 들어가서 1분 뛴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경기에서 제대로 안 했다고 감독님께 혼이 났다. 그때 마음을 정했다. ‘여기 있으면 안 되겠구나.’

저런, 제대로 찍힌 모양이다. 다른 팀 이적을 준비했을 것 같은데.

주변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때마침 나를 원하는 팀이 있었다. 그래서 김호곤 감독님을 찾아 가서 솔직하게 다른 팀에서 뛸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감독님께서는 “안 된다”고 하셨고 그 길로 그냥 숙소를 나왔다. 축구를 더 하고 싶어 고민을 하다가 얼마 후에 다시 동계훈련 중인 팀에 찾아가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독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저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살게 좀 도와주세요. 한 번 도와주시면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김호곤 감독님이 일언지하에 “절대 안 된다”면서 딱 잘라 거절하셨고 더 이상 희망이 없어 결국 구단에 이야기하고 팀을 나왔다. 그래서 임의탈퇴로 공시됐다.

불과 1년 만에 로얄즈의 주전에서 백수가 된 셈이다.

짐에 와서 생각해 봤는데 무척 힘들었다. 욱하는 마음에 실수를 한 건 아닌가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축구밖에 없는데 막막했다. 1년 4개월을 쉬었다. 때마침 2002 한일월드컵이 열리고 있던 시기였는데 거리에 나가면 온통 사람들이 빨간 티셔츠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었다. 그래서 집에만 있었다. 우리 가족들도 내가 축구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서 월드컵 경기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2002 한일월드컵이 누군가에게는 힘든 시기였다는 걸 오늘 처음 느낀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생각은 안 했나.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셨는데 아버지 따라다니면서 6개월 정도 운전기사 노릇만 했다. 아버지께서도 “축구에 미련 버리고 사업을 같이 하자”고 하셨다. 하지만 6개월 동안 운전만 해보니 이거 몸이 근질근질하고 뻐근해서 미칠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운 게 축구뿐인데 ‘기사는 내가 할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무척 많이 했던 시기다.

이런 상황에서 친구들과 술 마시고 어울려 다니면서 방황하는 친구들을 종종 봤다. 당신도 그랬나.

1년 4개월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친구들이 만나자고 해도 내가 피했다. 다시 축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돌아갈 길이 없어 막막했다. 아마 다시 축구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버지 사업을 계속 했을 것 같다. 축구 안 하는 게 더 좋았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괴로워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심정도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이다. 당시 안종복 사장님과 김석현 부단장님이 부산 구단에서 나와 ‘이플레이어’라는 에이전트 회사를 차렸었다. 그런데 내가 하도 축구에 미련을 두니 부모님께서 나 몰래 두 분을 찾아가셨던 모양이다. “우리 아들 다시 축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셨단다. 그랬더니 안종복 사장님이 “기다리면 기회가 오니 일단 몸이나 잘 만들고 준비하고”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훗날 내가 인천에서 자리를 잡은 뒤 형으로부터 듣게 됐다. 부모님도 마음고생이 상당하셨을 것이다.

부모 마음이야 다 똑같지 않을까. 다시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김호곤 감독님이 부산에서 경질되고 포터필드 감독님이 새로 오셨다. 구단에서도 다시 운동을 하자고 전화가 와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거의 1년 반 가까이 운동을 하지 않아서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동계훈련을 하는데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지금은 광주 감독으로 계신 당시 최만희 코치님이 나를 불렀다.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은데 생각을 잘해서 빨리 결단을 내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아니, 그렇게 풀어달라고 할 때는 안 풀어주더니 그때는 또 풀어준다더라.

원래 세상은 1등만 대우받는 곳 아닌가.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나.

성균관대에서 나를 지도하셨던 임고석 감독님이 실업팀 수원시청에 계셨다. 내가 갈 곳이 없어지자 그 분이 나를 불렀다. “프로에 대한 미련 접고 나와 여기에서 운동하다가 공무원 자격증도 따자”고 하셨다. 그래서 수원시청이 전지훈련 중인 제주로 내려갔는데 거기에서 내 운명이 바뀌었다.

임중용은 2003년 한해 동안 대구FC에서 활약했다. 그에게 대구는 새로운 축구 인생을 열어준 고마운 곳이었다.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

때마침 대구FC가 창단해 제주로 전지훈련을 왔었다. 수원시청과 한 호텔을 썼는데 호텔에서 대구 박종환 감독님과 마주쳤다. 신윤기 감독님과 잘 아는 사이라 내가 뛰던 부산 경기도 많이 보신 분이다. 나를 딱 보더니 “너 여기서 뭐하냐”고 하기에 “수원시청에서 운동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대구 와서 운동해”하시더라. 몸도 안 되고 가면 민폐만 끼칠 것 같아서 고사했는데 박종환 감독님이 딱 한 마디 더 하셨다. “그냥 와 인마.” 그래서 대구FC 창단 멤버로 가장 늦게 합류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상황에서 혹독하기로 유명한 박종환 감독의 조련을 받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다.

열심히 정도가 아니라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새벽 운동도 빠지지 않았다. 당시 하성준 수석코치님이 특히 나를 많이 도와주셨다. 야단도 치고 새벽마다 날 챙겨주신 분이다. 전반기 때는 몸 상태를 끌어 올리는 데만 주력했고 후반기가 되어서야 경기에 나설 수 있는 몸이 됐다. 하성준 코치님이 박종환 감독님한테 이야기해서 그때부터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이때 중앙 수비수로 보직을 바꿨는데 첫 경기 부천과의 맞대결에서 내가 상대 장신 공격수의 공을 다 따냈다. 경기가 끝난 뒤 감독님이 부르시더니 “내년부터는 출전을 보장해 주고 주장까지 맡길 생각을 하고 있으니 다른 팀 갈 생각 말고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내가 재기할 수 있게 해준 대구에는 지금도 고맙다.

하지만 당신은 이듬해 곧바로 인천으로 이적했다. 이거 배신 아닌가.

대구에서 첫 시즌에 대우를 제대로 못 받았다. 신인들보다도 연봉이 적었다. 워낙 몸 상태가 엉망이고 가장 늦게 들어온 사람이라 나도 이에 수긍했다. 한 시즌 끝난 뒤 재계약 테이블에 앉았는데 아니 세상에 첫 해에 받았던 연봉에서 더 깎는 거다. 내가 만약 어린 나이면 그냥 남을 수도 있었다. “열심히 하면 내년에는 한 만큼 올려주세요”라고 할 텐데 그때 내 나이가 28살이었다. “여기에서 더 깎으면 저는 어떻게 먹고 사느냐. 기본보다는 조금 더 달라”고 하자 재계약 불가 방침을 통보 받았다. 한 번 더 협상 테이블에 앉았었는데 그 때도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손을 내민 게 인천유나이티드였나.

마침 인천이 창단을 했는데 입단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할 때였다. 그런데 인천에 부임한 안종복 사장님한테 전화가 왔다. “대구에서 얼마 받느냐”고 하시기에 “얼마 받는다”고 하니까 “야 인마 그거 받고 어떻게 해. 거기보다 더 많이 줄 테니까 올라와”라고 하셨다. 더 좋은 대우를 약속한 곳이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지만 대구에서 날 다시 일으켜 준 스승에 대한 도리는 해야 했다. 내가 재기할 수 있게 도와준 하성준 코치님을 찾아가 솔직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대구에서의 제안은 이렇고 인천에서의 제안은 이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이 대구에 남으라고 하시면 군말 않고 남겠습니다.” 이건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나를 이끌어 준 스승님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코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네가 우리 팀에 있으면 좋겠지만 네가 더 대우를 받으려면 인천으로 가는 게 낫겠다. 주저 말고 가렴.” 결국 어렵게 인천을 선택할 수 있었다.

브라질 선수도 90도로 인사하게 만드는 박종환 감독님이 가만히 계시진 않았을 것 같다. 그 분 성격이라면 무슨 일이 나도 났을 것 같다.

“너 이 XX 어디가. 인마. 내가 너 죽인다”고 전화로 불호령을 치셨다. “알아서 연봉 더 챙겨줄 테니까 돌아오라”고 하셨다. 대구 구단에서도 재계약하자고 연락이 왔다. 진작 좀 해주면 좋았을 텐데 이미 인천과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후였다.

인천에서의 첫 시즌에 대한 느낌은 어땠나.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시민구단이지만 자본금도 풍부했고 선수들도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전재호와 (권)찬수 형, (김)현수 형 등 성남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멤버들도 합류했고 최태욱도 왔다. 가장 좋은 신인 선수들도 선점할 수 있었다. 거기에 터키 국가대표 알파이까지 왔으니 분위기가 어찌 안 좋을 수가 있을까. 대구에서 건너온 나와 (김)학철이 형이 가장 늦게 팀에 합류했다.

김학철도 당신과 같은 이유로 대구에서 인천으로 이적한 건가.

사실 학철이 형은 대구에서 경기에 다 나섰고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았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받아 인천으로 오게 된 거다. 당연히 대구 팬들도 학철이 형의 이적에 대해 분노했다. 인천 소속으로 대구와 경기하는데 학철이 형 화형식도 하고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대구에서 많은 경기를 뛴 선수가 아니라 감독님한테는 혼이 났어도 팬들한테는 별로 욕을 안 먹었다. 묻어간 셈이다.

원래 악플보다 슬픈 게 무플이다. 이제 당신이 모든 열정을 쏟은 인천 팀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2005년 무시무시한 돌풍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당시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나.

역시 장외룡 감독님의 역할이 컸다. 자율축구라는 게 K리그에는 거의 없었는데 이걸 처음 정착하신 분이다. 선수들하고 소통도 자주 했고 사생활을 거의 간섭을 안 하셨다. 운동장에서 보이는 것만으로 평가하셨다. 운동량이 무척 적었는데 처음에는 참 편했다. 운동도 적게 하고 내 시간도 많았다. 그런데 이게 좀 지나니까 같이 운동할 걸로는 경기에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더라. 자연스럽게 선수들이 개인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상대팀 경기도 보고 그랬다. 누가 시킨 게 아니다. 또 예를 들어 세 시 훈련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시 반에 훈련장에 집결해 공 가지고 놀면서 몸 푸는 현상이 생겼다. 자율축구가 제대로 먹혔다.

장외룡 감독이 차지한 비중이 역시 컸던 것 같다. 무언가 기존 감독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영화 <비상>을 찍을 때였다. 3연승을 하고 원정 경기에서 광주를 만났다. 전반전을 0-1로 지고 하프타임 때 라커룸에 들어왔는데 (이)정수와 라돈치치가 서로 라커룸에서 치고받고 싸웠다. 라돈치치가 카메라를 치우라고 욕을 하는 등 분위기가 무척 삭막했다. 그런데 감독님이 조금 뒤에 들어오셨다. 감독님이 이 모습을 보고 어떻게 했을 것 같나.

아마 내가 감독이었으면 화가 머리 끝까지 나 불호령을 내렸을 것 같다.

아니다. 감독님께서 우리 앞에서 무릎을 꿇으셨다. “제발 날 위해서라도 한 경기만 헌신해다오. 부탁한다”고 하셨다. 일순간 적막이 흘렀다. 자존심 굽히는 걸 정말 싫어하던 라돈치치가 감독님을 일으키면서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렸다. 싸웠던 정수와 라돈치치 뿐 아니라 외국인 선수를 포함한 모든 선수들이 다시 그라운드로 나가면서 “무조건 이겨야 한다. 감독님을 위해 이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후반에 거짓말처럼 세 골을 몰아넣어 3-1 역전승을 거뒀다. 그 이후 분위기를 타 우리의 연승 행진은 쭉 이어졌다. 감독님은 우리에게 그런 분이셨다.

감동이다. 제자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감독은 세상에 별로 없다. 당신은 당시 주장이었다. 주장으로서의 역할도 중요했을 텐데.

꼭 내 역할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고참과 중고참, 그리고 어린 선수들의 조화가 잘 이뤄졌다. 특히 이들을 묶는 연결고리가 무척 튼튼했다. 내가 주장으로서 화를 내면 중고참들이 그걸 좋은 이야기로 풀어서 어린 선수들을 독려하고 반대로 내가 좋은 소리하면 중고참들이 싫은 소리하면서 어린 선수들을 집중시켰다. 이렇게 서로 연결고리가 튼튼하다보니 경기할 때도 끈끈한 플레이가 잘 나왔다. 한 번은 아기치와 술을 마셨는데 아기치가 그런 말을 하더라. “여태껏 많은 팀에 있어봤지만 너희처럼 국내 선수와 외국 선수가 다 같이 가족처럼 감싸주는 팀을 보지 못했다. 내가 나중에 어딜 가더라도 기억에 남을 팀이다.” 이게 우리의 돌풍 원동력 아닐까. 경기 나가면 무조건 이긴다는 생각이 들었고 경기가 끝나도 피곤한 걸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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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중용은 영화 <비상>을 통해서 큰 관심을 받았다. 인천유나이티드가 주연이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임중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했다.

영화 <비상> 이야기를 빼놓고 당신을 인터뷰할 수가 없다. 당신은 영화배우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연기력이 상당했다.

요새도 <비상>을 보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카톡’으로 물어보는 팬들도 있고 새로 들어온 선수들도 자주 물어보는 질문이 “그거 다 연기 아닌가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연기가 아니다. 사실 처음에는 <비상>의 주인공이 FC서울이었다. 그런데 그쪽에서 촬영에 난색을 표시했고 그러면서 우리가 주연이 됐다. 웬만한 감독님은 안 된다고 할 텐데 장외룡 감독님은 ‘OK’였다. 그래서 허물없이 훈련할 때도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었고 장난칠 때도 편하게 찍을 수 있었다. 대부분이 ‘리얼’이다. 그 다음 시즌에 오디오를 입혀야 된다고 일부러 훈련 때 태클하고 소리 지르는 걸 의도적으로 찍은 적은 있지만 나머지는 다 실제 상황이었다.

어찌됐건 당신은 흥행 배우다. 다음 작품 섭외는 안 들어오나.

에이, <비상>에서 내 비중이 컸지만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우리 인천유나이티드였다. 내가 방에서 독백하듯 넋두리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건 영화 감독님 방에 놀러가서 그냥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 거였다. 그런데 그 형님은 그걸 다 찍어 놓는다. 방에 가면 카메라가 여러 대 설치돼 있는데 나는 그게 찍히는 줄도 몰랐고 영화에 나갈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영화의 핵심이 돼 있더라.

당신의 명대사는 지금도 많이 회자된다. 우리나라 영화계의 주옥 같은 명대사 대열에 합류한 ‘야, 인마. 라돈. 투게더하라고’ 이 대사 말이다.

그때도 촬영을 하지는 몰랐다. 훈련할 때는 그라운드 바깥에서 찍기 때문에 의식을 못하고 있었다. 골대를 나르는 장면이었는데 이건 다 같이 해야 한다. 그런데 평소에 골대를 잘 나르던 녀석이 그날따라 꾀병을 부리더라. 후배들도 다 있는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영화 시사회에서 그걸 보고 저걸 도대체 왜 영화에 내보내는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평소 라돈치치에게 싫은 소리를 많이 했던 걸로 알고 있다. 왜 그렇게 라돈치치를 싫어했나.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다. 라돈치치는 “잘한다”고 칭찬해주면 거만해지는 스타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라돈치치에게 좋은 소리만 해줬는데 누군가는 그에게 쓴소리를 해줘야했다. 우리 팀에 있을 때 항상 “자만하지 말라. 지금 이 상태로 만족하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많이 했는데 그럴 때면 라돈치치는 “알았으니까 더 말하지 마. 알아서 한다”고 했다. 나도 물론 라돈치치가 타지에서 고생하는 건 알고 있고 잘해주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팀이 발전하고 그 선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악역이 되어야 했다. 또한 외국인 선수를 편애해주면 국내 선수들에게도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내가 라돈치치한테 싫은 소리를 많이 했어도 운동 외적으로는 그와 장난도 자주했다. 2인 1조로 펼치는 훈련에서도 라돈치치와 내가 파트너였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주장으로서 그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 그렇게 했을 뿐이다.

요새도 가끔 <비상>을 보나. 나 같으면 내가 출연한 영화를 수도 없이 돌려볼 것 같다.

사실 그 영화를 끝까지 다 본 건 시사회 때 한 번밖에 없다. 이후에는 본 적이 없다. 지금도 CD로 소장하고 있는데 그걸 보면 옛날 생각이 많이 나고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일부러 안 본다. 하지만 나에게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고마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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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는 수원 에두와의 마찰로 한 동안 회자되기도 했다. 당시 경기에서 임중용에게 침을 뱉는 에두의 모습. (사진=MBC 방송 캡쳐 화면)

수원 에두와의 ‘침 사건’도 유명하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제는 자세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오해가 많은 사건이었다. 그때 느꼈던 게 ‘아, 역시 기업구단과 시민구단은 힘에서 차이가 있구나’라는 것이었다. 언론도 매정했다. 당시 수원과의 경기에서 에두와 몸싸움이 잦았다. 그런데 에두가 나한테 뭐라고 욕을 하고 걸어가기에 다가가서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에두가 나를 다시 툭툭 치면서 또 뭐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툭 밀었더니 갑자기 나한테 침을 뱉고 뛰어가더라. 그래서 내가 따라가면서 욕을 했는데 그때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켰다. 나는 당연히 나한테 침을 뱉은 에두를 퇴장 시킬 줄 알았다. 물론 나도 밀치고 한 건 잘못이었지만 에두의 비신사적인 행동에 대응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주심이 나에게 퇴장을 줬다.

당시 에두는 퇴장을 당하지 않았었다.

주심은 내가 침을 뱉었다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에두가 뱉은 침이 내 목에 맞았는데 그걸 안 닦고 있었다. 그래서 주심한테 “여기 보라. 내가 침을 맞았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그러면서 “쟤 봐봐라. 내 침이 어디에 맞았느냐”고 했는데도 판정을 바뀌지 않았다. 시야가 가려져 있는 상황에서 부심이 내가 에두한테 침을 뱉은 걸로 착각한 거다. 당시 언론에서는 내가 먼저 침을 뱉자 에두가 따라 뱉었다고 했는데 그러면서 팬들도 “임중용 선수 <비상>때 멋있게 봤는데 비신사적인 선수여서 실망했다”고 하더라.

그래도 지금은 나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

에두가 독일로 진출하면서 “당시 불미스러운 일을 겪은 나한테 미안하다”고 인터뷰한 걸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정말 억울했지만 다 지나간 일 아닌가. 나는 경기장에서 누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절대 먼저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다. 이 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지금은 에두도 해외로 나갔는데 거기에서 잘돼 K리그의 힘을 보여줬으면 한다. 나는 맹세코 당시에 침은 절대 뱉지 않았다. 내 축구 인생에서 검색어 1위에 오른 두 번의 사건 중 한 번이었다.

또 한 번의 검색 순위 1위는 언제였나.

‘임중용 경기 도중 혼절’ 모르나.

기억난다. 2008년 일 아닌가. 경기 도중 의식을 잃고 쓰러져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던 그 일 아닌가.

맞다. 전북과의 경기였다. 우리가 또 전북하고 하면 경기력이 괜찮아서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연패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습도가 많이 높은 날이었는데 경기 전 몸 풀 때는 컨디션이 괜찮았다.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고 코너킥을 하려는 순간까지만 기억난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면서 쓰러졌고 의식을 잃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인공호흡도 하고 문제가 심각했다고 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벤치였다. 다시 그라운드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벌써 교체가 된 상황이더라.

그러면서도 병원에 가지 않고 끝까지 벤치에 남아 선수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경기에서 분위기 반전을 하고 싶었는데 내가 고참으로서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동료들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팀 닥터가 “빨리 병원으로 가자. 지금 저거 보면 뭐 달라질 게 있느냐”고 했는데 나는 끝까지 남아서 경기를 지켜보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내 자신에게 엄청 욕을 하면서 경기를 봤다. 제발 우리 팀이 이기길 바랐다. 나중에 경기가 끝난 뒤 병원에 가니 과도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했다. 푹 쉬어야 했다. 당시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긴 많이 받은 모양이다.

당신의 투혼이 빛난 그 모습을 보고 나도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도 경기에 나섰다고 하던데.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당시 상황을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다.

2004년이었다. 당시 아버지께서 암 말기로 집에 계실 때였다. 광주 원정을 떠나는 날이었는데 숙소에서 자다가 문득 아버지 생각이 너무 났다. 새벽 두 시에 룸메이트한테 “잠깐 집에 좀 다녀와야겠다”고 하고 인천 숙소에서 중계동으로 달려갔다. 아버지께서 내가 오는 걸 아셨는지 주무시지 않고 계시더라. 아버지 눈을 딱 쳐다봤는데 문득 ‘오래 못 사시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를 부르신 것만 같았다. 한 시간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운동 열심히 하라”면서 “결혼하는 여자 보고 죽었어야 되는데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고 “돌아가실 사람처럼 그런 이야기하지 마시라”고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게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숙소에 와 오전 운동을 마치고 광주 원정길에 오르려는데 사장님이 나를 불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경기도 중요하지만 빈소를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셨다.

임중용은 K리그 통산 293경기, 그 중 인천에서만 218경기에 출전해 6골 2도움을 기록했다. 인천에서만 5년 동안 주장을 역임한 그는 이번 주 인천에서 마지막으로 219경기에 나선 뒤 은퇴할 예정이다. (사진=인천유나이티드)

하지만 당신은 빈소에 가지 않고 광주 원정길에 오른 걸로 안다.

사장님께 이야기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거 같아서 새벽에 다녀왔습니다. 그냥 경기에 나서겠습니다. 팀도 중요한 시기인데 빠지고 싶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형한테도 전화를 드렸는데 그분들 역시 “중요한 경기인데 빈소보다는 경기가 우선”이라고 해주셨다. 그래서 빈소를 뒤로하고 광주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그라운드에 들어서니 불효자가 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슴 속으로 90분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뛰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경기가 끝난 뒤 아버지 빈소로 달려갔나.

정말 감동받은 건 그 이후다. 경기가 끝나고 구단 버스가 인천 숙소로 바로 올라온 게 아니라 아버지 빈소로 향했다. 감독님과 사장님, 외국인 선수 모두 원정 경기가 끝난 뒤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우리 아버지 빈소를 찾았다. 이런 팀이 세상에 또 있을까. 기분도 상해 있고 경기에 집중하느라 친구들한테 연락도 못했는데 빈소에 가니 스승님들과 친구들, 후배들도 엄청 많이 와 있더라. 너무 감격했다. 사실 윗분들은 빈소에 들렀다가 인사만 하고 가시는 게 보통인데 안종복 사장님은 아버지 발인까지 지키셨다. 윗분이 안 가시니 외국인 선수고 뭐고 끝까지 남아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아버지 발인 때 동료들이 모두 함께 해줬다. 내가 우리 인천 구단을 사랑하고 사장님한테 헌신하는 마음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이듬해 베스트11 상패를 아버지 산소에 바칠 때는 가슴이 뭉클했다.

인천이라는 팀의 끈끈한 동료의식이 괜히 나오는 건 아닌 것 같다. 인천에서 뛰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2005년 수원과의 컵대회에서 0-4로 완패했다. 그 이후 정규리그 원정경기에서 다시 수원을 만났다. 아마 (방)승환이가 골을 넣는 걸로 기억한다. 적지에서 수원을 2-0으로 이겼는데 그 이후 쭉 연승가도를 이어가게 됐다. 가장 기뻤던 경기 중에 하나다. 그리고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2005년 챔피언결정전 울산과의 1차전 아닐까. 당시 울산과 정규리그에서 붙었을 때는 한 번도 지지 않았다. 그래서 무조건 이번에도 우리가 이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신감이 오히려 자만심이 됐다. 이천수한테 해트트릭을 허용하면서 1-5로 졌는데 결과가 참담한 경기였지만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때 잘했으면 더 대단한 역사를 썼을 텐데 아쉽다. 당시 전·후기리그가 아니라 통합 성적으로 따졌으면 우리가 K리그 챔피언으로 AFC 챔피언스리그에 나가는 거였다.

인천 팬이라면 임중용을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가 없다. 이토록 팀에 헌신하는 선수가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사진=인천유나이티드)

영화 <비상>에서 최고의 악역이었던 이천수가 기억난다. 그런데 인천의 창단 멤버로 있으면서 주축 선수들이 팀을 떠나는 모습을 누구보다 많이 지켜봤다. 이정수와 최효진, 김치우, 데얀, 라돈치치 등 숱한 선수와 작별을 해야 했다. 심정이 어땠나.

우리 팀의 여건이 좋지 않아 좋은 선수들을 팔아서 운영해야 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정들었던 선수들을 매년 떠나보내야 하는 마음은 참 괴롭다. 나는 마음이 강한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더 좋은 조건으로 떠나게 된 거여서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저 선수들이 남으면 내년에는 더 강한 팀이 될 텐데’라는 아쉬움도 있었다. ‘아마 그 선수들이 다 남아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쯤 어떤 모습을 보여줬을까’ 생각이 든다. 많이 아쉽고 속상하고 그랬다.

인천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는 언젠가. 혹시 후회한 적은 없나.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인천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하루도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우리 팀 성적이 좋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불행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다. 나는 여기에서 사랑스러운 아내와 결혼하게 됐고 쌍둥이 아이들까지 얻었다. 팬들의 사랑도 듬뿍 받았다. 인천에 와서 다 잘 됐다.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인천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래도 숭의전용구장에서 은퇴경기를 하면 더 의미가 컸을 텐데 아쉬움은 없다.

당신이 우리 매치데이 매거진에 쓴 칼럼을 읽어봤다. ‘임중용이 문학경기장이 아닌 숭의경기장에서 은퇴경기를 하면서 새롭게 팀이 시작하는 게 뜻깊지 않나’라는 주제였던 걸로 기억한다. 무척 고마웠다. 나도 솔직히 숭의에 가 은퇴경기를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문학에서 하는 것에도 만족한다. 어떻게 보면 여기가 정도 많이 든 곳이고 내가 마지막으로 문학에서 은퇴경기를 하고 떠난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숭의경기장이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르는 것 아닌가.

이제 임중용이라는 이름 세 글자는 인천 팬들의 기억 속에 ‘영원한 캡틴’으로 남을 것이다. (사진=인천유나이티드)

당신과 3년 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신은 ‘은퇴를 하면 언젠가는 나도 인천 팬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아직도 이 말은 유효한가.

당신이 한 시간이나 늦은 그때 인터뷰를 나도 기억한다. 그때 그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인천에 남고 싶다. 코치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구단이 있더라도 나는 인천을 위해서 남을 생각이 있다. 인천에 남아서 선수들을 뒤에서 돕는 역할을 하고 싶다. 아마 많이 공부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 쌍둥이들은 인천에서 나고 자란 ‘진짜 인천사람’이다. 아이들이 크면 경기장에 데리고 와 아빠가 뛰던 자랑스러운 팀에 대해 알려주고 싶다. 나와 우리 가족이 선택할 수 있는 팀은 인천밖에 없다.

훗날 인천의 감독이 되는 꿈을 꿔본 적은 없나.

내가 인천의 감독이 되는 건 나한테는 국가대표 감독이 되는 것과 똑같은 영광이다. 이 팀의 창단에서부터 함께하고 여기에서 은퇴한 뒤 사람들이 나를 원해서 감독으로 쓴다면 더할 나위없는 영광일 것이다. 나에게는 최종적인 목표나 다름없다. 그러기 위해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신을 아껴준 팬들에게 인사를 해 달라.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건 우리의 팬들과 구단 프런트, 거쳐 간 감독님들 덕분이다. 특히 팬들에게 무척 고맙다. 그라운드에 있을 때도 여러분들 덕분에 행복했고 그라운드 밖에서 경기를 지켜볼 때도 인천의 한 일원이라는 게 뿌듯했다. 서포터스를 볼 때마다 ‘저분들 때문에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인천이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지금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여러분들 덕분에 행복하게 선수 생활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진심을 다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임중용은 화려한 개인기를 지닌 공격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가대표 경력이 있는 선수도 아니다. 하지만 빛나지 않는 곳에서 항상 묵묵히 인천의 최후방을 지키면서 헌신해 인천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가 왜 인천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 빈소도 지키지 못하고, 혼절한 뒤에도 벤치를 떠나지 못하고 인천을 위해 헌신한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는 영원한 ‘인천의 캡틴’이다.